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까짓 거”라고 말할 수 있게 되기까지

아이큐 46이 나와도 괜찮을 것 같아요

by 공재의방

그날 이후, 우리는 당분간 아무것도 측정하지 않기로 했다. 웩슬러 지능검사(WAIS-IV)는 무기한으로 미뤘고, 그 어느 상황에서도 결과는 따지지 않았다. 잘했는지 못했는지도 중요하지 않았다.


대신 그림을 그렸다. 상담 초기의 그림검사에서 이 아이는 유난히 섬세하고 세세한 표현을 고집했다. 잘 그리는 것이 중요했고, 대충 그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내가 버텨야 한다’ 내용으로 종이를 채웠고, ‘내가 잘해야 한다’는 문장들이 자주 등장했다.


사람 그림에서 여성은 자신이라고 했다. 표정은 비교적 밝았고, 조금은 자신감 있어 보인다고 했다. 남성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서른 즈음의 직장인이었다. 사는 게 재미없어 보이는 무표정한 얼굴. 한 손에는 커피, 다른 한 손에는 가방. 손이 가득 차 있어서 무언가를 더 할 수 있는 손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말을 덧붙였다. 누구를 생각하고 그린 건 아닌데, 아빠랑 조금 닮아 보인다고.


“근데 내 눈에는 남성과 여성의 표정이 똑같아 보이는데 왜 여성은 자신감 있어 보이고 남성은 재미없어 보이는 표정이야?”라고 물었더니, 답지 않게 흥분하며 말했다. 분명히 다르다고. ㅋ


동적 가족화에서는 가족의 중심에 엄마와 쌍둥이 여동생들이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자신은 오른쪽 아래 작은 구석, ‘방’이라는 경계 안에 따로 그려져 있었다. 몸은 안에 있었지만 밖의 상황을 살피는 위치였다. 아빠는 오른쪽 위, 또 다른 방 안에 있었다. 요즘 아빠는 “자랑할 자식이 없다”는 말을 자주 한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화 난다고도 했다.


소셜 아톰에서는 사람들이 모두 점만큼 작은 동그라미와 세모로 채워졌다. 자기 자신은 작지만 아주 새까맣게 칠했다. 마치 내가 누구인지 정체성을 찾기라도 하듯이. 가장 가까이에, 자신보다 조금 더 크게 남자친구가 있었다. 엄마, 아빠, 동생, 친구들은 모두 거리를 두고 배치되었다. 경계는 또렷했다.


몇 번의 회기를 그렇게 보냈다. 성격검사와 그림검사, 아이의 말과 침묵을 함께 놓고 보면서 이 아이에게는 ‘이해’보다 먼저 ‘안전’이 필요한 상태라는 것이 느껴졌다. 설명으로 자신을 증명하기보다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자기 자신을 먼저 느껴야 할 시간이라는 것도.


화면 캡처 2026-03-12 112239.jpg


그래서 우리는 아무 목적 없이 놀기 시작했다.

“슬라임 만들어 본 적 있어?”

“어, 저 어렸을 때 초등학교 때 엄청 많이 만들었어요. 하고 싶어요. 근데 진짜 여기서 해도 돼요?”

“안 될 게 뭐가 있어? 여기서는 다 해도 돼.”


나도 그 친구도 오랜만의 슬라임 놀이라 처음에는 감을 잃고 있었다. 손이 유난히 뜨거워서 슬라임은 자꾸 녹았고, 형태는 쉽게 무너졌다.


“헉, 어떡해요.”

아이는 자주 이 말을 했다.


그럴때마다 나는 이런 대답들을 했다.

“괜찮아. 이건 안 망쳐.”

“망치면 버리고 다시 하면 돼.”

“이까짓 거 좀 망가지면 어때.”


우리는 3주 연속 슬라임만 만들었다. 그 사이, 아이는 자주 소리내서 웃었다. 학교에서 있었던 이야기, 명절에 본가에 다녀온 이야기, 남자친구에 대한 사랑과 불만까지 말이 많아졌다. 남자친구 말고 그렇게 수다를 떠는 건 처음이라고 했다. 친구들과는 잘 지내지만 내 이야기를 꺼내기는 어렵다고 했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자주 들고, 굳이 말을 해야 하나 싶을 때도 많다고 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슬라임이 잘 안 나와도 아이가 먼저 말했다.

“에이, 아무것도 아니에요. 다시 하면 돼요.”


그 뒤로 빼빼로 데이에는 빼빼로를 만들고, 만다라를 그렸고, 크리스마스 장식을 만들었다. 계절과 그때그때의 이슈에 따라 8월 말부터 세 달 가까이 우리는 매주 만나 그냥 놀았다.


11월 셋째 주가 되었고, 나는 곧 퇴사를 앞두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제 이렇게 계속 놀 수는 없을 것 같다고. 검사도 더는 미루기 어렵다고. 다음 주가 아니면 검사를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마지막으로 물었다.


“검사, 할 수 있겠어? 이건 특별한 기회가 아니면 굳이 경험하기 어려운 검사고, 이제는 마무리가 필요한 시점인데 할 수 있으면 꼭 진행했으면 좋겠어.”

아이는 잠깐 놀란 얼굴로 말했다.

“헉… 그럼 우리 이제 못 놀아요?”

그러고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빠르게 받아들였다. ISTP(와 ISTJ 중간쯤?)답게. 깔끔하게 말했다.


“선생님, 괜찮아요. 그까짓 거… 검사 할 수 있어요.
저 아이큐 46 나와도 상관 없을 것 같아요.”


그 말은 자신을 낮추는 말이 아니었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그 과정은 자신이 아니까 괜찮다는 말이었다.

결과 하나로 자신을 설명하지 않겠다는 말처럼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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