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도 네 실력이다”라는 말을 듣고 자란 아이들
웩슬러 지능검사(WAIS-IV)를 처음 진행하던 날이었다. 아이는 시작부터 손을 떨고 있었다. 아주 미세했지만, 감추려 해도 감춰지지 않는 떨림이었다. 토막짜기를 진행했고, 공통성 과제에서 극과 극으로 보이는 단어 사이에서 공통점을 찾아가며 아이는 긴장과 함께 점점 더 크게 손을 떨기 시작했다.
“아… 제가 어휘력이 안 좋아서요.”
아이는 검사 내내 그런 말을 중얼거렸다.
숫자 따라 말하기 과제에 이르렀을 때 아이의 표정은 이미 멀리 가 있었다. ‘나는 누구고 여긴 어디인가’ 같은 얼굴이었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해내려 애쓰고 있었다. 더이상 진행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 흐름은 기능을 측정하는 시간이 아니라 아이의 긴장을 끝까지 견디게 만드는 시간이 되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멈췄다.
“이 상태로는 진행이 어려울 것 같아. 평가라기보다는 인지능력 검사이긴 하지만, 지금은 긴장이 너무 커서 제대로 된 기능을 보기 어려워.”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아직 다 풀지 못한 시험지를 갑자기 빼앗긴 학생 같은 표정이었다. 아직 보여주지 못한 답이 남아 있다는 얼굴.
그리고 말했다.
“긴장해서 점수가 낮게 나와도 결국 그것도 제 실력이잖아요.”
순간,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왜 이 아이는 자기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하는걸까?
“그렇게 손을 떨 정도로 잘하고 싶은데, 긴장 때문에 평소보다 네 기능이 낮게 측정되면 제일 속상한 건 너야. 떨려서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건 실력과는 달라 그런데 왜 그걸 네 실력이라고 말해?”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나는 말을 조금 더 이었다.
“처음 시작할 때 말한 것 처럼 이건 시험이나 테스트가 아니야. 결과에 따라 인생이 크게 달라지고 하는 것도 아닌데... 그럼에도 이렇게 떨리고 긴장되는 건 오늘 처음 생긴 건 아닐 거야. 지금처럼 긴장 높은 성향 때문에 정말 중요했고, 잘하고 싶었던 날에 성과가 덜 나왔던 날도 많았겠다”
그 말을 다 듣기도 전에 아이는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엉엉. 스스로도 당황한 얼굴로.
“아… 그건...진짜 시험때마다...수능때도... 내가 왜 이러지… 왜 이렇게까지 눈물이 나지?”
울다가 말을 하려다 멈추고, 다시 울다가 고개를 숙였다. 자기 반응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계속 울었다.
신입생때부터 보았던 아이는 평소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는 편이 아니었다. 조심스러웠고, 말수가 적었고, 겉으로 표현하기 보다는 늘 자기 안에서 정리하고 넘기는 쪽이었다. 그래서 그날의 울음은 스스로에게도 낯선 반응이었을 것이다. 더 많이 속상하고 힘들었던 순간에도 이렇게 무너진 적은 없었을지 모른다.
그 울음은 오늘의 검사 때문이 아니었다. 그동안 너무 많은 날들을 ‘내 실력이 그 정도였던 날’로 혼자서 정리해왔던 시간들이 한꺼번에 올라오는 순간 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까 네가 했던 말이 계속 마음에 걸려서. 긴장 때문에 시험을 망쳤을 때, 누가 너한테 그런 말을 한 적 있어? ‘그것도 네 실력이다’라고.”
아이는 잠시 생각하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그냥 자주 들었어요. 엄마한테도 듣고, 학원 선생님한테도요.”
그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이 아이가 왜 이렇게 쉽게 자기 편이 되기를 포기하는지. 그 문장은 아이 스스로 만들어낸 말이 아니었다. 결과만 중요했던 누군가에게 반복해서 들으며 자기 안으로 가져온 말이었다.
나는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너를 신입생 때부터 봤잖아. 프로그램이 열리면 제일 먼저 와서 신청하고, 말은 없는데 늘 빠지지 않고 끝까지 참여하고. 조용하지만 누구보다 성실하게 그림자처럼 활동하는 걸 봤어. 내 딸이 고2거든? 난 우리 딸이 대학에 가서 너 같은 학생이 되면 좋겠어.”
아이는 깜짝 놀란 얼굴로 말했다. (실제로 화들짝 놀래며 눈이 커졌었다.)
“정말요? 그런데 저는 그런 사람 아니에요. 저 잘하는 거 하나도 없어요.”
나는 웃으며 말했다.
“네가 스스로를 어떻게 보는지 모르겠고, 그냥 나는 그렇게 봤다고. 내가 보고, 내가 느끼기에 너는 그냥 지금 그대로 충분해. 그래서 내 딸에게 ‘니가 저 언니처럼 크면 좋겠다’고 말하고 싶을 만큼.”
그리고 물었다.
“만약 너처럼 긴장이 많은 딸이 있다면, 떨려서 시험을 망치고 돌아온 날 너는 그 아이에게 무슨 말을 해주고 싶어?”
아이는 한참 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딸이요…? 그런 생각은 한 번도 안 해봤어요.”
한참을 곰곰히 생각한 결과치고는 단순한 한 문장을 말했다.
“그냥… 고생했다고, 괜찮다고요.”
그리고 짧은 문장을 끝내기도 전에 다시 울기 시작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그 말을 너한테 해주면 돼. 준비하느라 고생했다고, 떨려서, 실력만큼 못 나와서 가장 속상한 건 누구보다 너니까 '나까지 나한테 화내지 말라'고.”
그날 멈춘 것은 검사만이 아니었다.
아이 안에서 오래 작동해오던 자기평가의 문장 하나도 함께 멈춰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