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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mare Sep 25. 2021

3-1. 죽이고 싶었다. 그리고, 죽고 싶었다.

엄마의 품에서 위로를 받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그리고 엄마의 말처럼 내 잘못이 아니고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일 뿐이었다.

나에게 세상 전부인 엄마가 한 말이니까 엄마의 말이 무조건 맞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그날 이후로 내가 봤던 것들, 내가 느꼈던 것들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그 할아버지는 어쨌든 ‘나쁜 사람’으로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날 이후로 벌레를 보는 것처럼 바라볼 뿐이었다.

당연히 인사나 대화를 나누는 일도 없었다.

할머니뿐만 아니라 주말마다 들리는 아들 부부도 우리 집에 들러 인사하고 밥을 같이 먹을 정도로 왕래가 잦은 집이었지만, 그날 이후로 나는 단 한 번도 그 할아버지에게 인사는커녕 눈길 조차 주지 않았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할머니나 아들 부부는 나를 버릇없고 예의 없는 아이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그저 그 사람에게 맞는 대우를 해주는 것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조금씩 지나면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할아버지는 분명 나쁜 사람인데 엄마는 여전히 친한 이웃 사람으로 할아버지를 대하고 있었다.

언니가 3개월 만에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온 뒤, 엄마는 예전처럼 아빠와 함께 가게를 운영하며 오고 가는 사람들과 반갑게 인사하고 안부를 나누며 지냈다.

그 할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엄마는 마치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이 이전과 같은 모습과 태도로 그 사람을 대했다.

그런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처음엔 의아했다가 나중에는 수긍해 버렸다.

‘그래, 엄마가 이 정도로 아무렇지 않게 행동할 만큼 별일이 아닌 거야. 엄만데, 우리 엄만데, 엄마가 이렇게 행동할 때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내 엄만데, 내가 제일 사랑하고 나를 사랑해 주는 엄만데, 엄마만 믿으면 돼. 엄마처럼 지내보자. ‘

나도 모르게 스스로 그렇게 합리화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는 아무 일이 없었다고 생각하고 지내기로 했다.

그 사람에 대한 분노만 남긴 채 그날의 기억은 내 가슴 깊은 곳 어느 한구석에 밀어 넣고 아무 일이 없는 채로 살아가기로 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내 앞에 놓인 현실들은 지난 시간의 기억을 기억하고 싶어도 기억할 수 없는 상황이 연속으로 이어졌다.


언니가 퇴원은 했지만 학교 수업일수를 채우기 위해 몸 상태에 비해 조금은 빨라진 퇴원이었기에 여전히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

기억은 완전히 돌아오지 못했고, 몸의 상처 역시 완벽하게 회복되기에는 시간이 필요했기에 신경 정신과 약물과 더불어 상처 치유를 위한 약까지 복용을 하며 몸도 마음도 지쳐 있었다.

무엇보다 잃었던 기억을 찾아 갈수록 기억을 잃고 있었던 시간의 기억은 또 사라져 갔고, 그런 혼란과 아픔을 겪으며 언니는 극도로 예민해져 있었다.

사고가 아니더라도 한참 사춘기로 예민할 시기였던 언니에게 사고의 후유증은 더 힘든 상태를 만들어 주었고, 그걸 지켜보는 가족들 역시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그런 언니의 예민함이 도와준 것이라 해야 할까..

며칠 동안 나와 같은 방에서 잠을 자던 언니가 신경질적으로 엄마에게 짜증을 내며 말했다.

“아! 밤에 기침 소리 때문에 잘 수가 없어! 나 혼자 잘 거야!”

엄마는 그 말을 듣고 처음 몇 번은 언니의 예민함이 만들어낸 과장된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며칠간 똑같은 말을 하며 신경질 적인 모습이 심해지자 하루 정도는 편하게 자라고 하며 나를 안방으로 불렀다.

하지만, 안방에서 자고 일어난 다음날 나는 곧바로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야 했다.

엄마 말로는 내가 자는 동안 쉴세 없이 마른기침을 해댔고, 목에서는 쇳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고 했다.

