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 편
<왜 미국 서부인가?>
4년 전 뉴욕 여행에서 나는 미국 서부 여행에 대한 꿈을 키웠다. 같은 숙소에 묵던 언니가 라스베가스의 '매직 마이크'라는 공연을 본 이야기를 해줬기 때문이다. 자그만 민박에 옹기종기 모여 남성 성 상품화의 절경인 그 공연을 보던 우리는 참으로 행복했었다. 당시 나는 문란해지리라 결심하고 뉴욕행 비행기에 올랐지만, 내 안의 유교걸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술집에서 외국인이 말을 걸자마자 '나 집에 가야 돼'를 시전 했으며, 클래식 공연 바로 옆 자리에 앉은 한국인이 다가왔을 때 한국말도 제대로 못 함으로써 그를 퇴치했었다. 내가 묵었던 숙소는 수녀원과 다름이 없었고, 우리는 누구라도 문란해지기를 응원했지만 모두들 꼬박꼬박 숙소로 복귀했었다. 우리는 서로를 '수녀님'이라 불렀으며, 언제나 5시 전에 복귀하던 분에게는 '원장 수녀님'의 칭호가 내려졌다. 당시의 대화가 가끔 아련하게 떠오른다.
"그분은 아직 안 오셨나요?"
"아~ 원장 수녀님은 주무세요."
"네? 지금 6신데요?"
"호호호호호호."
운명적인 사랑을 꿈꾸며 떠났던 여행은 수도원 기행과 다름없었지만 무척 즐거웠다. 다음에는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오자! 결심했지만 코로나가 창궐했고, 여행은 기약 없이 미뤄졌다. 물론 공부도 안 했다.
<미국병 완치는 미국에 가야 한다>
코시국 내내 나는 미국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았다. 그래서 올 4월에 퇴사하면 바로 미국 여행을 가려고 했다. 나는 조금만 참자고 되뇌며 도살장에 끌려가듯이 꾸역꾸역 회사를 다녔다. 그러던 어느 새벽,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얼마 되지 않는 퇴직금 때문에 현재를 불행에 처박는 건 스스로를 학대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나는 불행했고, 자주 불안에 시달렸다. 재난이 일어나 회사에 갇히거나, 사고가 나서 죽게 된다면? 결국 맞이하지도 못할 미래를 위해 무의미하게 현재를 희생한 셈이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확률이 크다는 걸 안다. 몇 달치 월급과 퇴직금까지 챙겨서 여행에 가는 게 더 이익이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나는 당장 행복해지고 싶었다. 그래서 다음 날 바로 사직서를 작성했다. 퇴사 후 바로 미국행 비행기에 오를 것이다.
<여행 준비 사항>
☑이스타 비자 발급
☑항공권 구매
☑여행자 보험 가입
☑유심 구매
☑LA 숙소 예매
☑디즈니랜드 예매
☑유니버셜 스튜디오 예매
□북창동 순두부 먹기
□존 맥래플린 LA 공연 보기(ㅠ..)
□게티센터/그리니티 천문대/해변/시청 그 외 등등 가기
☑LA➡라스베가스 플릭스 버스 예매
☑라스베가스 호텔 예매
☑그랜드캐년 밤 투어 예매(인 앤 아웃 버거 먹기-감튀는 애니멀 스타일로 변경)
☑매직마이크 예매
□인터넷에서 알게 된 현지인 현실에서 만나기(베가스 보이)
□바그다드 카페 가기/사막 구경
□호텔 투어
<P의 여행 준비-예약 편>
우선 4월에 예약해 둔 숙소와 항공권 등을 취소해야 했다. 평소에는 미룰 수 있는 한도까지 미적댔으면서 그때는 왜 그리 부지런을 떨었는지... 수수료를 날려가며 여행 준비를 시작한 P는 두 번째 예매도 대충 후루룩 해치웠다. 그러고 나서 불현듯 2월에 LA에서 존 맥래플린이 공연을 한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내가 좋아하는 유일한 가수, 그 목소리와 그 얼굴로 아직도 안 뜬 게 놀라운 남자, 이제는 너무 늙어버린 두 아이의 아버지, 국내 인지도가 없어 내한할 확률 0%에 수렴하는 존 맥래플린! 부랴부랴 LA 공연일을 찾아보니 이미 내가 귀국한 시점이었다. 나는 바보야. 따흐흐흑...ㅠㅠㅠㅠㅠ 다시 표를 바꿀까도 생각해 봤지만 더 이상의 수수료는 용납할 수 없기에 눈물을 머금고 포기해야 했다. 오늘의 교훈=P로 살려면 돈이 많아야 한다.
