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까짓 거'라는 마음으로 살아가기를
웩슬러 지능검사(WAIS-IV)를 다시 진행하던 날이었다. 여전히 약간의 긴장은 있었지만 손을 덜덜 떨 정도는 아니었고, 중간중간 웃기도 했다. 이미 실시했던 소검사 중 토막짜기는 기존 결과를 반영했고, 재측정이 필요한 부분은 동일 과제를 반복할 경우 연습효과가 점수에 영향을 미칠 수 있어 보충 소검사로 대체해 진행했다.
지능검사의 목적은 ‘정확한 수치’가 아니라 ‘지금 이 아이의 기능 수준을 왜곡 없이 보는 것’이었다. 스스로 가지고 있는 가능성을 객관적으로 인식해보는 것이 이번 그날의 목표이었다.
검사 도중 아이는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짧게 대답했고, 필요한 말만 정확한 어휘로 표현했다. 추리 과제에서는 문제를 정교하게 풀어갔다. 단번에 밀어붙이기보다 조용히 구조를 잡고 접근하는 방식이었다. 수행 과정을 보며 이미 어느 정도의 결과를 예상이 되었다. 사실 몇 번이나 아이의 수행능력 수준에 소름이 돋기도 했다.
그럼에도 아이는 종종 말했다.
“맞나…?”
“아… 망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는
“아… 몰라!!!!!”
하고 대충 넘기기도 했는데 아리러니 하게도 ‘대충’의 수행이 매우 훌륭한 경우도 있었다.
속으로는 ‘아주 잘하고 있다’고 응원하면서도 나는 최대한 중립적인 표정을 유지했다.
“괜찮아.”
“천천히 해도 돼.”
검사를 마친 뒤 다음 회기까지 채점을 진행하고, 그동안 실시했던 성격검사와 그림검사까지 모두 종합해 해석하기로 한 뒤 아이를 보냈다. 채점을 마치고 결과 프로그램을 돌리던 순간, 어찌나 떨리던지 ㅡㅡ;;;
그리고 확인한 결과는 전체 지능지수 140.
단순히 ‘지능이 매우 높다’는 의미라기보다 이 아이가 기본적으로 얼마나 탄탄한 인지적 토대를 가지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수치였다. 범주로 보면 상위 1% 수준이었고, 개념을 이해하고 관계를 구조화하는 추상적 사고 영역에서 일관되게 높은 수행이 나타났다.
이 수치는 ‘똑똑한 아이임을 증명하는 숫자’라기보다 그동안 이 아이가 스스로를 얼마나 과소평가해왔는지를 눈으로 확인하게 해주는 지표라 더 반가웠다. 의외이거나 갑작스러운 반전이라기보다, 애초에 측정을 멈췄던 이유가 타당했음을 보여주는 결과였다. 능력이 부족해서 흔들린 것이 아니라, 능력을 쓰기도 전에 스스로를 긴장시키고 검열하는 데 이미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순간은 아이에게만 중요한 경험은 아니었다. 상담사로서의 나에게도 꽤 큰 안도였다. 놀이를 선택했던 시간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던 그 과정들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인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경험 하나로 아이의 삶이 드라마틱하게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불안은 다시 찾아올 것이고, 자신을 의심하는 순간도 수시로 올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오롯이 자신의 부족함으로 돌리는 일은 조금 덜 하지 않을까.
어떤 결과 앞에서도 자기 자신을 통째로 부정하지는 않게 되지 않을까.
“그까짓 거.”
앞으로 이 아이가 어떤 상황에서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불안이 이미 가지고 있는 능력을 막아버리지 않기를.
나는 이미 충분하고,
이것도 해낼 수 있을 거라는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