다행히 부모님 가게에 자주 오시던 단골손님의 도움으로 대형 병원에 어렵게 예약을 잡아 곧바로 검사를 받을 수 있었다.

검사 결과는 알레르기성 천식이었다.

진단을 내리며 바로 그날부터 복용해야 할 약이 처방되었고, 항상 가지고 다녀야 할 호흡기 확장제에 대한 처방과 사용법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덧붙여진 말은, 천식이라는 질병은 한번 진단이 내려지면 앞으로 질병의 증상을 얼마나 호전을 시킬 수 있냐 하는 것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는 것이지 ‘완치라고 판단을 할 수 없는 병’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앞으로 가파른 계단이나 언덕 오르기, 등산, 빨리 달리기 등 호흡기를 자극하는 행위는 절대 하면 안 되고 정신적으로도 순간적인 강한 쇼크를 받는 것 역시 호흡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했다.

집에 인형이 있다면 모조리 치우고 동물과의 접촉 역시 절대 하면 안 되는 일이라고 했다.

그렇게 중학교 2학년이 되던 해에 천식 진단을 받고,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나는 체육 시간에 단 한 번도 뛰어보지 못한 채 학교 생활을 해야 했다.

처음 진단을 받은 병원에서 약을 처방받아 복용을 했고 약을 복용한 지 일주일이 체 지나지 않았을 때부터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온몸이 붓기 시작했고 온몸의 수분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극도의 건조함이 시작되었다.

특히 두피는 건조하다 못해 갈라져 피가 흐를 정도였는데 그 와중에 두피 전체를 덮은 것 같은 각질은 하얗게 비듬처럼 떨어지기 시작했다.

남색의 교복 재킷을 입고 다녀야 했던 나에게 끔찍할 정도의 부작용이었다.

거기에 약을 복용하면서부터는 수시로 졸리고 몽롱한 상태가 이어졌다.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가끔은 수면제나 마취약을 먹은 것처럼 꾸벅꾸벅 졸거나 몽롱해져서 선생님에게 혼나기 일쑤였다.

하지만 병의 증상을 더 악화시키지 않으려면 매일같이 약을 먹어야 했고 조금만 숨이 차면 가방에서 기도 확장제를 꺼내 입에 물어야 했다.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도 버거웠고 쉬는 시간에 바쁘게 매점을 뛰어갔다 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격하지 않은 움직임에도 기도가 좁아져 숨을 쉬기가 힘들었고, 증상이 나타나는 강도는 나 조차도 알 수가 없어 늘 긴장 상태로 확장제를 쥐고 다녀야 했다.

그러던 중 치료를 시작하고 한 달여 정도가 지났을 때 미국에 요청한 약물이 도착했다.

당시에는 호흡기 질환의 약품은 거의 대부분 수입을 해야 했으며, 경구약 외에 질환의 근본적인 치료와 증상 완화를 위해 주사로 투약하는 약품의 경우 대량 수입 방식이 아니라 주치의가 진단서 및 소견서 같은 내용을 작성해 미국으로 보내면서 약품을 신청하면 그 환자에 해당하는 약품을 건건이 직접 보내주는 형태였다.

그렇게 신청한 약이 도착하면 보호자가 직접 수령해야 하기 때문에, 엄마는 한 달이 지나서야 약품이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고 지정된 장소에 약을 받기 위해 찾아갔다.

약품은 한국으로 들어오면서 다시 한번 검수를 거치고 약품 사용에 대한 주의사항 및 안전관리 내용 등은 한국어로 표기되어 밀봉되어 있었다.

미국에서 받은 약품은 80만 원 정도의 비용이 들어갔고 신청 후 한 달의 시간을 기다려 받은 약이었지만, 약과 함께 받은 주의사항을 읽고 난 후 엄마는 그 자리에서 약을 모조리 버리고 돌아왔다.

약품 주의 사항에 ‘약물 투여 시 의사 및 간호사 등 응급상황 처치가 가능한 전문가 1인 이상 있어야 하며 산소 호흡기가 준비된 상태에서 투약한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부작용이나 위험 상황에 대한 문구들이 더 있었기 때문에 엄마는 더더욱 그 약을 손에서 놓아 버릴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엄마가 그 설명서를 읽는 동안 들었던 생각은 ‘이런 약을 먹다가 잘못되거나 안 먹어서 잘못되거나 결과는 비슷할 것 같다’라는 것이었다.

