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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자마카롱 May 04. 2021

쉼표, 가을 휴가

고랑이: 자기야, 전에 회사에서 건물 보수를 하려고 한다고 했던 거 기억나? 다음 주부터 남은 연차를 쓰라고 하네. 휴가를 제대로 가고 싶었는데, 올해도 어렵겠네...

유자마카롱: 괜찮아. 대신 그럼 나랑 재미있게 놀자~


얼마 전, 퇴근하고 돌아온 고랑이는 조금 풀이 죽은 모습으로 집으로 돌아옵니다. 월급날과 쉬는 날, 그리고 휴가 가는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모든 직장인의 마음은 같은 것 같아요. 


저희 커플은 연애기간을 포함해서 함께한 시간이 4년 가까이 되었지만, 서로 업무상 비수기와 성수기가 워낙 다르기 때문에 휴가를 낼 수 있는 시간이 달라서 아직까지 3박 이상을 함께 어딘가에 가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작년이나 올해만큼은 연차를 모아서 한국에 꼭 한번 가고 싶다는, 한국에서 배달음식부터 수산물 시장, 마장동에서 한우 맛보기, 부산에서 돼지국밥 먹기 등 '맛집 투어'를 하고 싶다는 고랑이의 꿈은 올해도 어렵겠지만 갑자기 생긴 쉬는 날은 잘 보내기 위해 그를 다독여 봅니다.


막상 휴가 아닌 휴가로 시간이 주어졌지만, '여행'으로 돌아다녔던 수많은 도시들과 달리, 저에게 호주는 가장 오래 머물렀지만 이곳을 '여행'이 아닌 '삶'으로 살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꿈꾸는 대자연이 펼쳐지고 여유로운 여행지들은 아직 가보지 못한 곳들이 참 많다는 생각을 합니다. 시간적 여유가 있었으면, 그래도 코로나 상황이 완화된 지금 어디라도 갈 수 있을 텐데 싶었지만, 일단 가을 휴가 첫날 아침인 만큼, 고랑이가 좋아하는 음악도 틀어놓고 함께 커피를 여유롭게 마시며 '어디를 걸어볼까?' 하며 이야기를 이어가 봅니다


최근 호주에서는 홍수로 비가 무척 많이 왔던 날이 이어진 후, 최근에 본격적인 날이 좋은 가을 날씨가 이어졌기에 저는 집 근처에서 멀지 않고, 코로나 동안 가고 싶었으나 갈 수 없는 곳들을 하나씩 적어봅니다. 혼자 걸어도 좋았던 산책로와 노을이 예뻤던 곳, 한국에 있는 친구가 놀러 왔을 때 추억이 있던 곳, 지난번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결국 가지 못했던 곳... 하나씩 적어보니 주어진 날보다, 더 많은 장소들을 적게 됩니다. 


감사하게도, 고랑이의 휴가 시작과 함께 때마침 집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와이너리에 초대받게 됩니다. 

화창한 가을날씨에 어울리는 와인들과 얼마 후면 출시될, 2021년 빈티지 와인들을 맛보기도, 추수를 마치고 앙상한 가지에 곱게 물든 포도 단풍잎을 보며 걸을 수 있는 기회를 가져보기도 합니다. 


또 집에서는 제법 거리가 있지만, 저에겐 호주 첫 여행지였던 해변산책로를 쭉 따라 함께 걸으며 파도소리를 듣기도 하고, 다른 날에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페리를 타고 도착한 바닷가에서 커피를 마시며 산책길에 나서서 제법 높은 곳에 있는 등대에 오르기도 합니다. 내려오는 길에는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멋진 집들과 커다란 식물들이 가득한 거리에서는 우리가 가장 어울리는 집을 찾거나, 각 집에 가장 잘 어울리는 영화배우 이름을 말하는 게임을 해보기도 합니다. 



