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번도 더 상상했던 나의 찬란한 백수생활 2

웰컴 투 리얼 월드!

by 아리당스

솔직히 진짜 다 가능할 것이라 믿었다. 무슨 자신감인지 모르겠지만 회사 다닐 때의 열정을 나의 삶에 쏟는다면 이 정도 계획쯤은 거뜬하게 소화할 것이라 생각했다.


아마도 많은 직장인들이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이렇게 힘들게 회사생활 할 거면 차라리 내 일 하는 게 낫지, 이 에너지를 아껴서 나한테 썼다면 나는 이미 뭔가 하나는 이루고도 남았겠다.' (직장인 허언시리즈와 결을 같이한다)


글쎄, 회사 밖은 위험하다고 했던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온실 속 화초 생활을 10년 가까이 한 나로서는 솔직히 퇴사 후 마주한 리얼 월드에서 꽤나 자주 당황했고 또, 좌절했다. 회사 밖은 위험한 게 (내 기준 어쨌든) 맞았다.


그럼 뭐가 그렇게 쉽지 않았냐고 묻는다면, 일단 아래 3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첫 번째, 마주하는 사람들의 다양성.

두 번째, 뒤늦게 알게 된 9 to 6 강제성의 힘.

세 번째, 모든 건 다 나로부터 시작한다.




먼저 첫 번째부터 얘기해 보자. 사람들의 다양성을 제일 먼저 언급한 이유는 가장 컨트롤하기 힘든 부분이면서 가장 당혹스러운 상황이 많이 연출되었던 부분이기 때문이다.


한 회사에서 오랫동안 근무를 했던 나는 임직원들에게 매우 익숙해져 있던 상황이었다. 직원들 대부분과 안면이 있었고 그렇지 않더라도 적어도 어느 부서에 있으면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겠다 정도는 대략 추측할 수 있었다. 심지어 아이들 어린이집 마저 직장 어린이집이었던 지라 그곳에서 만나는 부모들도 회사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른 유형의 사람들을 만나고 싶으면 내가 직접 커뮤니티를 '선택해서' 참여를 했었기에 이 또한 나를 당혹시킬 일은 별로 없었다. 지금에서야 퇴사 전 나의 주변환경을 보면 약간은 소름이 돋는다. 이렇게 사람이 우물 안 개구리가 되는 구나 싶달까.


그럼 퇴사 후에는 어떤가? 일단 아이들 어린이집이 동네 유치원으로 환경이 바뀌어서 다양한 직업군의 가정들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낮에 엄마 아빠가 같이 아이를 픽업하러 오는 집에 제일 신기하다ㅎㅎ). 대낮에 춤 클래스에 가면 직장인이 아닌 분들을 만날 수 있는데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꽤나 흥미로웠다. 그동안 시간이 없어 매번 배달시켰던 장보기도 오프라인에서 하기 시작했더니 집 주변 시장분들도 새롭게 만나게 되었다. 3시 이후에는 아파트 단지 안에 정말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직장 근처 카페와 다르게 집 주변 카페에서는 커피 한잔을 시켜도 정성을 다해 느긋하게 커피를 내려주시는 사장님이 계셨다(처음엔 이 속도에 적응하느라 답답해서 꽤 힘들었다). 새롭게 마주하게 된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과의 만남은 예측불가의 연속이었기에 새롭고 재밌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대화도 매끄럽지 않았고 가끔은 매우 불편했다.


사람의 성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이 부분이 굉장히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대화를 한다는 것이, 이토록 목적 없고 맥락 없는 대화를 하게 된다는 것이, 왜 저런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원하는 것을 얻어내야 한다는 것이 (지금은 많이 적응했지만) 처음에는 낯설어서 많은 에너지를 소비했다.




두 번째는 시간관리에 대한 얘기이다. 회사를 다닐 때는 제발 9 to 6의 삶 만이라도 꼭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일 년 내내 같은 시간에 회사 사무실에 앉아있으면 내 인생이 같은 시간에 늘 동일한 장소에 앉아있는 것으로만 만들어질 것 같아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퇴사 후 온전한 자유시간을 내 품에 안고서야 깨달았다. 회사가 정해놓은 그 시간이 있었기에 그나마 일을 했고 그 대가로 밥벌이를 했다는 사실을. '나'라는 인간은 매우 게으르고 또 게으른 편이라 강제성이 사라지고 나니 하루 종일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밥만 먹으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점점 더 원초적 욕구에 집중하는 삶을 살게 되고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고...) 억지로 불편함을 참으며 해야 하는 생산적인 일과는 점점 더 멀어져만 갔다.


