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워홀 가면 안 된다 표본의 개노답 워홀기 47

양공장 원정대, 남바완의 고난의 대서사시 29

by 재쵸

<탈출까지 D-64~D-28:인도여 못 있거라 4>




<발등에 떨어진 불은 훌륭한 수족냉증 치료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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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까지 d-2, 집도 절도 없이 떠도는 중

지금은 목요일 저녁, 이사는 토요일 아침. 페이스북이며 플랫메이트를 뒤져봤지만 최근에 올라온 글보다는 예전 글이 많았다. 심지어 두보에 처음 왔을 때 봤던 글도 있었다. 아직 쉐어생을 구하지 못한 건지, 글을 지우지 않은 건지 몰라도 집 상태를 보면 전자가 유력했다. 개중 멀쩡한 집들은 예전에 쪽지를 보낸 이력이 있었다. 물론 누구도 응답하지 않은 덕에 나는 노인의 집에 가게 됐고. 혹시 모르니 찔러나 볼까 싶었지만, 구질구질함이 구남친급이라 접었다. 발등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이 마치 캠프파이어 같았다. 꺼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멍하니 보게 됐다.


비교적 최근에 올라온 집 중 괜찮아 보이는 곳은 집주인이 출장 중이었다. 사실 인스펙션이야 안 해도 그만이었다. 인스펙션 해봐야 간 곳이 노인의 집과 인도 집인 것만 봐도 그렇다. 결국 한 곳에서는 쫓겨났고 나머지 한 곳에서는 뛰쳐나오지 않았는가. 잠 줄여가며 공부해서 시험에 떨어지느니 공부 안 하고 떨어지는 게 낫지. 두보에서만 벌써 3번째 집을 구하고 있고, 매번 재고 따질 수도 없게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선택지 없는 인스펙션은 이삿날 도살장에 끌려가는 기분만 들게 할 뿐이다.


그럼 당장 이사 가면 되지 뭐가 문제냐 싶을 것이다. 호주는 도어록을 쓰는 집이 거의 없다. 그래서 집주인에게 열쇠를 받아야 하는데, 집주인은 이삿날 이후에 돌아온다. 임시 숙소가 필요했다. 다행히도 여기에는 선택지가 존재했다. 가든 여인숙에 가거나 길거리에 나앉기. 가든 여인숙은 5박에 60만 원으로 금액이 터무니없고, 길거리를 택하자니 얼마 전 오라나몰 근처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정정하겠다. 이번에도 내게는 선택지가 없다. (하단 기사 참조)


괜찮은 집은 알음알음 소개로 들어간다는 말을 입증하듯, 온라인에서는 멀쩡한 집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구직과 같았다. 좋은 회사는 퇴사율이 낮아 공고가 올라오지 않고, 구직 시장에 나온 자리는 참다못해 뛰쳐나간 이의 자리라고.


보다 못한 양공장 노동자가 인맥을 긁어모아 넘겨주었다. 콜드룸 동료가 살던 집과 백인의 쉐어하우스. 콜드룸 동료는 집에 개미가 들끓어 이사를 나간다고 했다. (이건 인도 집도 마찬가지였다.) 백인의 쉐어하우스는 공실 유무를 모르는 데다, 지인을 통해서만 쉐어생을 받는다고 했다. 나는 지인도 아닌 데다 영어도 안 되는데 대뜸 연락해서 협상까지 해야 했다. 그나마 기대를 걸어볼 만한 점은 집주인이 무간지옥 언니의 건너 지인이라는 것. 비록 그게 몇 다리 건너인지는 몰라도, 인맥으로 굴러가는 서구 사회에서 생판 남보다는 낫겠지. 백인 집주인에게 문자를 남기자 바로 전화가 왔다.


'누구세요? 제 번호는 어떻게 아셨어요?'


망했네...


"어.. 무간지옥언니한테 받았는데.."


'그런 사람 모르는데?'


수화기 너머로 불신의 기운에 말문이 턱 막혔다.


"아.. 쉐어하우스 운영하신다고 들었어요. 제가 급하게 이사 가야 하는 상황이라.."


'어머.. 어쩌다요?'


노인의 집에서 인도 집까지의 여정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어디선가 인간극장 배경음악이 들리는 것 같았다. 이대로 이 슬픈 극이 끝나기를 바랐다. 제대로 된 대답을 하려고 할수록 말이 꼬였다. 슬픈 예감이 들었다.


'오, 유감이네요. 안타깝게도 우리 집엔 남는 방이 없어요.'


슬픈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구나. 이제는 불행히도(unfortunately)의 ㅂ(u)만 들어도 발작을 일으킬 지경이다. 가뜩이나 불행한 사람 더 불행하게 만들지 말아 줘.



