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인이 되어 커리어를 쌓아가는 동안 나를 오래 괴롭혀 온 생각이 있었다.
“내가 이 정도에 머물려고 그렇게 공부한 걸까?”
이 생각의 뿌리는 학벌주의적 사고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그 학벌주의의 혜택을 받은 축에 속했다. 혜택을 받기 위해 오랜 시간 노력했는데, 오히려 그 노력이 나를 건강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왜였을까. 내 삶의 주도권을 온전히 내가 쥐기 위해, 이 질문을 끝까지 따라가 볼 필요가 있었다.
학창 시절 나는 정해진 루트를 착실히 따르는 전형적인 모범생이었다. 성실함은 내가 가진 가장 큰 무기였고, 덕분에 목표하던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부모님은 기뻐하셨고 나도 모교에 대한 애정이 컸다. 겉보기엔 모두 해피엔딩처럼 보였지만, 오랜 시간에 걸쳐 내 안에 한 가지 문제가 깊게 스며들고 있었다. 그건 출신 학교의 사회적 서열에 따라 개인의 가치를 매기는 학벌주의적 사고방식과, 세트처럼 따라오는 보상심리였다.
“수능만 잘 보면”, “대학만 잘 가면” 인생이 잘 풀릴 거라는 식의, 모든 생각과 의심을 수능 이후로 미뤄두게 한 마법의 문장들. 나는 그 말들을 믿고 싶었다. 돌이켜보면 선생님 말씀을 잘 듣는 아이일수록 그 ‘진리’를 비판 없이 받아들이기 쉬운 구조였다. 나 또한 12년 동안 사회가 요구한 길을 충실히 걸으며 그런 류의 사고방식을 자연스럽게 흡수했고, 내 안에서는 공부에 대한 보상심리가 조용히 자라났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해서 이 학교에 입학했는데’. 그에 걸맞은 사회적 성취와 지위, 인정을 얻어야 한다는 생각은 은은하게 그러나 끈질기게 나를 따라다녔다. 그렇지 못한 나는 마치 큰 투자에 실패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부모님 기대에 못 미치는, 동기들보다 폼나지 않는 직장은 마음 속 자격지심과 자괴감을 만들었다. 사실은 그 누구도 나를 그렇게 평가하지 않았는데도. 철저히 나 혼자 만들어낸 지옥이었다.
8화에 썼던 교육을 통해 나의 욕망과 타인의 욕망, 세상의 본질과 비본질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을 태어나서 처음 배웠다. 내 생각, 내 결정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정말 온전히 내 것이 맞았을까. 적당히 모른 척하고 대충 회피하며 살려던 것들을 하나하나 정면으로 마주하게 됐다.
왜 좋은 대학에 가려고 했을까?
왜 대기업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일은 왜 해야 하는 걸까?
나는 한 번도 진짜 중요한 것에 ‘왜’라는 질문을 던져본 적이 없었다.
나 자신과 끝없이 ‘왜’를 주고받는 일은, 나의 모든 껍질을 벗겨내고 깊숙이 묻혀 있던 알맹이를 만나는 경험이었다.
성인이 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경험에서 스스로 깨달은 것들도 있었다.
공부 잘하는 사람이 꼭 일을 잘하는 건 아니라는 것.
학벌로 사람을 판단하고 줄 세우는 게 얼마나 속물적이고 오만한 생각인지도.
하지만 내 도덕관념은 그 사실을 알고 있어도 마음 깊이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데는 뜻밖의 난관이 있었다. 학벌주의적 관점을 버리려 하니, 학창 시절 내내 쏟았던 내 노력과 성취를 부정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를 지탱해 오던 한 기둥을 스스로 부숴야 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학력으로 사람을 재단하는 사회가 되어서는 안 되지만, 동시에 내가 쌓아온 노력과 성취가 합당한 인정을 받기를 바란다. 이 두 생각이 모순처럼 느껴졌고 그 사이에서 나는 위선적인 사람 같아 부끄러웠다. 그게 괴로워서 내가 공부해 온 시간들과 졸업장에서 다른 건강한 가치를 찾고자 책도 읽고, AI와 상담도 하며 오랫동안 생각을 정리했다.
