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워홀 가면 안 된다 표본의 개노답 워홀기 46

양공장 원정대, 남바완의 고난의 대서사시 28

by 재쵸

<탈출까지 D-64~D-28:인도여 못 있거라 3>



<인도부인 너는 내 여자니까>

그간 이사 갈 집을 알아보지 않은 건 아니다. 고비가 올 때마다 구직 사이트를 뒤지는 직장인처럼, 나도 인도가 인도 할 때마다 페이스북과 플랫메이트를 뒤졌다. 그럴 때마다 번번이 발목을 잡은 건 출근이었다. 노인의 집에서 쫓겨나면서 브라이언의 차를 타지 못하게 된 것처럼, 거처를 옮기면 오일 쉐어를 잃을 게 뻔했다.


시골에서 차가 없다는 건 수족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양공장 노동자와 콜드룸 이쁜이가(워홀기 38화 참조) 잠시 오일 쉐어를 잃은 적이 있다. 그들이 탔던 차는 굴러가는 것도 신기한 똥차였는데, 얼마나 똥차였냐면 고장 나서 차를 수리하고 얼마지 않아 다시 고장이 났다. 당시 나도 오일 쉐어를 구하지 못했을 때라 우리는 같이 우버로 출근을 했다. 머릿수가 늘어난 만큼 차비가 줄긴 했지만, 오일 쉐어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비쌌다. 오일쉐어는 주에 20불인데 우버는 한 번 타는데 16불에서 20불이 들었다. 그것도 우버가 있을 때 얘기고, 없으면 부랴부랴 택시를 예약해야 했고, 택시는 35불 이상이었다. 퇴근 시간에는 우버가 없을 때도 많아서 헌팅을 해야 했다. 콜드룸 이쁜이는 치를 떨며 차가 또 고장 나면 차라리 워홀을 접겠다고 선언했다. 그들이 차 없이 지낸 건 고작 2주 남짓이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시골에서 발이 묶이는 건 도시에서 기동성이 없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제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건 불편한 수준을 넘어서 자유를 박탈당한 듯한 무력감이 들게 했다. 다시 헌팅하던 시절로 돌아가느니 차라리 인도 살이를 참는 게 나을 정도였다.

나단이.jpg 새벽 시간 유일한 우버 기사 나단이. 오일 쉐어가 하도 안 구해져 명함을 챙겨뒀었다. 하지만 나단이의 휴무일을 미리 알기 위한 눈물의 똥꼬쇼는 번번이 실패했다.

크로스핏도 고려해야 했다. 인도 집은 크로스핏까지 50분이 걸려서 도보권에 속하지만, 이사를 가면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두보에서는 50분까지는 도보권으로 통한다.) 물론 인도 집에서도 체육관까지 가는 길이 순탄치는 않았다. 산송장 취급을 하며 얼굴로 파리떼는 달려들고, 차에 치일 위험을 여러 번 감수해야 했으니까. 하지만 크로스핏은 두보에서 유일하게 유의미한 순간이기에 감수할 가치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사가 주는 피로도, 매물 부족, 인스펙션 일정 조율, 최소 거주 기간 등 고려할 게 한 두 개가 아니었다. 심지어 보통 집들의 최소 거주 기간은 두 달인데 탈출까지는 한 달 남았다. 떠나고 싶을 때마다 그 모든 조건들이 나를 주저앉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 부인은 그 어려운 걸 해냈다.


'인스펙션 오니까 머리카락 다 치워놔~'


평소라면 인도가 또 인도했네 하고 넘어갔을 텐데, 그날따라 화가 치솟았다. 하우스메이트들도 다 도망가서 격주로 하던 청소를 매 주 하는데 평일에도 또 하라고? 심지어 지금도 욕실 사용 후에 본인 머리카락은 다 정리하고 있다. 돌아서면 떨어져 있는 게 머리카락인 걸 나보고 어쩌라고? 나는 추가 노동을 할 의무가 전혀 없다. 아니, 논리니 이성이니 다 떠나서, 선의를 베풀고 싶지가 않았다. 인스펙션 시간도 내가 공장에 있을 때라 출근 전에 치워야 하는데, 내가 왜? 전날 욕실 쓰고 머리카락 치웠으면 됐지, 욕실에서 출근 준비하다가 또 떨어지면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지. 그 정신없는 와중에 바닥까지 살피고 가라고? 자기 자식한테나 할 법한 치우라는 잔소리를 돈 내고 사는 세입자한테 한다고? 그것도 세입자 공간에 멋대로 침범해서?


