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으며
직장에서 별 탈 없는 하루였지만 막상 집에 돌아와서 침대에 곧장 뻗어버렸다. 누군가에게 쓴 소리를 들은 것이 영 신경쓰였나보다. 쿨하게 넘긴 줄 알았는데, 표정 일그러짐 없이 '넵'이라고 아무렇지 않은 척 했는데, 사실 내 마음은 그 말을 잘 소화시키지 못했나보다. 잠깐 누워있는다는게 그만 한시간 반 가량을 잠들었다. 시계를 보니 밤 10시가 넘어 있었다. '이런, 아직 씻지도 못했는데' 속으로 읊조리며 일어나려고 애썼다. 비몽사몽한 상태가 쉽게 가질 않았다. 아침에 라디오를 틀어서 잠을 깨는 것이 루틴인 나는 밤잠도 라디오로 떨쳐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매일 듣는 M 라디오를 습관적으로 틀었다. 가수 루시의 '21세기 어떤 날'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눈이 번쩍 뜨였다. 한창 내가 좋아했던 노래였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들으니 어찌나 반가운지. 아마 라디오를 안틀었다면, 관심없는 노래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면 볼륨을 줄이고 다시 침대에 얼굴을 파묻고는 밍기적거렸을 테다. 하지만 그 힘찬 노래를 들으니 순식간에 몸과 마음이 훅 가벼워졌다.
이날 라디오에선 '졸업'을 주제로 DJ와 게스트가 선곡 대결을 벌이고 있었다. 나는 원래 특색있는 차별화된 코너를 좋아하는지라, 이렇게 단순히 노래 선곡하는 시간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다, 오늘따라 노래 한곡한곡이 왜이리 마음을 건드릴까. 이상은의 '언젠가는', 브로콜리너마저의 '졸업'...그렇다. 이 노래들은 다 이별을 이야기하는, 하지만 우리 서로를 잊지 않을 거고 언젠가 다시 만날 거라는 뭉클한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브로콜리너마저의 '졸업'을 들으니 나의 고등학교 졸업식이 떠올랐다. 졸업식날 밴드부 아이들이 저 노래를 불렀기 때문이다.
난 어느 곳에도 없는 나의 자리를 찾으려 헤매었지만 갈 곳이 없고,
우리들은 팔려가는 서로를 바라보며
서글픈 작별의 인사들을 나누네.
이 미친 세상에, 어디에 있더라도 행복해야 해.
넌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이 미친 세상에, 어디에 있더라도 잊지 않을게.
잊지 않을게. 널 잊지 않을게.
그때 나는 즐거운 졸업식날에 밴드부가 왜 하필 저런 우울한 노래를 부르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를 않았다.
미친 세상이라니? 우리 이제 스무살 대학생이 되어서 캠퍼스의 낭만을 잔뜩 즐길 일만 남았는데 말이다.
팔려간다니? 각자의 꿈을 자유로이 펼칠 일만 남았는걸.
세상에 대한 반항심을 담은 듯한 가사들이 굉장히 오그라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후 직장인이 되어, 종일 지쳤던 하루의 끝에 저 노래를 들으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래 미친 세상이지. 응, 여러모로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이지. 그런 세상을 살아가는 내게,
어린 시절의 친구들이 '행복하라고 부디 행복하라고 잊지 않겠다고' 지금의 나에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그때 그 친구들의 어리고 해맑은 얼굴이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바쁘게 살다보니 몇년 간 떠올린 적 없는 얼굴들이었다. 오랜만이구나.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퇴근 후 지쳐있는 상태로 찜찜하게 자정을 넘길 줄 알았는데,
라디오에서 우연히 흘러나온 노래들이 나를 상쾌하게 일으켜주고, 또 따스히 위로해주고
그렇게 방전된 나의 배터리를 고속충전으로 채워주었다.
심야 라디오 덕에 지저분하던 마음을 하얗게 세탁하고 포근히 잠들 수 있었으니,
하루의 끝이 행복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