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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mare Oct 16. 2021

6-1. 죽기 위한 시간들

약 1년여간의 호주 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호기롭게 떠났던 호주에서의 생활은 내 생각만큼 녹록지 않았다. 물론,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났고 좋은 경험과 즐거운 일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낯선 땅에 나 홀로 남겨진 기분은 호주에서 지내는 동안 내내 나를 떠나지 않았고 결정적인 몇 가지 사건들은 결국 나를 한국으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피부색으로 차별받지 않아도 되는 내 나라,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나를 도와줄 내 가족과 친구들이 있는 곳. 원래 내 자리.

그래. 한국이라는 이 나라, 내 가족이 있는 이 땅이 내가 있어야 할 곳이었다.

벌레 같은 사람 때문에 내가 피할 이유가 없었다. 더 이상 별것도 아닌 기억 따위는 나를 힘들게 하지 못할 거라는 확신과 그런 것쯤은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나를 채워주는 것만 같았다.

그 덕분인지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는 문득, 설렘마저 느껴졌다.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 어떤 상처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넘쳐났다.

그렇게 설렘과 자신감을 가득 안고 한국으로, 내가 살던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나는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더 큰 절망감을 느껴야만 했다.


낯선 곳에서의 1년은 꽤 긴 시간이었지만, 많은 것들을 변화시키기에 1년은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다.

내가 돌아온 자리에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별것 아닌 일이고, 그 기억에서 벗어나 당당하게 자신감 있게 살 수 있을 거라 다짐했던 나의 마음은 낯선 현실에 치여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었다.

내가 살던 집, 내 기억이 머물던 공간 모두 그대로였고 심지어 벌레 같은 인간조차 그대로였다.

모든 것들을 지워내고 잊기 위해 떠났고, 낯선 곳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며 버티고 돌아왔지만 그 모든 시간과 나의 노력은 아무 의미 없는 일이라는 듯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아무 일 없이 잘 먹고 잘살고 있던 그 사람.

문득 떠오른 어린 시절의 기억을 그대로 보여주는 집과 우리 동네.

모든 것이 그대로였고 그저, 나만 잠시 떠났다 돌아온 것뿐이었다.

그 사실이 나를 절망감에 빠뜨리게 했다.

호주를 떠나오면서 다짐하고 설레었던 그 마음들이 무색하게, 겨우 한 두 달 만에 나의 결심은 무너졌고 내 마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모든 것은 너무 변함이 없이 그대로였다.

나 혼자 괴로워했다가, 힘들어하며 떠났다가, 이제 괜찮아질 거야 다짐을 했다가.. 그렇게 혼자 발버둥을 치는 느낌이었다.

이제는 그 사람을 마주하면 죽여 버리고 싶다는 극단적인 감정까지 차오르고 있었다.

그 와중에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내가 한국으로 돌아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지역 재개발로 인해 이사를 가야 했던 것이었다.

꽤 먼 지역으로 이사를 하기로 결정이 나고, 다시 한번 기대를 했다.

‘호주에서 보냈던 것처럼 내 기억이 머물고 있는 그곳을 떠나 죽이고 싶은 그 사람을 보지 않고 살게 된다면 다시 또 자신감도 생기고 괜찮아지지 않을까?’

‘영원히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면 지난 1년 동안 그래 왔듯이 별일 없었다는 듯이 잘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들로 이사한 뒤의 생활을 기대했지만, 막상 외국에서 처럼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고 그 마음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아마도 단순히 현실을 외면한다고 해서 괜찮아지지 않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에 더 그랬던 것 같다. 오히려 이제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어떻게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나를 더 끝까지 몰고 가는 기분이었다.

그러다 문득, 바보처럼 어리기만 했던 12살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바보같이 아무 말 못 하고 숨죽여 울기만 하던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생각과 함께 그 사람을 찾아가 죽여 버리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 뒤로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웃으며 지나던 그 사람을 찾아가 내 앞에 미소 짓던 얼굴에 주먹을 날려 버리든 목을 조여 버리든 뭐라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렇게 분노에 차 있던 어느 날, 무작정 버스를 타고 어릴 때 살던 그 동네를 찾아갔다.

그 사람도 이사를 해서 정확한 위치는 알지 못해도 이전부터 그 동네를 벗어나지 않으며 살았던 것을 알고 있기에 예전에 살던 집 근처부터 돌아다니다 보면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무작정 찾아 나섰다.

