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망가졌을 때 어떻게 회복하고 있나요?
최근, 아마도 많은 것들을 뒤집어놓을 정도로 감정이 휘몰아쳐야만 했던 일들이 지나갔다. ‘아마도’라는 말을 붙인 것은 사실 그것이 나를 바꿔놓지 않았길 바라기 때문이고, ‘휘몰아쳐야만 했던’이라고 써본 것은 그러지 않았으면 내가 망가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원체도 강하거나 지조 있는 성정이 되지 못해 나의 나날들을 많이도 망가졌다 정의하는 밤을 보냈다. 나의 하루를 정의할 수 있는 건 온전히 나의 권한인데, 나는 그 권한을 십분 발휘해 많은 밤들을 망치곤 했다. 만성적으로 망쳐진 밤은 지금도 간혹 나에게 영향을 주고 있으며, 나는 그런 모습에서 벗어나고 싶다. 감정에 매몰되는 삶은 창작적으로는 좋을 수 있으나 나 스스로에게는 고통이었다. 스스로의 고통은 스스로를 향한 원망을 만든다. 내가 힘든데, 사실 나를 힘들게 할 권한 또한 내가 발휘하고 있으니까.
궁극적으로 우리는 스스로를 사랑해야 한다. 그런 게 인생이더라- 하는 생각이 든다. ’ 나를 좋아해야 해 ‘같은 단순함이 아니라 그러지 않으면 숨차고 벅찬 게 삶이다. 하지만 또 스스로를 전적으로 사랑하고 지지하고 응원할 때 그만큼 빛나는 순간들이 없다. 그러나 스스로를 사랑해야 한대도 나를 사랑하기 위해선 내가 원하지 않는 나의 모습을 가려낼 필요도 있다. 나를 사랑하는 것에는 나를 내버려 두지 않는 것이 포함된다. 오늘을 만성적으로 망쳤다 정의하고 내일을 또 기진맥진 맞이할 수 있겠지만 그건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나를 온전히 사랑하는 데에는 결국 이런 노력들이 필요하다. 내가 나를 좋아할 수 있는 다양한 요소들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나를 망쳐놓는 것에 한없이 공격적이고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
감정을 감정답게 해소하는 방법을 여전히 잘 모르는 나의 가장 첫 방법은 외면이었다. 행복한 것을 더 찾거나, 억지로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을 외면하는 것. 내 하루가 어땠는지 돌이켜보지 않고 아무튼 하루를 보냈다는 사실에 만족하는 것. 그 하루가 얼마나 텅 비어있었는지, 혹은 충만했는지, 나는 웃었는지, 울었는지, 혹은 울고 싶은 마음으로 웃었는지, 웃고 싶은 마음으로 울었는지 어떠한 생각을 포기하고 그저 외면하는 것. 그 하루를 정의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나는 꽤 많은 외로움과 절망을 외면할 수 있었다. 고스란히 악몽으로 돌아올 많은 생각들을 외면하고 잠들었을 때, 나는 또 그럭저럭의 아침을 맞이할 수 있었다.
다만 이런 방법에는 여전히 문제가 따랐다.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지 않고 외면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내 무의식, 더 가까운 단어로는 마음이 형편없이 나풀거렸다는 것이다. 내가 앞서 “감정에 휘몰아쳐야만 했다”라는 말은 이러한 경험에서 나왔다. 강단 있게 자리를 지키고 꼿꼿이 서있다고 생각한 나의 외면은 나에게 수많은 생채기를 내게 했다. 오늘의 작은 상처를 외면하고 잠들면 그 욱신거림은 여전히 다음 날까지 지속되고, 그럼 그다음 날은 설사 즐거운 날이 있었다고 해도 그 작은 고통에 매몰되어 또 외면해야 하는 날이 되었다. 휘몰아칠 때 나를 내려놓고 오히려 급류에 몸을 맡겼을 때 회복되었을 것들을, 굳이 굳이 맞이하면서 생채기를 내게 되었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마음이 안 좋은 날에는 마음이 안 좋다고 인정해야 했다. 다만 하루를 정의하는 것에서는 여전히 멀어지기로 했다. 인정과 정의를 같은 선상에 두는 순간 다시 과거로 돌아갈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튼 급류를 바라보기는 했고, 굳이 줏대 있게 바로 서있지 않고 어느 정도는 흔들리기로 했다. 다만 그렇게 흔들리고 나니 또다시 스스로를 회복시키는 방법이 필요해졌다.
참 웃기게도 사람은 본능적으로 살아갈 길을 찾는다고, 나의 감정적 혼란은 결국 내가 길을 찾아 나서게 만들었다. 내가 근래 찾은 나의 회복은 삶의 ’ 루틴‘에 ’ 굳이‘를 넣고, 괜찮다고 되뇌는 것이다. 기분전환을 위한 일회성 방법이 아니라, 나의 삶과 완전히 동화되는 루틴을 만들되 그 루틴에 ’ 굳이‘의 요소를 넣어놓고 급해지는 마음을 도닥이는 방법을 찾았다. 말이 복잡하니 이 요소들을 공유해 보겠다.
