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래인 Jun 08. 2016

[시 익는 마을] 사과하지 않는 사과에 대하여

<정말 사과의 말> 김이듬

만지지 않았소

그저 당신을 바라보았을 뿐이오

마주볼 수밖에 없는 위치에 놓여 있었소

난 당신의 씨나 뿌리엔 관심 없었고 어디서 왔는지도 알고 싶지 않았소

말을 걸고 싶지도 않았소

우리가 태양과 천둥, 숲 사이로 불던 바람, 무지개나 이슬 얘기를 나눌 처지는 아니잖소


우리 사이엔 적당한 냉기가 유지되었소

문이 열리고 불현듯 주위가 환해지면 임종의 순간이 다가오는 것이오

사라질 때까지 우리에겐 신선도가 생명으로 직결되지만

묶고 분류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우리를 한 칸에 넣었을 것이요

실험해보려고 한 군데 밀어넣었는지도 모르오


당신은 시들었고 죽어가지만

내가 일부러 고통을 주려던 게 아니었기 때문에 난 죄책감을 느끼지 않소

내 생리가 그러하오

난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의 생기를 잃게 하오

내가 숨 쉴 때마다 당신은 무르익었고 급히 노화되었고 마침내 썩어버렸지만


지금도 내 몸에서 흘러나오는 호르몬을 억제할 수 없소

나는 자살할 수 있는 식물이 아니오

당신한테 다가갈 수도 떠날 수도 없었소

단지 관심을 끌고 싶었소

------------------------------------------------------------

이 시에서 화자는 사과입니다. 이 사과는 다른 과일과 함께 냉장고 안에 있지요. 사과는 다른 과일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냉장고 안이기에 사과와 과일 사이엔 적당한 냉기가 유지되고 있지만, 사과가 관심 없다는 데서 과일과의 사이는 또 다른 맥락의 냉기도 형성돼 있습니다. 냉장고 안이라는 사실은 2연 2행 '문이 열리고 불현듯 주위가 환해지면 임종의 순간이 다가오는 것'이라는 데서 알 수 있습니다. 신선도가 생명으로 직결되지만 하필 사과와 과일은 같은 공간에 들어가 있습니다.


사과에는 에틸렌가스가 나옵니다. 이 가스는 주변 과일들을 시들게 만듭니다. 때문에 같은 공간에 있는 다른 과일들은 시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죠.


하지만 사과는 뻔뻔합니다. 


"당신은 시들었고 죽어가지만 내가 일부러 고통을 주려던 게 아니었기 때문에 난 죄책감을 느끼지 않소"라고 말합니다.


마지막에 와서는 자살할 수 있는 식물도 아니고, 당신한테 다가갈 수도 떠나갈 수 없다고 말하며 "단지 관심을 끌고 싶었소"라고 고백합니다.


사과는 중의적 표현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당신에게 딱히 관심은 없지만 관심을 끌고 싶었고, 그 결과는 상대를 '시들고 썩게' 만들었습니다.

사과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사과는 역설적으로 사과하지 않습니다.


시인이 사과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사과받지 못하는 뻔뻔함을 겪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사과 해야 하는 상황에도 사과하지 않고 오로지 관심끄는 데만 집중하는 사람들이 요즘 세상에 너무 많다고 느껴집니다.


물론 나 자신부터 경계해야 하지 싶기도 하고요.

작가의 이전글 [시 익는 마을] 똑같지만 정반대…그래서 아프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