그런데, 버스가 예전에 살던 동네에 진입하자마자 가슴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내가 어릴 때 살았던 곳은 지역 전체가 재개발이 되면서 신도시가 들어섰고, 우리 가족 역시 그 이유로 이사를 했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새로운 건물 한 두 개가 들어선 정도가 아니라 아예 도로 자체가 전부 변경되고, 말 그대로 새로운 도시가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에 내 기억 속의 동네는 아예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예전에 살던 곳 주변을 서성인다고 해서 그 사람을 우연히 만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해도 될 만큼 모든 것이 변해 있었다. 아니, 그냥 다른 곳이었다.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온몸을 감싸는 분노와 감정만 앞세워 그곳까지 한달음에 찾아간 내가 얼마나 멍청하고 한심한지 스스로 비참할 정도였다.

나는 이제야 어제 일어난 일처럼 그 기억이 생생해졌는데, 현실은 너무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깨달으며 한동안 기억을 잃었다는 것보다 더 큰 상실감이 찾아왔다.

그 사람을 어떻게 찾아내야 할까, 어떻게 죽여야 할까.

몇 날 며칠을 그 생각만 하며 지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사람의 이름 석자는 알고 있었고, 그의 손주 이름도 알고 있으니 어떻게든 찾으려면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찾아낼 방법을 고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 사람을 찾아낼 고민만 하다가 어느 날 문득, 그 후에 일어날 일들에 대한 생각이 이어졌다.

지금의 내 마음과 분노는 그 사람을 죽이고 싶다는 것, 죽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도 죽어 버리면 그만이라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고 나면? 남은 가족들은?

내가 겪는 이 고통과 아픔은 오로지 내 일이었다.

아무리 나에게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일 지라도 감정에 쫓겨 그 사람을 죽이는 것은 그냥 ‘살인’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닌 것이다.

사회 속에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 누군가를 해한다면 나 역시 그에 맞는 처벌을 받게 되어있다.

그 사람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 부분은 사실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 내 생각대로 그 사람을 죽이거나 해친다면 내 가족들은 살인자의 가족 혹은 범죄자의 가족이 되는 것이다.

그 사람을 죽이고 나 역시 죽어 버리면 그만 이라지만 부모님, 언니들, 동생은 앞으로 살인자의 가족으로 살아야 한다.

죽어가던 딸을 움켜잡고 어떻게든 살려 보겠다고 발버둥 치며 수개월간 간호를 하던 엄마.

죽어가던 딸과 그 곁을 지키는 엄마 때문에 홀로 세 아이를 돌보며 엄마 몫의 장사까지 혼자 도맡아 하던 아빠.

맏딸이라는 이유로 엄마의 빈자리를 채우고,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돈을 벌기 위해 나섰던 큰언니.

사고로 몸도 마음도 너무나 큰 상처와 아픔을 겪었던 작은 언니.

어린 나이에 누나의 사고와 치료 때문에 엄마의 부재를 겪으면서도 아무 말 없이 순하게 잘 자라 주나 싶었는데 이름도 모를 희귀병으로 말도 못 할 고생을 했던 남동생.

그런 가족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겨줄 것이 ‘살인자의 가족’이라면 어떻게 될까?

가슴에 치미는 분노를 느끼고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도 눈앞에 가족들을 보면 그러면 안된다는 생각에 감정을 억눌렀다.

이미 힘들 대로 힘든 시간을 보낸 가족들인데 그런 상처까지 안겨주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그럴 수는 없었다.

그런데 너무도 죽이고 싶었다. 죽여 버려야 했다.

12살의 어린아이를 보며 성적 충동을 느끼고는 스스로 제어하지 못해 쓰레기 같은 짓을 하는 인간을 그대로 두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죽이고 싶다는 생각과 죽고 싶다는 생각을 끊임없이 반복하며 극단적으로 치닫는 생각을 하면서도 무언가 핑계를 찾아가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던 나 자신을 보며 그렇게 용기 있는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그런 모습에 화가 나기 시작했고 결국엔 그냥 나만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과 결심이 들었다. 내 마음속에 있는 감정들은 앞으로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고, 삶에 대한 의지도 미련도 거의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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