'내가 이러려고 퇴사한 게 아닌데... '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 앉아 조금씩 쌓아 나갔던 나의 하루하루가 모여 지금의 내가 됐단 사실을 퇴사 전에는 알지 못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내 인생의 모든 건 나로부터 시작한다는 사실이다. 회사에서는 완전한 제로에서부터 시작하는 일이 잘 없다. 신규 프로젝트여도 내가 맡은 부분이 있기에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친 작업을 내가 이어서 하게 되는 경우가 많고, 이직해서 맡은 새로운 업무여도 전임자의 흔적을 베이스로 두고 일을 하게 된다.


하지만 퇴사하고 일을 시작한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얘기였다. 기획부터 수많은 결정, 실행, 셀프피드백과 수정까지 그 어느 하나 내 손을 거치지 않는 것이 없었고 그 말인즉슨,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는 거였다. 아무도 나에게 일을 시키지 않고 내가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는다. 이런 삶에서 나는 스스로 움직여서 무언가를 만들어 내고 사람들에게 나를 알리는 것을 반복해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이 소름 돋게도 다 처음 하는 일이다. 가이드는 당연히 없을뿐더러 레퍼런스조차도 직접 찾아야 한다. A부터 Z까지 다 직접 해야 하고 외주를 맡기더라도 내용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나여야 한다. 중간에 문제가 발생하면 모든 책임은 내가 지고 수습도 내가 한다. 모든 게 다 나로 시작해서 나로 끝난다.




자, 그럼 퇴사 전 열심히 희망회로를 돌렸던 나의 찬란한 백수생활 계획의 현실판은 어땠을까?


7am : 기상 (상쾌한 컨디션으로 알람 없이!)

이전 5시 기상에 비하면 1시간을 더 얻긴 했으나 여전히 6시에 알람소리를 듣고 일어난다.

엄마의 퇴사 전 일정에 적응을 해버린 아이들이 늦어도 6시면 기상을 하기 때문이다.

컨디션은 대체 왜 때문인지 여전히 상쾌하지 않다. 하하.


9am : 아이들 유치원 등원 (여유롭게 꽃과 나무도 보고 동네 고양이한테도 인사해야지. 애들이 유치원 안 가고 싶다고 하면 결석도 하게 해 줄 거야.)

꽃과 나무를 보면서 여유롭게 등원을 한다는 게 얼마나 귀여운 생각인지 알게 되었다. 우다다다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잡기 위해 아침부터 정신없이 같이 뛰다 보면 등원버스가 1분만 늦어도 화가 난다. 너무 힘든 날은 아파트 단지 안에 꽃이나 나무는 죄다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그리고 결석이 웬 말인가, 사라져 버릴 나의 하루를 생각하면 어떤 일이 있어도 일단은 보내고 본다.


오전시간 : 자유시간(춤출 거야. 더욱더 나로서 오롯이 존재하는 시간이길.)

오전에 춤을 추는 것은 장단점이 확실한데, 장점은 오전시간이라 덜 피곤한 몸으로 춤을 출 수 있다는 점이고 단점은 갔다 오면 졸려서 낮잠을 안 잘 수가 없다는 거다.

하루 종일 한 일이 춤춘 거 하나로 끝나는 날이 생길 수도 있다. 시간 순삭!


오후시간 : 업무 및 저녁준비 (요리를 해봐야지!)

짧은 업무시간에 순간적으로 몰입했다가 다시 벗어나는 건 생각보다 힘든 일이다. 회사에서 9 to 6 일단 잡아두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내가 무슨 몰입의 신인줄, 단 3시간 만으로 무언가를 이루어 낸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내가 만든 요리를 아이들이 먹지 않으면 굉장히 속상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몇 번 상처받고는 메뉴종류를 대폭 축소했다. 그래도 요리는 웬만하면 지속하려고 한다.


5pm 아이들 유치원 하원 및 저녁시간(육아의 꽃은 저녁시간이다)

육아의 꽃은 저녁시간이 맞지만 내 마음이 늘 꽃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게 문제다. 이 시간을 위해 하루의 내 감정을 컨트롤한다는 게 정말 꽤 어렵다.

왜 이렇게 하원시간은 빠르게 오는지 늘 분주하고 바쁘다. 여유는 언제쯤 생기는 걸까.




이게 바로 퇴사 후 자유로운 삶에서 마주하게 되는 현실이다.


예측하지 못한 상황을 자주 마주함에 따라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다 나빴다 요동을 치고 그런 나의 감정을 돌볼 새도 없이 계속해서 움직여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 그런 나에 대해 응원하는 이도, 감시하는 이도 없으니 편한 만큼 외로움도 함께 온다. 지속적으로 스스로 동기부여를 하는 작업은 필수인데 상당한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마냥 좋을 줄 알았다. 퇴사하면 꽃 길만 걷겠지 싶었다.

그 환상이 깨지는 데는 세달이면 충분했다. 그리고 이제서야 좀 적응이 된다. 회사 밖 삻을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 이제서야 조금씩 감이 온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래서 앞으로는 좀 더 잘 살아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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