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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오페이퍼 Jul 21. 2024

no.1

240721의 생각

데카르트와 칸트는 대충 비슷한 사람 아닌가 했는데 (당연히 아니다.) 

푸코는 우리가 흔히 근대라고 생각하는 시기를 고전주의 시대와 근대로 구분한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데카르트는 고전주의 시대에 속하고, 칸트는 근대에 속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명제는 방법적 회의를 통해 나왔다. [존재]는 생각의 결과를 [표상]된다.  그런데 생각의 결과 표상된 것이 실재와 같다고 믿을 수 있는가? 데카르트는 바로 그 고민을 한 사람이다. 저 명제는 데카르트가 계속적인 의심 끝에 발견한 믿을 수밖에 없는 진실을 발견하고 선언한 것이다. 여하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상과 실재 사이에는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표상된 것이 실재를 나타낸다는 근거가 필요했다. 데카르트는 그 근거로 신을 가져왔다. 신이 인간정신에 새긴 것과 동일한 것을 자연 안에도 새겨두었으니, 우리가 잘만 생각한다면 실재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건방진 생각이다.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사고를 할 수 있기 전의 사고방식이다. 물론, 무한자에 대한 부정으로서 인간의 유한성을 알고 있기는 했다.  그러나 딱 그 정도까지. 


그러나 곧 인간은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사유를 하게 된다. 왜 아니겠는가? 인간 이성이 무엇이든지 잘 생각하기만 하면 다 알아낼 수 있다는 생각을 하던 이들이 한계에 부딪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칸트가 그 유명한 3대 비판을 한 것이다.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 비판>. 푸코는 칸트가 인간을 발견했다고 했다. 이는 인간의 유한성을 사고 할 수 있을 때 가능했다. 인간의 유한성을 파악한다고 함은 인간 이성의 한계를 파악하는 것이다. 칸트가 주장한 것은 인간의 이성에 한계가 있음을 인정(인간의 유한성)하고 인간은 그 한계 내에서만 이성적일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것이 칸트의 비판철학, 주체철학이다. 


이제 표상은 인간이 사유한 결과 찾아낸 실재가 아니다. 표상은 사유의 효과, 현상에 불과하다. 실은 그 기원을 알 수가 없다. 중요한 것은 기원이 아니라 모든 가능한 인식의 주권적 주체로서 인간이 인식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동시에 그 자체로 실증적 경험의 대상으로 등장한다.  그 결과 발달한 학문이 생물학, 경제학, 문헌학 등이다.





(*) 푸코를 읽으면서 알게 된 것들을 개인적으로 정리한 내용이라 틀린 내용이 있을 수 있다. (아마도 백 퍼센트) 그럼에도 개인적인 아카이빙을 위해 적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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