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더위를 참지 못하는 나에게, 봄은 그리 설레지도 반갑지도 않은 계절이었다.
살 속을 파고들던 찬바람이 어느새 따뜻하게 바뀌어 향긋한 꽃 내음과 함께 불어올 때면 차가워진 몸을 따뜻한 욕조에 담그듯이 나른하고 기분을 좋게 했지만, 꽃바람에 취하는 건 아주 잠깐일 뿐이었다.
‘이제 곧 더워지겠지.. 얼마나 더우려나..’
따스한 봄바람과 향긋한 꽃 내음에 취하기도 전에 오지도 않은 여름을 걱정하고 있는 나였다.
그래도 스무 살의 봄은 조금 새로웠다.
대학생이라는 것, 그리고 성인이 되었다는 뿌듯함과 설렘이 앞으로 다가올 여름에 대한 두려움마저 잊게 해 주었다.
교복에 걸고 다니던 학생증 대신 은행의 신용카드에 새겨진 학생증으로 나의 신분을 증명하며, 술집에 들어가서도 당당하게 신분증을 꺼내 보일 수 있는 성인이 된다는 건 왠지 모르게 어깨가 으쓱 해지는 일이었다.
불과 몇 년 후 나이가 조금 더 들고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그때의 으쓱 거림이 얼마나 부질없고 우스운 일이었는지를 깨닫고 고개를 저었지만, 2002년의 봄은 다가올 여름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설렘이 가득했던 봄이었다.
하지만, 처음 느껴본 봄날의 설렘은 얼마 못가 여름날의 폭염보다 더 숨 막히는 암흑으로 바뀌어 버렸다.
부모님의 통제와 사회적 제약이 따르는 미성년자에서 이제 막 성인이 된 대학 새내기들의 관심사는 온통 이성친구 혹은, 당당히 신분증을 내보이며 술 마시기가 전부인 듯했다.
미팅 약속을 잡거나 같은 과 동기들 혹은 선배들 중에 괜찮은 사람이 있는지 알아가는 것으로 대학 1학년의 첫 학기를 보낼 작정을 한 것 같은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이상한 아이’였다.
동기들은 물론 선배들도 말을 걸기 어려워할 만큼 무뚝뚝하게 앉아 있고, 미팅을 나가자는 친구들을 이상하게 쳐다보며 거절하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
나는 그런 친구들을 똑같이 이상한 눈으로 바라봤다.
‘대체 왜 이성친구를 못 만들어 안달이야. 남자가 밥 먹여 주는 것도 아닌데 그럴 시간에 잠이나 잘 것이지. 한심하다, 진짜..’
고등학교 때부터 나는 스스로 보수적인 사람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미성년자일 때는 이성 친구는 만나면 안 되고, 스무 살이 넘어 성인이 된다 해도 함부로 아무나 만나거나 스킨십을 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면 나이가 들어가는 만큼 자연스레 이성에 대한 관심이 생기고 만나게 될 테니 서두르지 않고 나이에 맞게 천천히 가는 것일 뿐, 나는 이상한 게 아니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믿었다.
그리고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은 틀린 것이며 잘못된 것이라고 단정 지었다. 심지어 한심하게 생각했다.
매일같이 소개팅 약속을 잡는 친구나 잘 생기고 인기 많은 남자에게 접근하기 위해 술의 힘을 빌어서라도 엉겨 붙던 친구를 경멸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마치 장기간의 미팅을 하듯 입학 후 한 달 가까이는 남자나 여자나 서로를 탐색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런 친구들을 마치 내가 뭐라도 되는 사람인 것 마냥 깔보며 한심해했다.
심지어, 입학 후 처음 같은 학번 동기들끼리 모인 술자리에서 술이 잔뜩 취해 몸을 가누지도 못하는 친구를 끝까지 본인이 바래다주겠다고 우기며 나에게 성질까지 냈던 동기 남자 친구는 그날부터 나에게 벌레만도 못한 존재가 되었다.
그 남자 동기 역시 술이 들어간 덕분에 용기를 내어 며칠간 마음에 두었던 친구에게 접근할 기회를 만든 건데, 친구가 술에 취한 자신을 남자가 부축해 주길 바라지 않을 거라는 지극히 주관적인 착각에 빠져 내가 챙기겠다고 나섰고 본인의 계획이 틀어질까 두려웠던 남자는 내게 성질을 내며 친구를 낚아채듯 끌고 나갔다.
