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만추의 Write with me (4)
마을 어귀에서 지도를 들고 서성이는 이방인처럼, 글쓰기의 초입에서 나는 늘 헤매곤 한다. 완성한 글이 이제 조금 쌓였으니 이 여행에 조금은 익숙해질 법도 한데, 매번 새롭고 또 매번 어렵다. 새로운 여행길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빈 종이를 하염없이 서성이는 것뿐이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수많은 선배 작가들이 사용했던 나침반을 나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어렵게 구한 나침반이 있으니 아마 조금 덜 헤맬 수 있겠지. 약간의 희망을 안고, 주머니에서 나침반을 꺼내 본다.
“흰 종이와 기승전결 나침반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어.”
이야기의 시작점인 ‘기’는 인물을 소개하는 자리라고 했다. 주인공은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주는 자리. 그리고 그 인물은 주제를 잘 드러낼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 이야기의 종착점인 ‘결’은 작가의 선택의 자리라고 했다. 작가의 주제를 전달하는 자리. 그러니까 작가가 어떤 주제를 전달하고 싶은지에 따라 이야기의 마지막 이미지가 정해지는 것이다.
처음과 끝이 있으면, 앞으로 떠나야 하는 여행길을 대략적으로나마 그려볼 수 있다. 그러니 우선, ‘기’에서 소개할 인물과 ‘결’에서 보여줄 마지막 선택을 고민해 보고자 한다. 본격적인 시작에 앞서, 지난주에 정리했던 주제를 다시 한번 꺼내 봐야겠다.
누군가를 알아간다는 건 닿고 싶지만 닿을 수 없는 세계로 향하는 것이다.
내가 앞으로 그릴 주인공은 누군가를 알아가려는 사람이다. 누구를 알아가고 싶을까? 왜 알아가려는 걸까? 처음 떠올린 건 죽은 이가 생전에 쓰던 작품을 이어 쓰려는 사람이었다. 왜 죽은 이가 미완성으로 남긴 작품을 완성시키고 싶은 걸까?
죽은 이와 죽은 이가 쓰던 작품을 너무 사랑해서
죽은 이가 그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지를 옆에서 지켜봐 왔기 때문에. (죽은 이는 그 작품을 무척 완성하고 싶어 했다.)
아니면 죽은 이가 직접 부탁을 했을 수도 있다. 내 뒤를 이어달라고.
혹은 둘이 같이 작품을 만들고 있었는데, 동료가 죽은 것이다. 혼자 남아 마무리를 해야 하는데 작품이 막힐 때마다 함께 작품의 방향을 고민하고 이야기 나눴던 예전 기억들이 떠오른다든지.
조금 더 새롭고 다양한 이유가 들어올 수 있지만, 우선은 지금까지의 과정을 정리해보면 주인공은 작가이자, 아련한 표정으로 “너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묻는 사람이다.
주인공이 작가라고 하니 또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게 되었다. 꼭 누군가의 작품을 이어 쓰는 인물일 필요는 없잖아? 작가인 주인공이 A라는 인물의 이야기를 작품으로 만들어야 한다면? 좋은 작품을 쓰기 위해 인터뷰도 하고 자료도 찾아 읽고, 함께 시간도 보내봤지만, A라는 인물의 이야기를 쓸 때마다 ‘내 글이 그 사람을 왜곡하는 건 아닐까?’라는 고민에 빠진다면? 쓰면 쓸수록 ‘내가 그 사람의 이야기를 망치고 있다’라는 생각이 든다면?
주인공이 작가일 경우, 내가 그리는 인물이 나와 가깝기 때문에 생생한 이야기를 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얼마 전 완성한 희곡의 주인공도 작가였기 때문에 이번에는 작가가 아닌 다른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싶었다. 작가가 아니다. 누군가를 알아가려고 해. 그런데 작가는 아니야. 작가가 아니면, 독자?
최근에 나는 새로운 ‘읽기 방식’에 대해 고민 중이다. 그동안은 ‘작가의 의도는 무엇이가?’에만 집중하여 작품을 감상해왔다. 하지만 최근 수강한 어떤 강의에서 ‘꼭 작가의 의도에 집중할 필요는 없다.’라는 말을 들었고 독자 개인의 시선으로 작품을 읽어 내려가는 방식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만약 독자가 과거의 나처럼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분투하는 인물이라면? 그 독자는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왜 분투하는 것일까?