보통은 청결에 민감한 쪽이 나서서 일을 처리하곤 한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 몇 올을 크게 개의치 않았지만 인도 부인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답답한 쪽이 치우면 되는데, 인도 부인은 속이 터져가면서도 손 끝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나를 들들 볶아댔다. 가뜩이나 두보살이가 버거워 기력도 없는데.


여태까지 인스펙션이 계약으로 이어진 적은 없었다. 백날 머리카락 줍고, 생활 흔적 없애서 빈집 행세 해봐라. 이 집에서 강하게 풍기는 인도 바이브를 없애지 않는 이상 세입자는 절대 못 구한다. 처지가 딱하고 궁지에 몰린 사람 아니고서야. 나도 노인의 집에서 쫓겨나서 온 거고, 전에 살던 사람들도 4명이 동시에 이사 올 곳이 여기뿐이라 온 거지. (멀쩡한 집에 빈 방이 여러 개인 경우는 드물다.) 어쨌거나 나는 이미 소임을 다 했다. 정 하고 싶으면 집에서 노는지가 하던가. 어차피 시간도 남아돌면서.


세입자 퇴마 부적.. 아니, 인도 남편에게서 연락이 왔다.

내여자.JPG 박력이 한기주급

'너네가 청소 안 해서 인도부인이 청소했잖아!!! 누가 내 여자 청소하게 하래!!!'


결국 인도 부인이 제 화에 못 이겨 청소기를 돌렸나 보다. 진작 그랬어야지. 혼자서도 잘하면서 왜 안 했대. 이로써 세입자가 구해지지 않는 건 머리카락 때문이 아님이 입증되었다. 마치 귀신 나오는 집으로 소문난 것처럼, 인도 가족이 있는 이상 제정신인 사람은 입주하지 않으리라. (2년간의 호주살이를 통틀어 인도처럼 직접 청소하라고 시킨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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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내를 감추고 대충 맞춰주는 게 이곳에서 버티는 제1원칙이지만, 메스꺼워서 견딜 수 없었다. 그렇게 못마땅하면 인도 남편 네가 대신했어야지. 아가리 사랑꾼 새끼가.. 멋들어지게 청소기를 낚아채 '내가 할게!' 하지는 못 할 망정, '불쌍하고 마음 여린 내 인도 부인...' 하며 쳐다나 보고 있었던 주제에. 한편으로는 웃음이 나기도 했다. 방이 두 개나 비어 있는데 세입자가 통 구해지지 않아 약이 바짝 오른 꼴이라니. 어쩌냐, 나도 한 달 뒤에 도망갈 건데!


<사랑은 하지만 소통은 안 해>

전형적인 콩가루 집에서 자란 나는 역설적이게도 이상적인 가족상을 자주 그렸다. 서로 사랑하는 부부와 그 사랑의 결실로 탄생한 자식, 그들이 이룬 범접할 수 없는 화목이란 울타리... 내게는 무엇보다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인도 가족을 볼 때면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저렇게 이기적이고 돈에 미친 사람들도 사랑을 할 수 있구나. 마음이 인색한 사람들과 달리 그들은 가족 사랑이 넘쳐흘렀다. 그럼에도 타인을 향한 이타심, 존중심, 측은지심은 전무했다.


