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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mare Oct 12. 2021

5. 지독한 현실 그리고 결심

호주에서의 생활에 적응을 하고 새롭게 만나는 친구들에게 많은 것을 배우면서 지내다 보니 어느새 3개월의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어학원 수업이 끝나고 나니 이제는 금전적인 부분이 걱정이었다.

졸업 후 1년 남짓한 시간 동안 모았던 돈을 몽땅 들고 왔지만, 비자 준비부터 비행기 티켓과 어학원 등록까지 했기에 그리 여유 있는 돈은 아니었다.

그래도 어차피 3개월간 어학원을 마치면 바로 일을 시작해서 돈을 벌면 되니까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나의 큰 착각이었다.

3개월의 어학 공부로는 그저 현지인 앞에서 긴장하지 않고 인사말을 건넬 수 있는 정도의 수준밖에 안 되는 외국인에게 줄 수 있는 일자리는 많지 않았다.

여기저기 수소문하며 일자리에 대해 알아보던 중, 어학원 친구들과 워킹홀리데이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한국에서부터 만남을 가졌던 몇몇 지인들로부터 농장에 가서 일을 하면 돈을 많이 벌 수도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농작물 수확 시기만 잘 맞으면 도시에서 일을 하는 것보다는 몇 배 이상의 돈을 벌 수도 있고, 시골 생활이기 때문에 돈을 쓸 곳은 별로 없어 돈을 모으기에도 좋다는 것이었다.

상세한 정보를 알아볼 생각도 없이 일을 해야 한다는 마음만 앞세워 정말 당장 일주일 뒤에는 생활할 돈이 없을 정도의 상황에서 지인과 함께 무작정 농장에 들어갔다.

하지만 농작물이라는 게 사람의 마음처럼 원할 때 언제든 수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시기가 잘 맞아야 했고 수확을 시작한다 해도 돈이 되는 일자리를 구하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농장 주변의 호스텔에는 일자리를 기다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넘쳐났고, 일자리가 언제 누구에게 들어올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이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있다는 것은 가능성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마음에 먼저 있던 사람들에게 상황을 물어봤지만, 그들은 그냥 여행한다 생각하고 있다가 일자리가 생기면 좋고 아니면 조금 더 지내다가 다른 지역으로 옮겨갈 계획이라고 했다. 

그저 각국에서 모여든 사람들을 만나고 놀면서 밤마다 파티를 하는 것이 재미있어 즐기고 있는 것뿐이었다. 

당장 일주일 뒤에는 기본 생활을 할 수조차 없을 만큼 여유 자금이 없던 나에게 여유로운 파티는 사치일 뿐이었고, 언제 시작할지도 모르는 농작물 수확과 일자리를 기다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농장에 들어 간지 이틀 만에 다시 브리즈번으로 돌아왔다.

브리즈번 근교의 농장에 들어갔었기 때문에 다시 브리즈번으로 돌아왔지만, 아무래도 도시가 작은 만큼 일자리도 적은 곳이었다. 

반면 브리즈번과 달리 호주의 최대 규모 도시로 꼽히는 시드니에서는 비교적 일자리를 구하기가 수월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시드니로 이동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한 푼이 아쉬운 상황에서 비행기로 3시간가량 이동해야 하는 시드니로 가는 비용조차 아까웠다.

빚을 내서라도 일단 가야 하는 건가 하는 고민을 하고 있는데 마침 본인의 차로 시드니까지 데려다주겠다는 사람이 나타났다.

한국에서 정보를 얻기 위해 가입했던 인터넷 카페의 회원이자, 나와 같은 집에 살았던 언니 와도 친분이 있던 사람이었다.

물론 한국에서는 마주친 적이 없고 나중에서야 같은 인터넷 카페에 가입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내가 알고 지내던 주변 사람들과 겹치는 인연이었기에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 그리고 나와 같이 살던 언니, 운전을 해준 오빠의 지인까지 네 명이 함께 시드니로 이동을 했다.

차로는 13시간을 달려야 했기에 하룻밤을 꼬박 새워 시드니에 도착을 할 수 있었다.

그나마 시드니에는 한국에서부터 인연을 쌓았던 언니, 오빠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의지할 곳이 있다는 것이 심적으로 조금 더 안정적인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각자 개인의 목표와 목적을 이루기 위해 떠나온 것이기에 그 사람들에게 마냥 기대어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일을 해서 자리를 잡아야 했지만, 시드니에서도 일자리를 잡는 것은 쉽지 않았다.

