낭만 없는 술 이야기
“옛날 소시지빵, 초코 페스츄리, 크림치즈 바게트..”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적이 있나. 나는 읊어본 적 있다. 스무 살 첫 알바를 끝내고 친구들과 노가리를 까던 중이었다. 주량을 모르고 더 맛있다는 이유로 소맥을 말아먹는 통에 홀로 취해 진상을 부리고 있었다. 초반에는 웃음이 나더니 갑자기 눈물이 터졌다. 같이 일하는 아주머니의 갑질에 쌓인 서러움이 그제서 터진 것이었다. 긴장하고 외우던 빵 이름을 읊어댔다. 우는 나를 보고 친구들은 놀란 것도 잠시 킥킥거렸다. 술 마시고 우는 사람은 개진상이라고 들었는데.
술보다는 술자리가 좋고, 맥주보단 소주가 좋다고 말하고 다녔다. 갓 스무 살이 되고 신입생 환영회, 엠티를 따라가며 어색한 동기, 선배와 술자리를 가지고 아침엔 말짱한 정신으로 마주쳐야 했다. 술을 마시는 게 좋았다. 술의 힘을 빌려 솔직해지거나 과감해지기를 좋아했다. 그때 나는 반쯤 정신을 놓고 살고 싶었다. 재밌는 술자리에 끼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인싸가 된 기분을 누리고 싶었다. 그렇지만 난 인싸가 되지 못했고 오래 사귄 친구들과 술자리를 가지는 게 전부였다. 주변에는 술을 좋아하지 않는 동기와 기독교 동아리 사람이 대분이었다. 인생이 더럽고 힘든 날 함께 술을 마셔줄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짝사랑하던 오빠는 동아리 리더였다. 차마 같이 술을 먹자고 할 수 없었다. 그 오빠도 다른 모임에선 애주가일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주량도 세지 않아 소주 한, 두 잔이면 얼굴이 금방 빨개졌다. 취한 게 아니었음에도 얼굴부터 목까지 시뻘게져서 사람들의 오해를 샀다. 너는 이제 먹으면 안 되겠다면서 금방 돌려보내려고 하거나 그만 먹으라는 원성을 샀다. 정말 취한 게 아니라 얼굴이 잘 빨개지는 것뿐이라고요! 억울함에 소리치고 싶었다. 술을 잘 마시고 싶었다. 오래도록 사람들과 함께 있고 새벽까지 머무르고 싶었다. 그렇지만 서울에서 술을 내내 마시고 비디오방에서 밤을 새웠을 때는 다신 할 짓이 못된다고 생각했다.
이십 대 후반이 되고 술을 멀리하게 됐다. 술을 마시고 다음날 있을 숙취가 싫었고 칼로리 높은 음식이 술보다 좋아졌고 몸이 삐걱삐걱 망가지면서 술을 견뎌내기 싫어졌다. 술을 혼자 먹을 자취방도 없고 함께 먹을 사람도 마땅찮아 혼자 술집에 가 먹을 정도로 좋아하진 않았다. 그냥 나는 술과는 인연이 없는가 보다, 건전하게 살아야 할 운명인가 보다 받아들이기로 했다.
술은 아직 미스터리한 영역이다. 마실 때도 술이 무슨 맛인지 잘 몰랐던 것 같다. 정신을 빼놓아 준다는 사실 말고 이점이나 유익함을 몰랐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퇴근 후 집으로 돌아와 맥주 한 캔을 마시며 스트레스를 푸는 직장인들의 마음에 공감할 수 없다. 힘들 때 술이 먹고 싶었던 시절도 잊어버렸다. 술이 아닌 다양한 방법으로 나를 달랬다. 가끔 나도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데 비슷한 걸까. 순간적이지만 피로가 풀리는 느낌을 붙잡고 고단한 하루를 견디는 걸까. 잠시나마 위로가 되어주는 술이라는 존재는 지금의 나보다 더 어른의 영역 같고 신비해 보인다. 언젠가 인생의 쓴맛에 치여 술맛이 달아지면 우아하게 캔을 딸 수 있는 날도 올지 모르겠다. 아직은 초콜릿에 우유팩을 따는 게 좋아서 기다려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