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버닝, 2018
사회적 계급이 다른 두 남성 간의 대립, 그리고 그들에게 수단으로밖에 존재하지 못하는 한 여성의 이야기.
돈을 벌기 위해서는 번호로 호명될 수밖에 없는 택배 배달원 종수, 배고픔에 굶주린 ‘스몰 헝거’ 보다는 삶의 의미를 찾는 ‘그레이트 헝거’가 되고픈 해미는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종수에게는 분노조절장애인 아버지와 그 때문에 집을 나간 어머니가 있다. 해미에게도 가족이 있지만 카드값을 갚기 전에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처지이다. 종수에게 반복해서 오는 아무 말도 없는 전화, 있다고는 하지만 도무지 보이지 않는 해미의 고양이는 그들의 결핍을 상징한다.
아프리카에 갔던 해미가 데려온 벤이라는 남자,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차를 타며, 노는 것과 일하는 것의 구분이 없는 삶을 산다. 그의 하품, 이 또한 결핍의 상징이다. 아무런 목적이 없는 삶, 공허한 삶, 이를 채워주는 그의 유일한 취미는 들판의 낡은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일이다. 쓸모없고 지저분한 비닐하우스를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태우는 일에서 재미를 느낀다. 명백한 범죄임을 알고 있지만, 태워지길 기다리는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일에는 아무런 죄책감을 가질 수 없다. 그는 판단하지 않는다. 그저 ‘자연’처럼 원래부터 존재하는 것이다. 그가 날 때부터 좋은 집에 살고 종수는 날 때부터 낡은 집에 사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태워지길 기다리는 비닐하우스는 해미의 존재와 묘하게 겹쳐진다. 해미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지길 원한다. 존재의 공백, 결국 그녀는 바램대로 그렇게 사라진다. 종수의 어머니와 해미의 고양이는 나타났지만 종수는 그렇게 또 다른 결핍을 맞이한다.
종수에게 해미는 일종의 환상과도 같았다. ‘사랑’이라는 그럴싸한 포장으로 결핍을 덮어줄 수 있는. 해미가 사라지고, 종수는 알 수 없는 불안과 집착에 휩싸인다. 왜 해미의 시계가, 해미의 고양이가 벤의 집에 있을까. 해미의 자리를 다른 여자로 대체한 벤의 하품은 여전하다. 그는 아마 또 다시 비닐 하우스를 태울 것이다.
벤에게는 공허를 잊게 해주는, 종수에게는 현실 도피의 환상이었던 해미는 어디로 사라진걸까.
지는 노을 아래 해미가 옷을 벗고 춤을 추던 장면, 마치 그 장면을 위해 만들어진 것 같은 마일스 데이비스의 Generique. 그 슬프고도 아름다운 풍경이 잊히지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