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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자마카롱 Aug 22. 2021

귀여운 고사리

개구리 코끼리 고사리

"자기야. 비상이다 비상! "

이곳은 6월 말에 시작된 락다운이 9월 말까지로 연장되면서 외식은커녕 집 밖으로 외출이 어려운 것은 물론이고, 저희 커플이 가장 어려워하는 것은 바로 '한인마트에 갈 수 없다는 점'입니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한인마트가 15킬로쯤 떨어져 있고, 쇼핑에 관심이 없는 저희 집 남자 고랑이를 순식간에 쇼퍼홀릭으로 변신하게 만드는 큰 한인마트는 50킬로쯤 떨어져 있는터라 집 밖으로 5킬로 이상 나가는 것이 제한되어 있고 한 가구당 1인만 마트를 갈 수 있는 이 기간 동안, 저희는 조금씩 냉장고와 냉동실, 팬트리에 잠자고 있던 식재료들을 야금야금 겨울을 나는 개미처럼 꺼내먹어 봅니다.

신김치를 송송 썰어 비빔국수를 말아먹기도, 냉동실에 남아있던 어묵을 넙적하게 썰어 넣어 어묵탕을 만들어먹기도, 얼려둔 순대 몇 조각과 양배추를 썰어 넣어 라면에 넣어먹기도, 북어를 한 움큼 넣어 불린 미역과 함께 북어 미역국을 끓여먹기도, 미리 사다둔 삼계탕 재료와 쌍화탕을 넣어 삼계탕을 압력솥에 간단히 해먹기도 하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마치 화장품이 동시에 떨어지듯이 깨소금도 똑, 들기름과 참기름도 똑, 새우젓도 똑, 마른 육수재료도 심지어 한인마트에서 살 수 있는 잡곡과 한국 쌀도 한 톨도 남은 것이 없이 똑 떨어졌습니다.


특히 고랑이의 '삶의 질의 척도'인 찬장 가득 쌓아두었던 한국 3종류의 '김'과 '라면'은 어느새 몇 봉지만 남아 찬장에 빈 공간이 가득 보이기 시작한 뒤, 고랑이는 하루에 한 번쯤은 한국 드라마의 남자 배우는 저리 가라 할 만큼 촉촉하고 슬픈 눈으로 '김'과 '라면'이 한 때 가득했던 찬장을 쳐다보곤 합니다.

이번 주, 햇볕이 깊숙하게 잘 들어온 날 좋은 하루 동안 저는 일을 하고, 고랑이는 주방 청소를 담당하기로 합니다. 파스타부터 참치 통조림 등등 이미 많은 식재료들을 락다운 기간 동안 저희가 하나씩 다 꺼내먹은 터라 훨씬 정리가 수월하여 생각보다 일찍 끝났다는 고랑이는 개선장군처럼 익숙한 봉지 하나를 들고 저에게 다가옵니다.

고랑이: 자기야, 좋은 소식이 있어! 그 왜 있잖아.... 그거. 버섯 향이 나는 맛있는 거. 그거 찾았어
유자 마카롱 : 그거?... (뭐지...??)
고랑이: 맛있고 길쭉한데 이름 귀여운 거! 코끼리 개구리 같은 귀여운 이름이었는데,,,,
유자 마카롱:아, 고사리 말하는 거야?
고랑이 : 응! 고사리! 귀여운 고사리!

세상에, 고사리가 귀여운 이름이 될 줄은 몰랐네요. '코끼리 개구리 고사리'라니요- 오늘의 보물 찾기의 최고 횡재인, 찬장 뒤편에 잘 숨어 있었다는 말린 고사리를 봉지를 꺼내어 저는 쉬는 시간 동안 몇 번을 헹궈서 미리 준비해둔 쌀뜨물에 불려둡니다. 조금만 불려놓을까 이참에 양껏 불려놓아 소분해두어 육개장도 끓여보고, 밥에도 넣어먹고, 나물로 무쳐먹어 보기로 합니다. 정리하며 버릴까 싶었던, 마지막 남은 참기름 병과 들기름 병을 거꾸로 뒤집어 두고, 마늘 한 톨 남은 게 있는지 냉동실을 한번 더 확인해봅니다.


귀여운 고사리

전날 불려놓았던 고사리를 꺼내어 다시 헹궈주며 너무 나뭇가지 같이 뻣뻣한 부분이 없는지 확인한 뒤, 끓는 물에 삶아주었다가 손가락 두 마디 정도로 길이로 잘라줍니다. 길게 늘어져 고불고불한 부분을 혀로 느끼며 아삭아삭하고 야들야들한 식감으로 먹는 게 고사리이지만, 살짝 전반적으로 뻣뻣한 식감이 있기도 하고 좀 더 먹기 좋게 하기 위해 오늘은 잘라서 준비합니다. 다음에 하루 뜨끈하게 육개장이나 된장국을 푹 끓여먹으면 좋을 것 같아서, 소분해서 냉동실에 얼려주고, 남은 고사리들은 다시 나누어 하나는 미리 불려둔 밥 물에 함께 밥을 준비합니다. 고랑이가 지난번에 고사리를 넣어 밥을 지어먹으면 어떻겠냐고 아이디어를 냈거든요.


