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영원히 그 기억이 묻혀 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치료가 끝나 가면서 약간의 심리적 여유가 생긴 것을 알아버린 것일까?
4년 넘게 복용하던 약물 치료도 끝나고 체력도 어느 정도 좋아지기 시작해 이제야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며 남들이 하는 것 다 해보자며 한껏 들떠있던 스무 살의 어느 봄날에, 내 머릿속의 기억 하나가 기어이 문을 열고 나와 버렸다.
이번에는 내 머릿속과 마음을 무너뜨린 그 기억 하나가 나를 다시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하기 싫은 무기력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거기에 이제는 분노심까지 더해졌다.
찾아갈까? 죽여 버릴까? 내가 죽을까?
그 사람이 나에게 저지른 일에 대한 분노.
그동안 그날의 일을 멍청하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나 자신에 대한 분노.
온몸에 불이 붙은 것처럼 뜨거워졌고 머리는 깨질 것 같았다.
8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갑자기 어제 겪은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이 떠올랐고 그때의 감정, 절망, 분노가 내 몸을 뒤덮기 시작했다.
나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기억을 잃었던 8년의 시간은 마치 다시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그날의 일이 바로 어제 겪은 것처럼 생생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뭘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불이 꺼진 채로 방바닥에 붙어 숨죽여 울던 12살의 그날처럼, 다시 한번 미친 듯이 울며 머리를 움켜 잡았다.
그 사람을 죽여 버리고 싶은 분노가 더 큰 것인지 내가 죽어 버리고 싶은 절망이 더 큰 것인지 스스로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이 아득하고 멍해졌다.
그렇게 몇 날 며칠을 멍하니 지내다가 문득 정신이 들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누군가 나를 이상하게 생각해 내가 겪었던 일을 알게 되기라도 한다면 큰일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 것이었다.
내가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이상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인데, 그냥 불안했다.
가족은 물론 친구들이나 내 주변 사람들이 알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더 아무렇지 않게,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지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나 스스로를 억누르기 시작했다.
아무 일도 없는 사람처럼, 상처 같은 건 받아본 적 없는 사람인 것처럼 그렇게 보이고 싶었다.
하지만 무엇이든 억지로 자연스러워 보이기 위한 노력은 더더욱 부자연스러운 모습만을 보여줄 뿐이었다.
아무 일 없는 듯 남들과 비슷하고 평범한 사람인척 하기 위해, 그리고 더 이상 상처를 받거나 누군가 나에게 깊게 들어오는 것을 막아내기 위해 마치 공격을 받은 고슴도치처럼 온몸으로 가시를 돋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은 오히려 자연스럽지 못하고 평범한 모습도 아닐뿐더러 누군가에게는 버릇없어 보이고, 누군가에게는 차갑고 또 누군가에게는 냉소적이며 무뚝뚝한 사람으로 보일 뿐이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내 겉모습에 대해 판단하고 비판하는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그저 어느 날 갑자기 떠오른 지저분하고 더러운 그날의 그 기억과 그날의 일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그렇게 별일 없었다는 듯이 아무 일 없는 척 지내며 겨우 학교를 마치고 직장 생활도 시작했다.
하루하루를 버티는 듯한 느낌으로 지내면서도 일을 하고 가족과 함께 지내고 친구들을 만나 웃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선명해지는 기억과 그로 인한 분노와 절망감은 벼랑 끝에 한 발로 서있는 듯한 느낌이 들게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엄마에 대한 마음이 이해가 되면서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던 12살의 그날에는 엄마의 한마디 위로가 모든 것을 덮어주는 것 같았고 그런 엄마를 믿었기에 별일 아닌 일로 치부해 버렸는데, 성인이 된 내가 보기에는 그렇게 지나칠 일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전히 그 사람과 가까운 이웃으로 지내는 엄마의 모습 때문에 혼란스러워 지기까지 했다.
일을 크게 벌려봐야 결국에 손가락질받고 상처 받게 되는 건 나뿐이라 생각해서 조용히 지나가는 것일까?
아니면, 그날의 일이 엄마에게는 별일 아닌 일인 걸까?
그래도 내가 울면서 어렵게 얘기했던 건데, 그래서 엄마가 나쁜 사람이라고 말해주고 나를 달래 줬었는데 그게 정말 별거 아닌 걸까?
혼란스러웠다.
그런 엄마가 이해가 되면서도 이해할 수 없었고 그럴수록 나는 더 숨이 막히고 아득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대로 있다가는 나도 나 자신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일단 떠나야겠다고 생각해 버렸다.
그게 어디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