사랑을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지만, 나는 인도를 통해 새로운 유형이 존재함을 알게 됐다. 아가페 사랑(박애적 사랑)과 에로스 사랑(성애적 사랑), 그리고 '인도식 사랑'(인도식 사랑)... 아가페 사랑은 경이롭고 에로스 사랑은 관능적이지만, 인도식 사랑만큼 다채롭지는 못 했다. 인도식 사랑은 사랑임에도 아름답지는 않아서, 기이하고 역겨우면서도 호기심을 자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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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저주로 하나에서 둘이 된 인간(헤드윅 ost 참조)

결혼 생활이 길어지거나, 자식이 생기면 더는 연인이 아니라는 말도 그들과는 무관했다. 그들은 서로를 '성애적으로' 사랑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둘로 태어난 각자가 하나가 될 수가 없으니까. 소파에서 부둥켜안고 영화를 보는 그들을 '자웅동체' 외에 달리 묘사할 길이 없었다. 유명한 헤드윅 ost 'the origin of love'처럼, 둘은 원래 하나가 아니었을까. 신의 천벌을 받아 둘로 나뉘었지만, 서로를 발견하고 스스로 합일을 택한 저주받은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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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관심 없을 그들의 사랑에 관해 늘어놓은 건, 그들이 그렇게 사랑하는데도 지지리도 소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흔히들 말이 통하지 않으면 사랑에 도달할 수 없다고 한다. 여기서 말이란 '언어'일 수도, 신념이나 관심사 같은 '가치'일 수도 있다. 나는 이에 반절만 동의한다. '말'이 사랑의 필수 조건이라면, 반려동물과 교감하거나, 버려진 아기를 야생동물이 정성껏 기르는 사례는 존재하지 않았을 테니까.


대화는 상대를 이해하기에 용이한 도구지만, 존재하지도 않는 화학 작용을 발생시키지는 못한다. 사랑은 무엇보다 본능적인 영역이다. 조건이 어떻고 성격이 어떻다는 근거가 붙는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도 부부는 참사랑을 하고 있었다. 대화 없이도 사랑이란 단계에 도달했으니 말이다. 그 사랑의 대가는 내가 치르고 있지만. 양쪽에서 번갈아가며 똑같은 잔소리를 하지 않나, 이미 대답했는데도 전달을 안 해서 똑같은 말을 또 하게 하곤 했다. 인도 남편에게서 '내 여자 건드리지 마!'라는 희대의 개소리를 들은 날도 그랬다. 블루투스로 뇌가 동기화라도 된 건지, 공교롭게도 인도 부인도 일침을 날렸다.


'머리 빗고 바닥이랑 욕조에 떨어진 머리카락 좀 주울래? 샤워 타일이랑 세면대는 1주일에 한 번은 꼭 청소하고. 오늘 집에 오면 욕실 좀 제발 치워. 누가 방 보러 오는데 욕실이 저 꼴이면 어떻게 보여주겠어.'


체감상 5,329번은 들은 잔소리를 또 들으니 진절머리가 났다. 논리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장단 맞춰주고 싶지 않았다. 내 몸을 구성하는 피와 뼈, 근육, 세포 하나까지 저항심으로 들끓었다. 나는 말 끝마다 퇴사를 달고 다녀서 '이런 애가 제일 오래 다닌다'의 이런 애를 맡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이사를 가기 힘든 현실적인 이유들이 더는 중요하지 않았다. 여기는 간디도 못 참고 뛰쳐나갈 곳인데.


'어, 그냥 나 토요일에 이사 갈게~!'


'갑자기? 너는 2주 노티스도 모르냐? 누구 멋대로 나간대?'


노티스란 이사 전 집주인에게 미리 알려야 하는 최소한의 기한을 뜻한다. 입주 당시에 인도 남편은 노티스나 최소 거주 기한에 관해 공지하지 않았다. 나라도 확인을 했어야 했지만, 당시에 워낙 경황이 없었던지라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다. 언급한 적도 없는 노티스가 암묵적으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나? 이렇게 모호한 상황에서야말로 논리보다는 '기세'가 승패를 좌우했다. 하지만 보증금을 쥐고 있는 건 인도 쪽이고, 그들이라면 충분히 보증금을 떼먹고 남았다. 이전 세입자에게도 보증금 때문에 꼬투리 잡다가 싸움으로까지 번졌으니까.