말수도 적고 점잖은 남자인 척하던 동기가 원하는 여자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날아가 버릴까 봐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과 눈빛으로 나에게 성질을 내던 순간, 젠틀맨이었던 그 남자는 나에겐 그저 발정 난 수컷 동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 더러운 동물 따위는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내 마음과 눈빛을 읽은 건지, 다음날 내 눈치만 보며 몇 번이고 무슨 말을 건네려다 말고 지나가던 남자 동기와 결국 졸업할 때까지 두 번 이상 대화를 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온통 머릿속에 이성친구 만날 생각만 하는 것 같은 친구들을 한심해하며 고고하고 순결한 척 착각에 빠져 20대 초반의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너는 왜 남자한테 관심이 없어?”
“남자를 싫어하는 건 아니지?”
가끔씩 친구들이 내게 던지는 말이었다.
그런 질문을 받고 생각을 하다 보면 나도 남자에게 아주 관심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같은 과에 있던 잘생긴 오빠를 혼자 좋아하기도 했었고, 중학교 때는 유명 가수의 사진을 방에 붙여 두기도 했었다.
하지만 남자를 만나고 교제를 하는 건 안 되는 일이었다.
왜 인지는 모르겠지만 해서는 안 되는 일인 것 같다는 생각에 스스로를 억압했고, 솔직하게는 남자와의 대화나 스킨십이 불편하고 두려웠다.
나는 그게 여중, 여고를 졸업해 남자와의 만남이 익숙하지 않은 스무 살 여자의 당연한 모습이라고만 생각했다.
나의 이런 모습이 그렇게 이상한 걸까? 내가 특이한 건가?라는 질문을 몇 번 스스로 던져 보기도 했지만 언제나 내 생각이 맞는 거라고 단정 짓고는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았다.
그런 내가 다시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며 조금은 다르다는 것을 스스로 인지하게 된 건, 봄이라 하기엔 조금은 더워진 어느 날이었던 것 같다.
점심을 먹고 친구와 학교 운동장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입학한 지 두세 달 만에 생겨난 같은 과 CC커플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역시나 나는 그들에 대해 한심하다는 듯이 말을 했고, 친구는 웃으며 내게 물었다.
“너는 왜 그렇게 남자를 싫어해?”
“나 남자 싫어하는 거 아닌데?”
“그럼 뭐 커플이 싫은 거야? 솔로천국, 커플지옥 뭐 이런 마음이냐?”
“아니, 난 그런 거 상관없어. 그냥 남자고 여자고 이성친구 못 만들어 안달 난 것 같이 보이는 게 싫은 거야. 인생의 목표가 남자 만나기 혹은 여자 만나기 인 것 같잖아. 뭐야 그게..”
“그럼 뭐 어때. 우리 나이에나 그러지 언제 또 그렇게 열정적으로 사랑을 찾아 헤매겠냐. 이제 성인도 됐겠다 스무 살인 우리한테는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거지 뭘 그래. 너도 괜찮은 남자 찾아서 연애해봐.”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
이성에 대한 당연한 관심.
스무 살의 우리들에겐 자연스러운 것.
문득 친구의 그 말이 그날따라 새삼 다르게 느껴졌다.
생각해보면, 마냥 좋아할 필요는 없지만 싫어할 이유도 없었다.
사람들의 말처럼 이성에 대한 관심은 어쩌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해서는 안될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나는 왜 꼭 범죄라도 저지르는 것처럼 반응하고, 이성관계에 대해 그리고 남자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는 걸까?
정말 나는 왜 다른 사람들과 다른 생각과 시선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친구와 헤어진 뒤에 집에 돌아오는 지하철에 서서 혼자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내가 이상한가, 나는 왜 다를까, 남자라는 존재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고민했다.
나는 왜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그 마음이 없을까?
남자?
남자를 좋아한다?
남자를 만난다?
정말 나는 왜 그렇게 남자에 대해 경계하는 마음이 드는 걸까?
나는 왜, 언제부터 이성에 대한 인식이 이렇게 자리를 잡은 걸까?
나는 왜..?
대체 왜..?
왜...
왜...
왜…?!!
!!!
번개가 치듯 머릿속과 눈앞이 캄캄해졌다가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그날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목에 뭐라도 걸린 듯 숨이 턱 막혔다.
왜 기억하지 못했을까?
왜 그날의 일을 한 번도 떠올리지 못했던 걸까?
생각하지 못한 걸까 아니면, 안 했던 걸까?
스스로에게 물었다.
‘네가 겪은 일이잖아.’
‘네 기억 이잖아. 근데 왜 생각을 못했어?’
‘왜 이제야 생각이 난 거야? 바보야? 멍청이야?’
숨이 멎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숨을 쉬어야 하는데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숨이 막혀 쓰러지지 않는 걸 봐서는 어느 틈으로든 호흡이 새어 나가고 있기는 한 것 같았다.
그런데 어지러웠다.
입고 있던 옷조차 더럽게 느껴져 갈기갈기 찢어 버렸던 그날의 일이 바로 어제 겪었던 일인 것처럼 너무도 선명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날부터, 난 매일 죽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