하버드대학교 심리학 교수 하워드 가드너는 음악 지능, 논리 수학 지능, 신체운동 지능, 대인관계 지능 등 사람의 지능을 세분화해 여덟 가지로 나누었다. (...) 그의 이론에 의하면 너희는 누구나 자기 나름대로, 자신이 잘하는 분야에서는 똑똑하다. 그렇기에 학교가 인지적 지능만을 중시하는 것은 학생들에게 몹쓸 짓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학교는 그런 편협함에서 벗어나야 한다. 현실에서는 인지적 지능만이 아니라, 삶에서 마주하는 역경과 기회에 대처하는 실질적 능력이 더 필요하다. 이런 능력도 지능이라 칭한다면, 우리 교육 제도에서 이런 부분을 더 폭넓게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 찰스 핸디『삶이 던지는 질문은 언제나 같다』 p.112
여러 각도에서 질문을 던지고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지만, 찰스 핸디의 책이 결정적인 전환점을 만들어주었다. 내가 불편하게 느껴왔던 사고방식의 왜곡된 뿌리를 정확히 짚어주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능력은 결코 하나의 기준으로만 측정될 수 없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는 여전히 인지적 지능(을 상징하는 학력) 하나로 사람을 줄 세우고 평가하려는 경향이 강하다.(한국의 입시제도가 인지적 지능을 제대로 평가하는가는 또 다른 문제다) 그 결과 공부는 더 나은 보상을 얻기 위한 경쟁 수단이 되었고, 그 안에 담겨야 할 본질적인 의미와 목적, 기쁨 같은 것들은 흐릿해졌다. 그때는 몰랐지만 나 역시 그런 공부를 했고 결국 그게 나를 옭아맨 학벌주의 사고와 보상심리의 토대가 되었다.
생각 끝에 나는 내 노력과 성취를 인정받고 싶은 마음을 부정하지 않기로 했다. 성실하게 노력해 성과를 만들어 본 경험과 집중력, 끈기, 인내심 같은 시간을 들여야 체득할 수 있는 감각들은 분명 귀중한 내 자산이다. 동시에 학벌이 사람을 평가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되어선 안 된다는 생각도 공고해졌다. 두 생각이 충돌한다기보다 서로 다른 층위의 이야기라는 걸 받아들였다. 나의 노력을 인정하되 그게 꼭 나나 타인을 평가하는 도구가 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비로소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여전히 타인과 나를 비교하는 순간이 오겠지만, 그 생각에 무력하게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 중심이 생긴 느낌이다.
사회적 인식과는 별개로 그 안에서 살아가는 나의 태도는 선택의 문제다. 나를 괴롭히던 굴레의 실체가 드러나고,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는 선택권이 나에게 있다는 걸 알게 되자 비로소 해방감이 느껴졌다. 이제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 외적인 것에 끌려다니기보다 나만의 내적 기준과 가치를 쫓는 삶을 살고 싶다. 공허한 간판보다 내 심지를 단단히 키워가는 감각이 더 탐이 난다. 그 감각이야말로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삶이 아니라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삶으로 나를 이끌어줄 것이라고 믿는다.
(+)
이 글을 쓰며 가장 많이 들었던 감정은 부끄러움이었다. 공개가 망설여져 처음으로 연재 요일을 어길 만큼.
학벌에 대한 감정은 내가 오랫동안 수치심을 느껴온 주제였다. 굳이 이런 날 것의 이야기를 꺼낼 필요가 있을까? 이미 모두가 넘어선 주제인 건 아닐까? 나 혼자 구시대적인 감정에 갇혀 있던 건 아닐까? 별의별 창피한 마음이 들었다.
혹여나 이 글에 누군가 상처받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다.
그럼에도 이 글을 발행하기로 했다. 누군가를 평가하거나 폄하하려고 쓴 글이 아니라, 더 나은 시선과 태도를 갖고 살아가고 싶다는 바람을 담아서 썼기 때문이다. 발행과 동시에 내 마음에서도 이 주제를 조금 더 후련하게 놓아줄 수 있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