또 반은 고사리나물을 하기 위해 다진 마늘과 고추, 기름과 함께 준비해줍니다. 미리 사다둔 파가 없어서 조금 아쉽지만, 그래도 뜨끈한 밥에 올려먹으면 이만한 반찬이 없으니 오랜만에 맛볼 고사리의 풍미에 입맛을 다셔봅니다.  어제 뒤집어놓은 기름병을 다시 확인해보니 들기름도 참기름도 딱 마지막에 고사리나물을 완벽하게 만들어 줄 것 같습니다.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매운 고추 조금과 마늘을 다져놓은 것을 약불에 기름을 우려냅니다. 마늘냄새와 고추 냄새가 살짝 올라오면서 보글보글 기름이 퍼지면, 잘 삶아놓은 고사리를 볶아주며 마리 어제 우려 둔 표고버섯 물을 마르지 않게 조금씩 부어줍니다. 고사리를 젓가락으로 풀어주듯이 볶아주면서, 간장으로 간을 살짝 해준 뒤 마지막에 작은 된장 한 스푼을 풀어주어 고사리나물을 볶아줍니다. 불을 끄고 들기름과 참기름을 조금 뿌려서 올리면 완성- 잘게 썰은 파와 깨소금은 없지만 그래도 제법 먹을만한 고사리 나물이 완성되었네요.


나물이 완성되는 동안, 고사리밥 올려놓은 압력솥은 치익치익 구수한 냄새를 풍기며 힘차게 돌아갑니다. 고랑이는 신이 났는지, 이제 몇 개 남지 않은 김 두 팩을 꺼내어 고사리나물과 함께 밥을 먹을 준비를 합니다. 오늘은 밥에도 고사리와 잡곡을 가득 넣어 밥을 했으니 그대가 좋아하는 귀여운 고사리나물은 며칠 동안 조금씩 아껴먹자는 말을 그에게 건네봅니다. 그는 아쉬워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입니다.


곧 뜨근하고 찰진 고사리밥을 파란 밥그릇에 고봉밥을 만들어 식탁에 올린 뒤, 뜨끈한 고사리나물과 남은 갓김치, 그리고 계란, 김으로 한상을 차려 봅니다. 조금은 빈약해 보이는 밥상에, 눈으로 나마 새송이 버섯과 파프리카를 볶아서 왼쪽 편에 올려보고, 늘 만들어두면 고랑이가 게눈 감추듯이 먹어대는 들깨가루와 들기름, 고추에 된장으로 무친 가지나물도 올려보고, 명란과 치즈를 넣어 돌돌 말아 포근하게 계란옷을 겹겹이 입힌 명란 치즈 계란말이도 뜨끈한 밥 위에 올리는 상상을 해봅니다.


락다운이 끝나고 이렇게 한국 반찬으로 가득 이렇게 하루 한 상 차려주겠다고 약속을 하며 귀여운 고사리와 함께 저녁 한 끼를 소박하게 먹습니다. 그래도 고랑이가 맘먹고 꺼낸 김 두 봉지에 뜨끈한 고사리밥을 올려 고사리나물까지 올려먹으니 고소함이 배가 되어 저녁식사를 잘 마무리해봅니다.




남은 고사리나물을 빨간색 반찬통에 담아 뚜껑을 잘 닫아주어 냉장고에 넣은 뒤 이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아직 남은 고소한 냄새와 갓 지은 밥이 식어가는 냄새에 집안 가득 마치 할머니 집 문풍지 틈으로 전해지는  기름 냄새와 어릴 적 큰 어머니가 매년 주문해서 정성스레 제사상에 올리셨던 야들야들하고 풍미가 가득한 고사리의 통통하고도 먹음직스러운 빛깔이 생각이 납니다.


이 긴 락다운이 끝나면 한인마트에 들려 녹두를 사서 불리고, 간 돼지고기와 신김치를 송송 썰어, 오늘 냉동실에 고사리와 숙주를 조금 섞어서 두툼하게 비 오는 날 녹두 빈대떡을 끝트머리를 바싹하고 고소하게 몇 장 구워 막걸리 한잔을 곁들여보아도 좋겠다는 상상을 더 해 봅니다. 바깥에 비가 보슬보슬 창문 끝부터 그림을 그려가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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