지금에서야 엄마는 그때의 그 행동이 스스로 생각해도 무모했던 것 같다고 웃으며 말하지만, 그때로 다시 돌아가도 선택은 비슷했을 것 같다고 말한다.

덕분에 나는 그런 약이 있었는지도 모른 채 시간이 훌쩍 지나 성인이 되어서야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엄마의 무모함인지 용기인지 모를 그 행동이 어쩌면 내가 살길을 찾기 위함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게 천식 진단을 받고 수시로 병원을 들락 거려야 했던 나와 퇴원해서 통원 치료를 받는 언니를 따라다니기에도 바쁜 엄마에게 또 하나의 아픔이 찾아왔다.

초등학생이던 남동생이 침샘 한쪽이 막히는 희귀병에 걸리게 된 것이었다.

동생이 어느 날인가부터 말하는 게 마치 사탕을 물고 얘기하는 것처럼 어눌해지고 턱 아래로 혹처럼 무언가가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병원에 가니 아직 병명조차 없는 희귀병으로 치료 방법도 없는 질환이었다.

양쪽 턱 아래에 있는 침샘은 계속해서 침을 만들어 내고 있는데 한쪽에서 침을 밖으로 분출하는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어 턱 안에서 침이 고여있는 상황이었다.

침이 나오는 길을 레이저를 이용해 뚫어 보기도 하고 주사기를 이용해 인위적으로 침을 빼내기도 했지만 근본적인 치료는 할 수가 없었다. 아니, 방법이 없었다.

주사기를 이용해 인위적으로 침을 빼내지 않으면 3~4일만 지나도 턱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마치 터질 것 같은 정도가 되었다.

치료는 하지 못하고 일주일에 서너 번씩 병원에 가서 침을 빼내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동생이 검진을 받은 대학병원에서는 동생의 질환을 치료 및 연구하기 위해, 산부인과나 안과처럼 전혀 연관이 없는 학과를 제외하고는 모든 학과의 교수진들이 모여 회의까지 했었다고 했다.

하지만 끝내 원인을 밝혀내지 못했고 구강 학과에서 수시로 침을 빼내고 검진을 받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언니와 나의 병원 치료에 이어 동생까지 세명이 동시에 병원을 다니며 검사와 치료를 받고 약을 받아먹는 상황이 이어지게 되었다.

그렇게 매일 같이 세명의 아이를 번갈아 가며 병원을 오가기 바빴던 어느 날, 문득 동네에 있던 한의원 간판이 유난히 엄마의 눈에 들어왔다.

지하철역 바로 앞에 있던 한의원이라 정말 매일 같이 지나던 곳인데 그날은 왜인지 그곳에 들어가 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 동생의 손을 잡고 한의원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동생의 상황을 설명하고 진료를 보는데 한의사 선생님도 역시나 해당 질병의 원인이나 치료법은 모르겠다는 대답을 했다.

하지만, 동생에게 장이 좋지 않은 것 같고 치료가 필요한 수준인 것 같으니 그 부분에 대한 치료는 반드시 하셔야 한다고 했고 또 다른 병이 찾아올까 두려웠던 엄마는 그분을 믿고 치료를 시작하게 됐다.

한의사 선생님의 조언대로 장을 강화시키는 치료를 진행했는데 신기하게도 침샘이 막히던 질병 역시 점차 증상이 완화되기 시작했다.

동생이 다니던 대학 병원에서도 신기해했고 다시 한번 검사를 진행했는데, 침샘 기능이 거의 정상적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진단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 역시나 동생의 치료를 위해 한의원을 방문했는데 안내 데스크에 붙어있던 ‘천식 질환 치료 전문’이라는 문구가 엄마의 눈에 들어왔다.

엄마의 말로는 그동안 그렇게 그 한의원을 다니면서도 안보였던 문구가 동생이 조금씩 차도를 보이기 시작하니 마음의 여유가 생긴 것인지 갑자기 눈에 들어왔던 것 같다고 했다.

