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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mare Sep 29. 2021

4-1. 현실도피

언젠가 우연히 들어봤던 워킹홀리데이를 가겠다고 결심했다.

영어를 잘 못하는 것도, 낯선 외국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도 나에게 문제가 될 일이 아니었다.

그저 내가 사는 이 집을 벗어나고 싶었다. 이 동네를 벗어나고 싶었다. 이 나라를 벗어나고 싶었다.

지금 당장 그래야만 했다.

문 앞에 나가면 언제든지 죽이고 싶은 그 사람을 마주칠 수 있는 이 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같은 하늘 아래 있다는 것이 죽을 만큼 싫었다.

그런 생각이 들고 결심을 하자마자 바로 실행에 옮겼다.

부모님에게는 알리지도 않은 체 각종 정보를 찾아보고 필요한 서류를 준비하기 시작했고, 우선 여권을 신청한 상태에서 엄마에게 말을 했다.

지금이야 해외여행이 흔한 일이 되어 너도나도 떠난다고 하지만, 당시만 해도 큰언니가 결혼해서 신혼여행을 가는 것 말고는 외국여행이라는 것을 본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엄마에게 1년간 외국에 나가서 살겠다고 하는 것은 적잖은 충격과도 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엄마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가서 어떻게 생활을 할지, 무슨 일을 할 것인지, 도와주는 사람이 있기는 한 건지 등에 대해 궁금해했지만 나에게는 그 어떤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 대답만 반복하다가 엄마의 입에서 ‘조금 더 생각을 해보자.’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허락한다.’는 뜻으로 내 마음대로 해석해 버렸다.

그리고 그날부터 본격적인 준비를 시작했다.

여권을 발급받고 비자 신청을 하고, 비자 승인을 위해 필요한 신체검사까지 진행했다.

그렇게 3주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무렵, 엄마가 나에게 조심스레 아직도 생각이 변함없냐고 물었다.

나는 이미 비자 신청을 했고 며칠 후면 승인 여부가 결정 날 것이고, 승인이 되는대로 비행기 티켓을 구매해 호주에 갈 것이라고 했다.

생각할 시간을 갖자고 했던 그 사이에 이미 일을 진행해 버린 나에게 엄마는 뭐라고 말도 못 하고 어이없고 당황한 듯한 기색만 내비칠 뿐이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엄마의 마음이 눈에 보였지만, 엄마에게 설명을 할 생각도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나는 이미 이곳을 떠나, 죽이고 싶은 사람을 마주치지 않으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엄마의 한숨이 조금씩 깊어질 무렵 비자는 승인되었고, 다니던 회사를 정리하고 출국을 하기까지 약 3개월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호주로 출발하던 날, 공항까지 혼자서 가겠다는 나에게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한 표정으로 같이 가겠다는 엄마를 차마 더 이상 말리지는 못했다.

TV에서 처럼 출국장 앞에서 ‘나 이제 갈게. 잘 지내.’, ‘조심히 가. 몸조심해.’ 등등의 인사말을 나누며 포옹하고 헤어지는 그런 모습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냥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그저 그게 다였는데, 누군가 배웅을 한다면 꼭 그런 과정이 생길 것 같았고 그게 싫었다.

수속을 마치고 출국장으로 걸어가면서 까지 그 고민만 했다. 나는 그냥 홀가분하게 떠나고 싶은데 엄마가 있으니 뭐라도 해야 하는 걸까, 뭐라고 해야 할까.

그러다 결국엔 뒤돌아 서서 ‘이제 그만 가세요. 저 가볼게요.’라는 말만 남기고 홀연히 뒤돌아 들어가 버렸다.

내가 있던 자리가 너무 싫어 도망치는 사람에게 이런저런 말들은 그저 사치이고 불필요할 뿐이라는 생각이었다.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야 들었지만, 엄마는 그날 그렇게 단 한 번의 인사로 뒤도 없이 들어가 버린 나를 보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그날의 내 행동이 후회로 남지만, 그때의 나는 정말 아무런 미련도 아쉬움도 없이 돌아서고 싶은 마음이 앞서기만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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