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한 때 미스코리아였지...

by 이한나

'브래지어가 1+1 이래!!!'

'딸아이와 공평하게 하나씩 사야지.'

난 A컵

넌 C컵


딸아이의 뭔지 모를 당당한 표정.

뭐지?나를 보며 우월감을 느낀 것이 분명하다.

참을 수 없던 나는

"너 낳고 먹여서 그렇거든" 이라는 말로 쏘아붙인다.


아이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맨날 내 탓 이래! 아기 먹인다고 대체 왜 작아지는데?"라는 말에 이어 한 번 더 내 속을 긁었다.

"솔직히 엄마가 예전에 몸매 좋았다고 하는데, 난 도대체가 믿을 수가 없어. 가슴이 진짜 컸다고?"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를 때쯤

구원투수 남편 등판

그건 아빠가 증명할 수 있어.

'뭐지 이 뿌듯함은???'

하지만 남편은 내가 잠시라도 행복감을 누리면 안 된다고 판단한 사람처럼 쉬지 않고 나불거렸다.

"근데 여보가 애 낳고 가슴 작아진 건 알겠는데. 네가 언제 그렇게 몸매가 좋았다는 거야? 애 낳고 다 망쳤다고 하는데... 너 크게 변한 거 없어. 그냥 비슷해. 대체 뭘 근거로 몸매가 좋았다는 건지 난 항상 궁금했어. 대체 언제 좋았어?"


"아 진짜 어이없다. 됐어 그만해!"

남편은 재빨리 "아냐 뻥이야. 자긴 늘 몸매가 좋지."라는 급반전의 말로 주말을 안전하게 수호했다.



문득 혼자 있으니... 많은 생각이 지나갔다.

'나의 과거 몸매는 어땠는가?'

'언제 핫했던가?'

'얼마나 훌륭했던 몸매였던가?'를 떠올리며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가장 좋았던 때는 임신 초 맛있게 먹고 신나게 토하는 바람에 내 몸은 점점 야위어가며 잠시, 아주 잠시 훌륭한 몸매가 되었고,

대학원에서 아줌마들을 대상으로 걷기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같이 걷고 운동하는 바람에 잠깐 탄탄하고 괜찮은 몸매를 가졌다.

그러니까... 39살 인생을 살면서 스스로 괜찮다고 여긴 몸매를 가진 시간은 6개월도 안 되는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물론 타인이 인정한 시간은 아니었다.)


그런데 나는 과거 전체의 기간 동안 늘 핫한 몸매의 소유자처럼

딸아이에게 "엄마는 너 때 안 그랬어~ 엄마는 젊을 때~~~~"라는 말을 종종 해댔다.

나뿐만이 아니다.

남편 역시 "요즘 진짜 편해졌지. 자율 출퇴근제, 52시간 근무... 세상 참 좋아. 나 때는 밤새 일하고 장난도 아니었지."라는 말로 매일 빡세게 일했던 사람처럼 말하곤 했다.

맞다... 밤 새 일할 때가 있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여유로울 때도 많았다.

하지만 '날을 새며 힘들었던 기억, 일하다 쓰러질 거 같아 링거를 맞은 기억'은 너무나 강해 지난날 여유로운 시간을 다 지워버리고 회사 생활을 온통 혹독했던 시간으로 포장해버렸다.




가장 힘들었던 경험 하나가 다른 경험까지 다 가려버린 것일까?

기억의 왜곡이 '라떼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꼰대의 언어를 만들어 낸 것은 아닌가?


과거 살면서 딱 한 번 들었던 "어머~ 너 몸매 좋다" 이 말 한마디가 과거 내내 몸매 좋았던 것처럼 기억을 왜곡시키고,

"사람인지 기계인지 모르겠어. 일처리가 정말 빠르군" 이 말 한마디가 신입사원 당시의 실수했던 모습까지 다 잊게 만들어버리고...


그렇게 기억을 맘대로 성형한 우리는 타인을 향해

"나 때는 안 그랬는데... 참 요즘 사람들 말이야... "로 비난할 수 있는 특권을 스스로 취득한 건 아닌지 모르겠다.


이제 남편이 '라떼는 말이야'로 시작할 때면...

새끼 꼰대에서 장성한 꼰대가 되어가는 징조임을 깨닫고

공감은 하되 왜곡에서 벗어나도록 말을 건네는 아내가 되어야겠다.

"그때 여보 진짜 힘들었지? 정말 힘들어 보였어. 근데 가끔 일찍 퇴근해서 강원도 갈 때도 있었잖아. 그때 엄청 좋았는데..."라며...


힘들 때도 있었지만, 좋을 때도 있었고,

몸매가 좋을 때도 있었지만, 별로 일 때도 있었고,

싸울 때도 있었지만, 화목할 때도 있었고,

실수할 때도 있었지만 나이스 할 때도 있었고...


반대의 기억을 찾아내는 그 순간...

'라떼'를 좋아하는 꼰대에서의 탈출하는 노력이자,

타인을 비난하기보다 자신을 볼 줄 아는 현인이 되는 과정이며,

현재 내가 꿋꿋이 살아가야 하는 하나의 이유를 찾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


덧붙여... 한마디 하자면...

나는 지난 주말 이틀 내내 남편과 연장전까지 하면서 싸웠지만...

한 달 전 8월, 코로나 의심으로 14일의 자가격리 동안 한 번도 안 싸운 환상의 콤비 부부였다.

그러니 우린 천생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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