그 안내문을 보고 직원에게 물어보니 원장님 본인이 천식 치료를 위해 공부하고 연구하느라 한의학을 전공했고, 천식 치료를 위한 약재를 개발한 것이라고 했다.

그날로 나 역시 한의원에 가서 진료를 받고 약을 복용하기 시작했다.

효과적인 측면에서는 양약을 복용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만 매일매일 눈에 띄게 나타나는 부작용 때문에 엄마는 도전 아닌 도전을 해보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미국에서 온 약품을 버린 채 경구약만 복용하기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났을 무렵의 일이었다.


그날부터 나는 하루 세 번 한약을 먹어야 했고 느리지만 천천히 갈 수밖에 없다는 말을 믿고 치료를 시작했다.

다행히 한의학 치료의 부작용은 나타나지 않았고 증상은 천천히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손에는 기도 확장제를 들고 다녀야 했고 혹시 모를 상황 때문에 진단을 받은 대학 병원에서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기도 했다.

그렇게 치료를 시작한 날로부터 꼬박 4년 반 동안 하루 세 번 한약을 복용을 했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내 가방에는 늘 한약 한 봉지와 기도 확장제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나는 정기적으로 진단서 및 소견서를 발급받아 학교에 제출해야 했고 체육 시간에는 간단한 체조 외에는 그 어떤 활동도 하지 못한 채 앉아 있어야 했다.

힘든 운동을 할 때면 친구들은 앉아만 있는 나를 부러워했다.

체력장이 있는 날은 말할 것도 없었다.


‘너 진짜 부럽다. 나도 뛰기 싫은데..’

‘너 진단서 나도 빌려주면 안 되냐? 아니면 너 맨날 먹는 그 약이라도 빌려줘라~’

‘어디가 아프다고 하면 안 뛸 수 있는 거야?’


물론 친구들은 그저 단순히 힘든 운동을 안 해도 되는 내가 부러운 것뿐이었다.

나를 놀리거나 면박을 주기 위한 악의적인 질문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마음껏 뛰어노는 친구들이 부러웠고, 친구들과 달리기 경주를 하며 숨이 턱 막힐 것 같이 힘든 상황을 단 한 번이라도 경험해 보고 싶었다.

내가 만약 그렇게 뛴다면 가방에 있는 기도 확장제조차 무용지물이 되고 당장 병원에 실려가서 산소 호흡기를 꽂아야 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나는 체육시간 운동은 물론, 쉬는 시간 10분 안에 매점에 뛰어가 과자와 음료수를 잔뜩 사들고 오는 일조차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다른 친구들과는 다른 상황 그리고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이 많아지면서 나는 그저 조용히 있는 듯 없는 듯 살아가길 바라며 지내기 시작했다.

단순히 체육 시간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친구들의 시선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 괜한 짓을 했다가 친구들 앞에서 기도 확장제를 꺼내 무는 일까지 보이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점심시간에 교실에서 한약을 꺼내 먹어야 하고 가끔은 그 약이 가방에서 터져 온 교실에 쓰디쓴 약 냄새를 풍기기도 하는 나였는데, 그 이상의 시선과 관심은 원치 않았다.

이미 중학교 때부터 학교가 끝난 후 학원을 가는 친구들을 뒤로하고 병원으로 가야 했던 나였기에,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지내길 바랬고 친구들과도 그 정도의 적당한 관계를 유지하며 학창 시절을 보냈다.

그렇게 학창 시절 4년 반 동안 하루도 빼먹지 않고 약을 먹으며 보낸 내가 바라는 것은 단 1년을 살아도 약 안 먹고 남들처럼 건강하게 뛰어다니며 하고 싶은 거 마음껏 하면서 사는 것이었다.

아프지 않기 위해 오랜 시간 약을 먹고 치료를 받고 나니 병은 나아지기 시작했는데, 삶에 대한 의지는 점점 사라져 가는 기분이었다.

지금에서야 나의 학창 시절을 돌이켜 보면 나는 마치 어디 동굴이 있다면 들어가 살기를 바라는 사람처럼 무기력하고 무감각한 삶을 살았던 것 같다.

그러면서 내 머릿속의 기억은 점점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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