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미워질 때 읽어보려고 쓴 글

by 이한나

"난 대체 무슨 죄를 많이 지었길래..."

남편은 운전하다 한숨을 내쉬더니 '죄 타령'을 한다. 무슨 일이 있나 싶어 "왜"라고 물었으나 이내 괜히 물어봤구나 싶었다.

남편은 낮은 목소리로 혼잣말인지 상대도 들었으면 하는 말인지 모를 말들을 내뱉었다.

"이한나 수능 보러 갔을 때 생각나네. 얼마나 고생했을까 싶어 데리러 갔는데 나오자마자 보다가 잠들었다고 하고... 아휴 딸내미도 시험장 데려다주려고 연차까지 쓰고 새벽부터 내려주고 기다렸더니 딸내미도 나오자마자 잠들었다고 하고... 어쩜 그러는지... 대체 나는 무슨 죄를 그렇게 지어서..."

'무슨 죄긴! 그저 나를 사랑한 죄 아니겠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냥 웃으며 종알거렸다.

"수능 보러 갈 때 왜 그렇게 책을 들고 갔는지... 나오자마자 다 버린 거 기억나지? 그리고 오빠랑 치킨 먹으러 갔었는데... 오빠가 치킨 사줬잖아~~~"


그랬다. 내가 고3일 때 이 남자는 대학교 2학년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학원 수업을 마치고 나올 때면 캔 음료수 하나를 들고 학원 앞에서 기다려주고, 공부 한번 시켜보겠다고 대학 수업을 마치고는 우리 집에 와 영어와 수학을 가르쳐주던 남편이었다.

내겐 선물 같은 사람, 다시 태어나도 꼭 만나고 싶은 그런 사람...


그를 알게 된 것은 1998년 2월 23일이었다.

친구는 전화선을 뽑아 컴퓨터에 연결하면 나 혼자 노는 파란 화면의 컴퓨터에서 다른 이들을 만날 수 있는 세상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 옆에 앉아있던 나는 모르는 남자와 '어디 사는지, 몇 살인지'를 주고받는 친구의 대화창을 숨죽인 채 바라보며 얼마나 설레었는지 모른다. 17살 소녀의 마음에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바람을 막을 길이 없던 나는 곧장 집에 가 전화선을 뽑아 컴퓨터에 연결하였다.

24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이 난다.

내 컴퓨터가 또 다른 세상과 연결하는 "삐삐삐삐삐----" 그 소리...

그렇게 나는 친구에게 배운 대로 접속을 했고, 수많은 대화방 중에서 그저 손길이 가는 대로 클릭을 하고 방에 입장을 했다.

"안녕하세요?"

그렇게 처음 대화한 남자가 내 남편이 될 것이라는 것도 모른 채....


동전을 잔뜩 챙겨 공중전화를 향했던 5개월의 시간을 쌓은 뒤 우리는 약속대로 시골의 기차역 앞에서 만나게 되었다.

"나오는 입구는 하나야. 출구로 나오면 바로 앞에 큰 나무가 있을 거야. 거기서 보자."

도착하니 남자 친구의 말대로 역 앞에는 아주 오래된 나무가 있었고, 키가 큰 남자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대로 남자 친구에게 갈 수 없었는지 화장실에 달려가 옷매무새를 매만지고 크게 심호흡을 한 뒤 한걸음 한걸음 큰 나무 앞으로 다가갔다.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안녕?"이라는 말 한마디 하기 힘들었고, 사진으로 수도 없이 봤던 그 얼굴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두리번거리며 멋쩍어하던 그 상황을 피해 어디론가 가야 했다. 남자 친구는 이미 계획한 대로 역전 앞에 위치한 카페로 길을 안내해주었다. '이런 곳은 어른들만 가는 곳이 아닐까?'라는 마음으로 2층 카페의 계단을 한 칸 한 칸 올라갔다. 우유와 미숫가루를 시킨 우리들은 도대체 누구랑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오해할 만큼 서로의 눈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저 멀리 허공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우리의 관계는 시작되었다.


나는 아직도 말할 수 있다.

"난 정말 세상에서 내 남자 친구가 제일 잘생겼다고 생각했다니까~ 연애시절 친구들이 내 남자친구가 여드름이 많다고 그랬는데... 정말 거짓말이 아니라 그 여드름이 나는 하나도 안 보였어~ 진짜야~!"


이제 막 고등학생이 된 서울 사는 소녀와 대입을 앞둔 시골 사는 고3 소년은 한참을 꽁냥 거리다 23살 24살의 나이에 평생을 함께 하기로 약속했다. 그 약속을 한 지가 얼마 된 거 같지 않은데 한 해 한 해 시간이 흐르더니 어느덧 우리는 40대가 되었고, 딸아이가 스무 살이 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남편은 남자 친구 시절에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너랑 만나는 시간이 점점 길어질수록 내 인생에서 널 알고 지낸 시간의 비중이 커지는 거네. 언젠가는 널 모르고 산 시간보다 널 알고 지낸 시간이 더 많아지겠지?"

그 말이 머릿속에 남았던 건지 나는 우리의 시간을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를 반복하며 세어보곤 한다.

"17살에 만났고, 지금 41살이니까 오빠랑 알고 지낸 게 훨씬 많아진 거야~~ 오빠랑은 25년째 지낸 거라니까~~ 교복 입고 만났는데... 완전 아줌마 다 됐네..."


한 해 한 해 시간이 흐를 것이고

당신을 모르고 산 17년이라는 세월이 당신과 함께 한 시간에 비해 초라해 보이는 시간이 다가오겠지.

나이 먹어도 괜찮아.

늙어도 괜찮아.

접었다 폈다 셈이 오래 걸리더라도 당신과 함께 한 세월들을 세면서 즐거움이 있었으면 해...

여보! 다시 태어나면 컴퓨터 접속 안 하겠다고 했던 말 기억나??

다음 생에는 더 좋은 여자 만나라고 했던 쿨한 말인데...

나 취소할래. 그냥 나랑 만나자~

난 정말 당신이 너무 좋거든...


p.s. 여러분도 첫 만남을 기억하며 글을 써보세요! 사랑이 샘솟는 경험을 하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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