<분양권부터 팔고서 아파트를 짓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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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1, 더는 물러설 곳이 없다. 정 갈 곳 없으면 플레처 모텔에 가면 된다는 말을 실현할 때다. 서구 영화 속 살인 사건의 단골 무대이자 갈 곳 없는 떠돌이들의 쉼터, 허름함과 위험함의 상징, 모텔! 별 거지 같은 집들만 골라 살긴 했지만, 갈 데 까지 갔구나... 돈 내고 번지점프 같은 걸 왜 하나 몰라, 내가 나락에 떨어지는 속도가 더 빠른데. 그간 세상이 떠밀 때마다 온몸으로 저항했던 시간들은 어찌나 무의미한가.


남들은 모텔에서 시작해서 더 나은 숙소로 옮기는데, 나는 시작과 끝을 모텔로 장식하는구나. 완벽한 수미쌍관을 이루는 내 인생은 어찌나 문학적인지. 한편으로는 마음이 편했다. 그간의 사건사고로 기대치가 땅끝에 처박혔기에. 최소한 정신병자 집주인은 없겠지. 이러나저러나 나를 받아줄 곳은 나락뿐이구나.


보건실에 가서 인사과 직원 클레어에게 입주 의사를 밝혔다.


"언제 입주하고 싶은데?"


"내일."


클레어의 어색한 웃음으로 당혹감을 덮고는 포스트잇을 건넸다. 신상 정보를 작성을 마치자 클레어는 '불행히도' 담당자가 부재중이라고 했다. 당장 내일 아침이 이사인데, 나락마저 갈 수 없는 건가? 내 급격한 표정 변화에 클레어가 내향인 특유의 어색하지만 친절함을 잃지 않으려는 미소를 지었다.


"걱정 마. 담당자 르네가 저녁에 열쇠를 전해줄 거야."


호주의 일처리가 얼마나 엉망진창인지 숱하게 보아왔기에 불신과 불안을 떨칠 수 없었다. 하지만 걱정이 무색하게 르네에게서 곧장 연락이 왔다.


'나 르네인데, 5시 반까지 열쇠 주러 갈게~'


5시 30분, 르네는 나타나지 않았다. 연락을 해도 답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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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내일 이사라고, 르네야, 쫌!!!! 아니다, 다 내 죄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닌데... 이 말은 비관적인 상황이어도 결과는 낙관적일 수 있다는 의미지만 호주에서는 다르게 쓰인다. 호주는 남반구 거지 섬이니까! 모두 여름일 때 혼자 겨울이고, 크리스마스는 여름인! 세상의 기준을 역행하는 남! 반! 구! 연어는 맛이라도 있지, 맛도 없는 거지섬, 남! 반!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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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시간에서 멀어질수록 실실 웃음이 나왔다. 그때 르네로부터 문자가 왔다.


'엥? 나는 플레처 모텔로 왔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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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야, 좀!!!! 쪽지에 집 주소도 남겼는데 왜 모텔로 간 거야! 열쇠를 받으러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었다. 차로는 5분도 안 걸리지만, 걸어서는 산 넘고 물 건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 물론 중간중간 위치한 무단횡단 구간에서 살아남았을 때 얘기다. 우버를 타면 되긴 하지만, 모로 보나 르네가 오는 편이 빠르고 효율적이었다.


'그럼 열쇠는 어떡해? 내가 지금 거기까지 갈 수가 없는데.'


르네는 두보인답게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가르침을 주었다. 답장을 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이사까지 12시간, 세상의 멱살을 잡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짐을 싸면서 시계 한 번, 휴대폰 한 번 번갈아 봤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휴대폰은 멈춰 있었다. 오라나몰에서 노숙하며 비트박스 메이커로 생계를 이어갈지 진지하게 고민하려던 중 르네에게서 문자가 왔다.


'내일 11시에 플레처 모텔 앞에서 만나자.'


인도 집에서 9시쯤 나가야 하는데... 그러게 아까 차 돌려서 오지, 5분밖에 안 걸리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황당했다. 모텔로 간 거야 소통 오류일 수도 있지만, 약속 장소에 사람이 없으면 연락이라도 해보지 않나? 말도 없이 가버리다니. 아니다, 아직도 합리성이나 효율성을 바라는 내가 문제다. 오라나몰에서 노숙하지 않아도 되는 게 어디냐. 눈이 낮아질 대로 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서 더 내려야 되는구나. 앞으로 어디까지 낮아질지 기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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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에 내가 숨 쉴 곳이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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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이 안 들어가 캐리어를 누르고 있다. 엄청난 크기의 이어폰은 오라나몰에서 19불 주고 샀다. 걸을 때마다 부품 덜그럭대는 소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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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바지를 안 입은 것처럼 나와서 손수 입혀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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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집에서의 마지막 밤을 마무리하기 위해 룸메이트와 칼의 자손 햄버거집(Carl's Jr)에 갔다. 맥도날드, kfc, 헝그리잭(버거킹)만 번갈아 다니던 중 칼의 자손 버거를 발견했을 때 어찌나 반가웠던지. 이사를 가면 다시는 못 올 테니 커피와 버거 두 개를 주문했다. 둘이서 커피 한 잔을 나눠 먹냐고요? 다 제 겁니다.