작가의 팬이라서. 단 한 글자도 허투루 볼 수는 없다.
이 작가가, 가족이라서. 집에서의 모습과 너무 달라서. 집에서는 입을 열지 않아서. 그 속마음을 좀 알고 싶어서.
이 작가의 글을 번역해야 해서. 주인공은 번역가. 작가의 말을 왜곡 없이 고스란히 전달하고 싶은데 그게 참 어려워서. 게다가 예전에 번역 실수로 욕을 먹은 적이 있다면?
번역가는 글을 읽는 것뿐만 아니라, 원본을 다른 언어로 전달해야 한다는 점에서 함께 언급한 두 인물과 조금 차이가 있는 것 같다. 무언가를 읽는 것, 그리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 그사이에 틈이 벌어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 아닌가. 틈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틈을 메우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은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주인공이 번역가라면 어떤 언어를 번역해야 할까. 외국어를 하나 배워야 하나. 이러다가 10년 장기 프로젝트가 되는 건가. 그리고 주인공이 번역가라면, 원본을 보여줘야 할까? 그러니까 주인공이 번역하는 이야기를 극중극으로 보여줘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런데 극중극 형식은 이 전에 집필한 희곡에서 써버렸기 때문에 조금 피하고 싶은데…. 근데 나 왜 이렇게 자꾸 새로운 것에 집착하지? 아니야, 새로운 것에 집착하는 게 아니라 쉽게 쉽게 가려고 하는 걸 경계하는 게 아닐까? 쉽게 쉽게 가려고 하는 게 나쁜가? 그게 아니라 ㅁㅇ로밍ㄹ모이ᅟ갊맬ㅈ;ㄷ멜댦ㄴㅇ;ㄹㅁㅈ
(펑)
(너무 멀리 와 버림.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갈 것.)
주인공이 알아가려고 하는 누군가가 사람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동물을, 동물의 마음을 알고 싶을 수도 있지 않을까? 동물이 하는 말을 인간들에게 전하는 번역가일 수도 있고. 동물이 아니라 외계 생명체일 수도 있다. 아니면 물건일 수도 있다.
주인공이 고고학자인데 땅속에서 새롭게 발견한 물건이 과거 사람들이 사용하던 물건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대체 이 물건을 가지고 뭘 했는지 모르겠네. 고고학자의 추측과 실제 그 물건의 사용기가 대비되면서 이야기 하나가 펼쳐질 수도 있겠다. 다르면 다를수록 더욱 웃긴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아니면 맛의 비밀을 알아내려는 사람일 수도 있다.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B라는 요리를 똑같이 재현하려고 하는데 하면 할수록 맛이 없어진다면? 뭐가 뭔지 모르게 된다면? 주인공이 요리사가 아니라 요리에 젬병이고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일수록 더 재밌는 이야기가 될 것 같다.
아까 주머니에서 꺼낸 나침반이 뱅글뱅글 돌기 시작했다. 마음에 쏙 드는 인물이 없어, 여기로 갔다 저기로 갔다 이랬다 저랬다 왔다 갔다 했기 때문인 것 같다. 내 머리도 뱅글뱅글 돌 것 같다. 좋은 나침반이 내 손에 있지만, 나는 여전히 하얀 종이 위를 서성인다. 여러 인물을 꺼내 보았지만, 마음을 움직이는 딱 하나가 없어서 나는 시작점에서 빙빙 돌고만 있다.
언제까지 시작점에서만 빙빙 맴돌고 있을 수만은 없다. 뭐가 됐든 결정을 해야 한다. 숨을 한번 고르고 마음의 준비를 한다. 그래, 이걸로 결정해야겠다. 다행히도 이야기의 종착점은 지난 시간에 주제를 정리하며 어느 정도 그려졌다. 시작점인 인물까지 선택했으니, 이제 여행길에 오를 수 있다. 아니 근데 잠깐만, 나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안 될까? 이거 아닌 것 같애. 5분만, 아니 1분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