브리즈번에서부터 같이 왔던 언니도 일자리를 찾지 못해 걱정을 하고 있을 무렵, 시드니까지 차를 태워준 오빠에게서 연락이 왔다.

일자리를 구했냐고 묻더니 아직이라는 말에 언니와 같이 좀 만나자고 했다. 

더 이상 신세를 지면 안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내심 '설마 일자리도 알아봐 주는 건가' 하는 기대감이 들면서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교차했다. 그러면서 어떻게든 일을 해서 돈을 벌어 갚으면 될 거라는 합리화를 했다. 

수수한 외모만큼이나 푸근하게 웃으며 우리를 맞아주던 오빠는 우리가 뭐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일자리 하나 있는데 해보겠냐는 말을 던졌다.

이렇게 까지 신세를 져도 되는 건가 싶으면서도 한줄기 빛처럼 느껴지는 오빠의 말에 감격스럽기까지 한 마음이 들었다.

언니 역시 한껏 상기되고 들뜬 마음으로 “오빠 정말 고마워. 일자리까지 알아봐 줘서. 우리가 돈 벌면 꼭 두배로 갚을게. 진짜 고마워. 근데, 무슨 일이야?”라고 물으며 눈을 반짝였다.

그런 우리에게 너무도 별일 아니라는 듯이 던지는 말에 우리는 순간 굳어 버렸다.

“노래방 도우미 하는 건데, 사람 구한데. 해볼래? 한국인 노래방이야.” 

언니의 반짝이던 눈은 독기를 품은 눈으로 순식간에 돌변했고, 나는 당황했다가 잠시 ‘도우미? 내가 아는 그런 도우미? 아니면 여기서는 직원을 도우미라고 부르나?’하는 멍청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오빠의 표정과 말투가 너무 아무렇지 않게 일상적인 대화를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둘 다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데 그 정적마저 깨버리는 한마디가 들려왔다.

“왜? 별로야? 너네가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 때야?” 

그마저도 너무 아무렇지 않게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그 사람을 보면서 나는 또 멍하니 ‘아.. 지금 내 처지가 그 정도구나.. 이런 거라도 해서 빚을 갚아야 하는 처지인 거구나..’하는 바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멍하니 앉아 있는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언니가 내 손을 잡아채며 그 오빠에게 말했다.

“오빠, 여기까지 데려다 준거 정말 고마워. 근데 오늘 얘기는 못 들은 걸로 할게. 한국으로 돌아가면 돌아갔지 우리는 그런 일 절대 안 해. 여기까지 데려다준 차비를 받아야겠으면 말해. 빚을 내서라도 줄테니까. 그런 거 아니면 다시 볼일 없었으면 좋겠어.”

쉬지도 않고 그 오빠에게 퍼붓고는 여전히 멍하니 앉아 있던 나를 끌고 돌아 나왔다.

언니의 손에 끌려 나오면서도 ‘이게 무슨 일이지..’ 싶은 생각에 아무 말도 못 하던 내 옆에서 언니는 온갖 욕을 다 내뱉으며 화를 내고 있었다.

한참을 씩씩 거리는 언니 옆에서 멍하니 있다가 어느 순간에 문득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화가 났다. 

내가 여기 왜 왔는데.

내가 왜 집을 떠나, 가족과 친구들을 떠나 이곳에 와서 이렇게 고생을 하는 건데..

남자 옆에 붙어 웃음을 팔고 몸을 팔아 돈을 버는 일을 하라고?

하.. 

헛웃음이 나왔다. 

마치 나란 사람에 대해 이미 알고 일부러 놀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쉬지 않고 씩씩거리며 욕을 해대는 언니와 다르게 나는 어이가 없어 욕도 안 나왔다. 

그리고 사람은 겉모습으로는 알 수 없다는, 고리타분하다고만 생각했던 어른들의 말을 뼛속 깊이 새기고 있었다. 

언니와 나는 그날부터 더더욱 눈에 불을 켜고 일자리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했던 나지만 일자리를 알고 있다는 사람에게 물어 물어 소개를 부탁했고, 시드니에 도착한 지 일주일 만에 시작했던 야간 청소 일을 정리하고 호텔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역시 청소를 하는 일이었지만 호텔이라는 특성상 근무 환경이 나쁘지 않았고, 현지인이 관리하는 업체에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급여도 상당히 높았다. 