평생 먹을 햄버거를 호주에서 다 먹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사실 나는 호주 패스트푸드점을 혐오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한국 지점과 자꾸 비교하게 됐으니까.


한국에서는 패스트푸드 브랜드 별 특색이 뚜렷하다. 그리고 각 브랜드별 인기 메뉴에도 차별성이 돋보인다. 맥도날드의 경우, 빅맥 같은 스테디 메뉴는 '정석'을 추구하고, 한정 제품은 뚜렷한 개성을 보여준다. 새우버거 하면 롯데리아, 소고기 패티는 버거킹. 차이가 뚜렷한 만큼 고정 수요층이 존재한다.


하지만 호주에서는 브랜드별 차이가 크지 않다. 소고기 아니면 치킨. 소스는 마요네즈 혹은 케첩이 보편적이다. 한국에서 창녕 마늘이나 진도 대파 같은 제철 특산품을 활용한 한정 메뉴가 나올 때마다 박탈감이 들었다. 게으르게 패티 개수만 늘려서 신제품이랍시고 내지 말라고! 혁신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니까 마요네즈를 벗어나, 멍청이들아!

KakaoTalk_20251026_162945609.jpg 어느 나라 맥도날드인지 맞춰 보세요.


뿐만 아니라 품질에도 차이가 확연했다. 한국에서는 버거를 열었을 때 푸짐하지만, 호주에서는 잘게 채 썬 시들시들한 양상추가 야박하게 든 게 정석이다. 패스트푸드도 일정 수준의 품질이 보증되는 한국과 달리 호주에서 햄버거는 말 그대로 정크푸드다.


물론 호주에도 고품질 수제버거 체인점이 존재한다. 하지만 두보에는 없다. 그래서 그 정크 푸드를 누구보다 많이 소비한 내 몸은, 걷기를 생활화하고 크로스핏도 꾸준히 다녔음에도 점점 망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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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햄버거 가게는 내게 쉼터였다. 인도 집에 돌아가야 하는 시점을 유예하게 해주는 구원자. 하지만 오늘만큼은 돌아가는 길이 괴롭지 않았다. 끝이 확정되어서겠지. 달은 무척 밝고 커다랬다. 그러고 보니 한국은 추석 연휴구나. 아무 생각 없이 호주에 건너와 세상이 무너진듯한 충격을 받은 게 엊그제 같은데... 그때는 목표는커녕 당장 내게 주어진 '오늘'이 막막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남은 하루가 너무 길어 감당하기 버거웠다. 미리 세컨을 따기 위해 여기까지 흘러왔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답답한 건 마찬가지였다.

ㅈㅁㅈ.JPG 호주에 갓 도착한 재쵸


개들이 너무 보고 싶었다. 단 한순간도 보고 싶지 않았던 적이 없지만, 유독 사무치게 그리웠다. 한국에 있는 개들과 영상 통화를 했다. 개들은 잔디 냄새를 맡느라 여념이 없었다. 회사에서 혼자 10인분을 맡은 사람이 퇴사해도 회사는 잘만 굴러가는 것처럼, 나의 부재는 미미한 여운조차 남기지 못했다. 내 개들은 보더콜리처럼 지능이 높지도, 진도처럼 충성심이 강하지도 않기에... 애달프고 불행한 건 오직 내 몫이었다. 마치 스펀지송과 별가는 행복하고 깐깐징어만이 유일하게 불행한 것처럼.(EBS판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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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조에 앉아있는 것.. 변기 X


내가 한국이라면... 개들을 마음껏 만지고, 내가 얼마나 좋아하는지 몇 번이고 말해줬을 텐데. 대체 나는 뭘 위해 여기 있는 걸까? 불행한 곳에 1년 더 살려고 비자를 따고 있다니. 이 어찌나 어리석은가.


여행을 다니고, 로컬 카페에서 브런치를 먹고, 랜드마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호주에 오기 전 꿈꿨던 모든 것들을 이뤘다. 하지만 그 경험들은 내가 진짜 원한 건 이게 아니라는 여운만 남겼다.


자주 한국에서의 삶을 떠올렸다. 집에서 편하게 배달을 시키고, 식곤증이 몰려오면 개들과 낮잠을 자던 평범한 순간들을. 그 시간들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잃은 후에야 깨달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내 워홀은 실패했고, 나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게 두려워 또다시 외면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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