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하면 다 가능할 줄 알았다.
회사에서 일하다가 힘에 부치면 모니터 귀퉁이에 메모 창 하나 슬그머니 띄워놓고 나의 찬란할(거라 믿은) 백수생활을 상상해서 적어보곤 했다. 단번에 기분전환이 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설레기까지 해서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꽤나 정성스럽게 작성했었다. 그 메모 속 내용을 조금 옮겨보자면 이러하다.
7am : 기상
상쾌한 컨디션으로 알람 없이!
회사 출근 시간이 8시로 동일했던 우리 부부는 아이들 기상 전 순서대로 출근준비를 마쳐야 했으므로 새벽 5시에 일어나 하루를 준비했는데 매일이 고통이었다. 이 단어 말고는 딱히 떠오르는 다른 단어가 없을 정도로 새벽 5시 기상은 나에게 늘 고비였는데 특히 한겨울 새벽기상 후 칠흑같이 어두운 창밖을 바라볼 때면 무엇을 위해 이렇게 사는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래서 퇴사하면 기필코 '아침'기상을 하리라 마음먹었다. 따스한 햇살 때문에 눈이 부셔서 잠에서 깨는 그 행위 자체를 해보고 싶었다.
9am : 아이들 유치원 등원
여유롭게 꽃과 나무도 보고 동네 고양이한테도 인사해야지. 애들이 유치원 안 가고 싶다고 하면 결석도 하게 해 줄 거야.
출근 전 아이들 등원을 완료해야 했으므로 아침시간에는 늘 아이들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잘 타일러 가며 준비를 시키다가 시간이 부족해지만 늘 큰소리 내는 걸로 마무리가 되었다. 그렇게 화를 내며 억지로 애들을 밀어 넣고 나오면 온갖 생각이 범벅이 되어 기분이 급격히 다운됐는데, 사실 온몸을 짓누르는 피곤함보다도 어딘가 불편한 마음이 훨씬 더 나를 힘겹게 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약간은 동화 같은 등원길을 꿈꾸곤 했다. 퇴사 후 시간과 체력의 여유가 생긴다면 아이들에게 윽박지르는 생활에서 벗어나, 느리지만 소소한 아이들의 하루하루를 함께 살아내고 싶었다. 등원길 마주하는 자연의 변화를 만끽하며 천천히 아이들의 앞이 아닌 뒤에서 함께 걸어주고 싶었다.
오전시간 : 자유시간
춤출 거야. 더욱더 나로서 오롯이 존재하는 시간이길.
워킹맘으로서 취미생활을 열심히 한다는 건 생각보다 큰 노력이 필요한데 내 노력뿐만 아니라 가족의 노력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퇴근하고 춤 수업을 들어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남편이 독박육아를 해야 했고 아이들도 엄마얼굴을 보지 못하고 잠이 들었다. 내가 얼마나 춤을 좋아하는지 알기에 온 가족이 한마음으로 엄마의 취미생활을 지지해 줬던 건데, 너무 감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늘 위태롭다고 느꼈다. 내가 춤추며 회복하는 시간 동안 누군가는 지쳐가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모든 관계가 그러하듯, 한쪽이 편하면 다른 한쪽이 맞춰주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런 가족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춤에 대한 열정의 탈을 쓴 나의 이기심이 충돌할 때마다 다른 해결방법은 없을지 계속 고민했다. 그래서 찾은 가족 구성원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은 내가 낮시간에 춤을 추는 거였다. 퇴사를 해야만 가능한 방법이기에 개인적으로는 가장 기대했던 변화였다.
오후시간 : 업무 및 저녁준비
요리를 해봐야지!
퇴사 후 뭘 할지 정해진 건 없었지만 업무시간 확보는 해두고 싶었다. 그리고 아이들 하원시간에 맞춰 저녁준비를 할 생각이었는데 이렇게까지 비중 있게 시간을 할당한 이유는 사실 나의 비루한 요리실력 때문이다. 결혼한 지 10년 차이지만 요리다운 요리를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다. '결혼하면 된장찌개 끓여줄게'라는 말은 내가 아닌 남편이 했었고 그동안 잘 지켜지진 않았지만 덕분에 나 또한 요리에 대한 부담이 없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생기고 나니 전혀 다른 문제가 되더라. 건강의 중요성도 있지만 음식을 통한 경험이 주는 인생의 풍요로움을 알게 해주고 싶었다.
5pm 아이들 유치원 하원 및 저녁시간
육아의 꽃은 저녁시간이다
아이들이 커갈수록 저녁시간의 중요성을 더 크게 느끼게 되는데 사실 맞벌이 환경에서는 제대로 된 저녁시간을 갖는 것이 쉽지가 않다. 우리 아이들의 경우, 기관에서 저녁까지 제공을 했기에 정말 평일에는 집에서 음식냄새가 전혀 나지 않아도 이상하지 않은 환경에 놓여 있었다. 덕분에 엄마인 나는 아이들의 식습관 파악이 잘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퇴근 후엔 체력이 바닥이라 빨리 애들을 씻겨서 재우기 바빴다. 그야말로 하루하루 버티는 삶.
나의 어릴 적 저녁시간을 생각해 보면 많은 대화와 엄마표 요리의 따스함이 떠오른다. 큰 문제없이 학창 시절을 보낸 이유도 저녁시간의 도움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어떤 이야기라도 끄집어내서 가족의 위로를 받을 수 있는 환경, 그게 나를 단단하게 지켜줬던 거라 믿는다. 나 또한 아이들에게 그런 환경을 주고 싶었다. (물론 퇴사하지 않아도 충분히 만들 수 있는 환경이다. 단지 우리 부부의 상황에는 쉽지 않았을 뿐.)
어떤가? 나의 계획이. 너무도 야무지지 않은가? 하하
그때의 메모를 지금 다시 쓰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무경험자의 미숙함이 이렇게 무섭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기쁨을 누르며 열심히 계획을 세울 땐 몰랐겠지, 여기에서 채 20%도 제대로 이뤄지기 힘들다는 것을.
이번 글이 상상 속 희망버전이었다면 다음 글은 지독한 현실버전으로 가져와 보겠다.
웰컴 투 리얼 월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