언어 수준이 부족한 것에 비하면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영어를 잘 못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이나 마트 등에서 일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시급이 현지인 기본 시급의 절반 수준인 곳이 대부분이었다.

그마저도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나는 운이 좋게 현지인이 받는 시급을 그대로 받으면서 일을 했기 때문에 돈을 더 많이 모을 수 있었다.

내가 계획했던 한 달여간의 여행도 가능할 것 같다는 희망이 생기기 시작했고, 그렇게 낯선 외국에서의 생활도 내 마음도 조금씩 안정이 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문득, 주변 환경만 바꾸었을 뿐인데 나를 괴롭히던 기억들로부터 벗어난 듯한 느낌이 들자 아예 호주에 정착을 해볼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하지만 어디에서나 그렇듯 낯선 이방인에 대해 모두가 호의적인 것은 아니었다.

매일 같이 마주치며 같이 일을 하고 앞에서는 웃으며 인사 하지만 그 웃음 뒤에 무시와 가끔은 경멸 섞인 표정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길거리에서, 마트에서, 버스에서, 지하철에서, 관광지에서 너무 티 나게 따가운 눈초리를 보내는 사람들이 가끔 한 번씩 지나쳐 갔다.

단순히 시선을 보내는 인종차별 정도야 외국인으로서 당연히 겪을 수밖에 없는 문제라고 치부하고 넘기기는 했지만 그래도 사람이기에 그 시선이 쉽게 잊히거나 상처가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정도의 문제들도 잊을만하면 어쩌다 한 번씩 경험하는 일들이기에 그저 ‘그럴 수도 있는 일’로 치부하며 넘길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냥 그런 일로 넘기기 어려운 일이 생겨 버렸다.

어느 휴일에 지인들과 시드니 근교에 나갔다가 달걀을 맞은 것이다.

한적한 거리를 걷고 있는데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지나던 자동차에서 젊은 남자 몇 명이 우리 일행들에게 뭐라고 알 수 없는 소리를 지르며 신나게 웃으며 지나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우리 옆으로 지나가면서 여전히 알 수 없는 소리를 질러댔다.

‘왜 여길 다시 지나가지?’ 하는 말을 끝내기도 전에 달걀 세 개가 날아들었다.

다행히 다른 사람들은 몸에 직접 맞지는 않았고 나만 다리 아래쪽에 살짝 맞으면서 깨지는 바람에 입고 있던 옷에 모두 튀어 버렸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달걀이 깨지는 순간, 걷던 모습 그대로 몸이 굳어 버렸고 바닥과 내 바지에 깨져서 흘러내리고 있는 달걀을 보는 순간에는 인간으로서의 환멸과 비참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소리’ 라고는 했지만, 사실 그들이 떠들어대던 말은 굳이 알아듣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해도 알 수 있는 말이었다.

외국인이었던 우리를 향해 비난하고 조롱하는 말이었고 그걸로도 부족해 굳이 계란을 들고 와 던지기까지 하며 이해하지 못한 그 말들을 끝까지 확인시키고 이해시켜 줬다. 

그들과 내가 다른 건 그저 피부색일 뿐인데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길에서 달걀을 맞아야 하는 이유가 그뿐이라는 사실이 허무하고 인간으로서 모멸감을 느끼게 했다. 

외국에서의 생활을 조금씩 적응하며 나름 그곳에서의 행복감도 찾아가고 있었지만, 하필이면 한국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이 조금씩 그리워지기 시작할 무렵 겪게 된 그 일은 다시 내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만들었다.

사실 그 조차도 지나면 별 것 아닌 일로, 어느 날의 가벼운 해프닝으로 넘길 수도 있었지만 외로움과 그리움 그리고 불안함의 감정들이 조금씩 엉키기 시작할 무렵 벌어진 그 일은 내가 다시 돌아갈 이유를 만들어 줬다. 

그렇게 처음 계획대로 1년의 생활을 마무리하고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결심과 함께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처음 걱정과 달리 낯선 곳에서 혼자 지내야 한다는 두려움이 조금씩 없어지고 적응을 하며 지냈다는 사실에 스스로에 대한 뿌듯함과 자신감이 생긴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 마음이라면 어디에서든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고 어린 시절의 기억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내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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