'그럼 지금으로부터 딱 2주 뒤에 나갈게! 방세는 보증금으로 까줄래? 나 손 다쳐서 돈이 없거든.'


'내가 빙다리 핫바지로 보이냐. 개수작 부리지 마. 직장에서 다치면 회사가 치료비 전액 부담해 주는 거 다 아는데.'


지독한 것.


'근데 내가 회사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 그냥 보증금 까는 걸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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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안돼~ 돌아가. 보증금이 뭔지 모르나 본데, 이건 네가 이 집을 뜰 때나 받을 수 있는 돈이야. 손가락 썰린 건 내 알바 아니니까, 니 상사랑 얘기해. 거기서 호. 주. 의. 규.칙. 대로 돈 받으라고.'


지독한 것.. 호주의 인도화 주범이면서 호주의 규칙을 운운하다니. 그렇게 규칙 좋아하는 양반이 씨씨티비로 감시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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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보증금으로 집세를 내서 떼 먹힐 보증금을 없애려는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그날 저녁 부엌에서 인도 부인과 마주쳤을 때, 붕대를 감싼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표면적 이유는 진짜 다쳤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지만, 진짜 이유는 그냥 욕하고 싶었다. 안경을 추켜올리는 척 뻐큐를 날리는 것처럼, 고의가 아닌 척 엿 날리는 재미가 쏠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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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뜬금없이 인도 남편에게서 당장 나가도 좋다는 연락이 왔다. 호주사람도 아닌 주제에 호주의 규칙 운운하며 가르쳐대더니... 내 수입이 끊기면 집세를 밀리기라고 할까 봐 그런 거겠지. 차라리 잘 됐다. 평일에 집 알아보고, 토요일에 바로 나가야겠다. 공급이 턱 없이 부족해 쉽지는 않겠지만 설사 길거리에 나앉는다고 해도 인도 집보다 나쁘진 않겠지.


한 시간 뒤에 인도 부인에게서 문자가 왔다.


'너 이사 언제가?'


'토요일 아침에.'


'이번 주 토요일?'


'어. 니 남편이 그때 나가래서. 8시에서 8시 반 사이에 나가려고.'


'좋아, 제발 방 좀 치우고, 욕실이랑 냉장고도 치워. 침구도 빨래도 잊지 말고. 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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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부인과 대화를 마무리한 지 두 시간이 지났을까, 다시 인도 남편에게서 연락이 왔다.


'너 내일 나가, 아니면 토요일에 나가? 그리고 시간은? 저번에 말했던 바닥에 까만 자국 지웠지? 안 했으면 하고. 안 그러면 보증금에서 깔 거니까. 방 똑바로 치우고, 청소기 돌리고, 변기통, 욕실, 냉장고도 싹 다 치워놔. 보증금은 다 확인해야지 줄 거니까. 수고.'


신종 괴롭힘인가? 마치 싸운 친구 사이에 껴서 비둘기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A가 한 말을 B도 같이 들었건만 내입을 통해 '쟤가 너보고 이렇게 전해주래.'라고 옮기고, B가 한 말을 A도 같이 들었건만 '얘는 네가 먼저 그랬다고 전해주래.'라고 옮기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둘이 사이도 좋으면서 왜 직접 얘기를 안 하는데! 똑같은 말을 몇 번을 하게 하는 거야. 나는 이를 악 물고 타자를 쳤다.


'이미 인도 부인한테 말했는데ㅋ. 청소 싹 해두고 토요일에 8시쯤에 보여주겠다고.'


'오케이. 올 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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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의 뜻이 언제 '나만'으로 바뀌었냐. 나는 하나도 안 좋아. 너만 좋은 거지. 간디가 여기 살았으면 너한테 죽빵을 날렸을 거야. 나한테는 인도 부부, 너네가 내 영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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