휴가지가 아닌 집에서 보내는 휴가이기에, 창문을 활짝 열고 환기를 시키고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는 일상은 계속 이어집니다. 고양이들과 함께 놀아주며 비디오를 찍기도 하고, 집에서 제법 긴 영화를 보기도 하고, 늘 그렇듯 장을 보러 가지만 한창 철인 모과와 감, 밤, 배와 사과, 석류까지 잔뜩 사 와서 식탁 위에 과일바구니로 꾸며보기도 합니다. 우유를 사러간다는 핑계를 만들어 마트까지 일부러 걸어가기도 하고, 써놓고 보내지 못했던 카드를 찾아 우체국에 부치러 가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지금은 이유도 생각이 나지않는, 별 것 아닌 일에 서로 조금 심통이 나있다가 왠지 이런 날은 예쁜 노을을 보면 다 노을빛에 말랑말랑해질 감정일 것 같아서, 삶은 계란 몇 알과 과일, 그리고 물병을 준비해서 집에서 멀지 않은 산책로를 걸어보기로 합니다.


오후 4시 반쯤이 되었는데도 제법 해가 질듯한 풍경에 잠시 벤치에 자리를 잡고 간식을 먹으며 노을을 기다립니다. 가만히 앉아있기에는 심심해서 꽤나 귀여운 외모를 자랑하지만, 유난히 시끄러운 새들이 많은 길목과 유난히 키가 큰 나무들이 있는 산책로를 지나 해변을 걷다 보니, 노을 너무 예뻐서 앞을 보다가 감탄하고, 또 뒤를 돌아서도 감탄사를 내뱉게 됩니다. 


여전히 눈을 보면 무서워서 잘 마주치지 못하지만, 어릴 적 동화책 삽화에 나오는 듯한 펠리컨이 수영을 하는 모습이 점점 노을을 배경 삼아 움직이는 그림자 보이는 것을 보니 이제 제법 어둑어둑 해진 것 같습니다. 돌아오는 산책로에 밤 산책을 하는 사람들의 발걸음과 개구리 소리가 함께 낮게 깔리며 또 하루가 이렇게 지나갑니다.


바람도 거의 불지 않고, 유난히 예쁜 노을 덕분인지 뾰족뾰족한 마음이 녹아내린 고랑이는 오랜만에 본인이 맛있는 것을 해주겠다며 집으로 돌아와 콧바람을 불며 요리를 시작합니다. 아껴두었던 와인도 꺼내고, 오븐에서 나오는 따뜻한 온기와 고소한 냄새에 문득 이 가을 휴가가 참 감사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90년대에 태어난 와인은 정말 가을에 어울리는 황금빛을 머금고 있었고, 고랑이가 준비한 음식과 너무나 멋지게 잘 어우러졌습니다. 


늘 왠지 휴가에는 좀 더 특별한 곳, 먼 곳을 가야 한다는 생각이 늘 있었습니다. 퇴근한 날 밤부터 움직여서 새벽 비행기를 타고 와서 바로 출근을 하는 빡빡함과 특별한 곳을 다녀왔다는 뿌듯함. 수많은 사진들.  때로는 그런 생각 때문에 일정은 빡빡하고, 휴가를 다녀와서 출근을 시작하는 며칠을 힘들어했던 기억이 나면서 가장 일상과 가깝다 못해 일상인 것 같은 이번 가을 휴가는 참 특별한 것 같습니다


가을 휴가

 '휴가'. 쉴 '휴'(休) 자와 겨를, 틈 '가'자가(暇) 합쳐져서 만든 말. '잠깐 빌려서 만든 쉬는 시간'이라는 뜻을 헤아려보니 왠지 이번 가을 휴가는 제가 지금까지 보낸 휴가 중 가장 '휴가'답게 보낸 휴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어느 유명한 곳을 다녀왔다'가 말해야 하는 시간이 아니라 '틈내서 쉼을 가진' 시간답게 보낸 휴가. '일상'이라는 길게 이어지는 문장에 가장 적절한 쉼표를 찍을 수 있었던 이 가을 휴가가 참 감사하다는 생각을 덧붙여 봅니다. 


쉼표를 잘 찍은 올 한 해. 2021년 남은 2/3의 시간을 유난히 잘 보낼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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