나는 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책을 읽는 행위는 아무튼 성취감을 준다. 아주 빠르게 내 발전을 체감할 수 있는 도구이기도 하다. (책이 그렇다기 보단, 내가 어렸을 때부터 책을 읽어왔기 때문에 나에게 그런 요소가 된 것 같다.) 가방에 다시 한번 책을 한 권씩 넣기 시작했다.
여기서 첫 번째 굳이의 요소가 들어간다. 원래는 주변에서 인정받을 정도로 속독하는 편이었는데, 그 습관을 버리자고 결심했다. (속독을 한다고 내용을 이해 못 하거나, 글을 만끽하지 못한 건 아니라고 확신한다.) 그 습관을 벌고 책에 밑줄을 긋기 시작했다. 별 게 아니긴 해도, 이렇게 되는 순간 이동하면서 책을 읽기에 꽤 집중력이 소요된다. 아무튼 손을 둘 다 책에 할애해야 하고, 그동안 일상적인 미디어에서는 차단되어야 하니까. 또 그러기 위해 책에 끼울 수 있는, 연필 한 자루가 딱 들어가는 필통을 같이 샀다. 연필을 사기 위해 연남동 구석까지 갔다. 이 또한 내가 이 애정을 유지하기 위한 부가적인 굳이이다. 책을 읽어가다가 멈칫한 문장에 밑줄을 긋는다.
여기서 첫 번째 굳이-의 ’ 괜찮아 ‘ 가 이어진다. 이동을 하든, 카페 같은 곳에서 책을 읽든 생각보다 줄을 긋고 단어를 되새기며 책을 읽는 건 어렵다. 마음이 급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간 나는 일이 없으니 빨리 읽어야 하는데, 라거나 줄이 삐뚤어지면 어떡하지 하는 미묘한 불안 같은 것들. 사실 이러나저러나 상관없지만 내 마음속에서 불안으로 고개를 드는 것들을 괜찮다고 한다. 한 걸음 떨어져서 봐, 걱정하는 대로 되어도 괜찮잖아.
그리고 두 번째 굳이는 필사다. 책을 읽고 밑줄 친 문장들은 필사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책을 후루룩 넘기면서 밑줄 그은 부분만 찾는 게 아니라, 어찌 됐든 한 페이지씩은 꼭 스쳐 지나가는 것이다. 밑줄을 찾기 위해 눈을 움직이다 보면 읽었던 책의 내용이 불현듯 떠오른다. 그런 시간들을 가지면서 밑줄을 찾아내고, 필사를 한다.
여기서 두 번째 굳이-의 ‘괜찮아’. 웃기게도 난 꽤, 스스로가 민망할 정도로 악필인 편이다. 그 이유는 마음이 급해서. 써야 할 목표치가 있으면 빨리 써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렸을 때 누군가가 글을 빨리 쓴다고 칭찬했던 것 같기도) 그럼 어깨와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고 글씨는 갈겨쓰기 시작한다. 그럴 때 그냥 괜찮다고 하는 것이다. 숨차게 쓰지 않아도 돼. 글씨는 좀 못 써도 돼. 네가 지금 뭘 쓰고 있는지, 이 밑줄을 그을 때 뭘 느꼈는지 봐. 꽤 괜찮잖아.
마지막으로 세 번째 굳이는 뜨개질을 시작한 것이다. 이건 무조건 ‘괜찮아’와 같이 언급되어야 하는 요소인데, 나는 정말 손재주가 없고 꾸준히 뭘 하는 것에 재능이 없기 때문이다. 아주 단순한 뜨개질만 하고 있음에도 결과물이 썩 멋들어지지 않다. 당연하다. 안 그래도 손재주가 없기로서니 뜨개질은 생각보다 고도의 힘조절이 필요.. 하니까. 근데 그냥 괜찮다고 하기로 했다. 하는 게 어디야. 뭐 좀 못하든, 구멍이 나든, 첫 줄보다 코가 많아지든. 그렇게 되어도 썩 괜찮잖아.
이렇게 글을 쓰고 나니 결국 나는 나 스스로를 사랑하기 위해
감정에 휩쓸리되 매몰되지 않는 나를 만들고
마음에서 억지로 고개를 들어대는 불안을 마주하고
소소한 괜찮아를 되뇌며
실제로 걱정하는 대로 되어도 괜찮은 경험들을 만들어
불안이 별 것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 같다.
이런 작은 마음들은 결국 내가 큰 문제에 휘둘려도 내가 몸을 맡긴 채 다치지 않게 만들어줄 것이다.
이 모든 것의 중요성은 결국 내가 나를 사랑하기 위해서고, 나를 사랑해야만 회복할 수 있는 것들이 있어서이다.
궁극적으로는 잠깐의 기분전환이 아니라 삶이 이렇게 흘러가게 만들어야 한다. 루틴은 결국 내가 나를 유지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내가 망가지는 가장 첫 신호는, 늘 하던 것들을 하지 않을 때니까. 이제 그 확신, 나를 유지할 수 있는 루틴에 나를 회복하게 하는 요소를 넣는다. 그럼 나는 일상적으로 회복하게 되고, 행복하게 되고, 썩 괜찮은, 불안하지 않은, 행복한, 그 어떤 날로 정의하는 밤을 만날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남은 삶을 스스로 사랑하기 위해 무엇으로 회복하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