이스타 비자, 숙소, 항공권 같은 필수적인 것들은 미리 예약을 해두었다. 디즈니랜드와 유니버셜은 혼자 가고 싶지 않기에 동행을 구하고 표를 사려고 했다. 그런데 동행 구하기보다 일정 맞추기가 더 힘들었다. 서로 원하는 바들이 다르고(놀이기구를 몇 개를 탈지, 디즈니랜드와 어드밴처 둘 다 이용 가능한 표를 끊을지, 여행에서 어떤 걸 중시하는지 등) LA체류 기간이 다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뭐, 안 되면 혼자 넓은 테마파크를 망령처럼 떠다니는 수밖에 없겠죠...
매직마이크는 마이리얼트립을 통해 예약을 했는데 그 시간에 공연이 없다고 미국 업체에서 메일이 왔다. 변경 요청을 했지만 답이 없어서 취소 후 다시 샀다. 그런데 갑자기 표가 두 장이 날아왔다. 이 놈들이 내 메일을 보고 예약 시간을 변경한 뒤에 알려주지 않았던 것이다. 졸지에 같은 날 같은 시간표가 두 장이나 생겨버린 나. 육신은 한 개이기에 취소를 요청했지만, 안 된다는 답이 돌아왔다.^^ 일처리 한 번 대단하네... 결국 마이리얼 트립을 통해 문의하니 미국 업체로부터 '원래는 안 되는 건데 알아봐 줄게'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ㅗ.. 결국 환불은 받았지만 청구 할인이 적용된 첫 결제를 취소해서 나는 마이리얼트립에 다시 연락을 해야 했다. 고객 과실이 아니니 두 번째 결제 건에 청구할인을 적용해 주겠다는 답변을 받았으나 며칠 뒤 두 번째 결제건도 취소가 됐다. ^^...... 나는 살면서 안 되는 일을 어떻게든 되게 했을 때 안 하느니만 못한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안 되는 일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늘이 내가 멈출 수 있게 기회를 준 것이라고 말이다. 매직마이크가 진정 볼 가치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강하게 들었다. 그러나 매직마이크는 오직 런던과 베가스에서만 하는 공연이고 두툼 섹시 핫가이 들을 떼거지로 볼 몇 안 되는 기회라고 모두들 내게 포기하지 말라는 조언을 했다. 살인 세 번 대신 참을 인을 되뇌며... 다시 마이리얼 트립과 연락을 수 차례 하고, 메일로 카드 번호를 불러주고 통화도 몇 번을 더 하고서야 청구할인된 금액으로 예약을 다시 할 수 있었다. 매직마이크고 나발이고 다 후려쳐버리고 싶었지만 몇 주에 걸쳐 무의미한 소통을 계속 한 터라 이번만큼은 하늘이 나를 만류한 게 아니길 진심으로 바랐다.
<예약이 불가능한 것들에 대하여>
이번 여행에서 매직 마이크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바로 남편 찾기다(????) 아니, '인터넷에서 알게 된 현지인(베가스 보이) 실제로 만나기'다. 작년 가을, 심심해서 데이팅 앱을 깔았다. 설치할 때만 해도 어플로 누군가를 만날 생각은 없었는데 일단 현질을 했다(????) 유료 사용자는 위치를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언제나 여행지에서 운명적인 사랑을 꿈꾼다. 매번 산산이 부서졌지만...) 미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가뭄에 콩 나듯 있는 미남을 찾아냈다. 매치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미국에 있지를 않으니 대화가 금방 끊겼다. 비슷비슷한 대화를 반복하다 보니 '어차피 흐지부지될 대화 해서 뭐 하나?' 싶었다. 그래서 베가스 보이와 매치가 됐을 때도 그다지 감흥이 없었다. 사진 개수가 적어 실물을 판독해 내기 쉽지 않아 더 그랬다. 하지만 미남일 일말의 확률이라도 있다면 놓쳐서는 안 되기에 대화를 했다. 베가스 보이에게서 대뜸 약어와 짧은 영어 답변이 돌아왔다. 각각의 단어 뜻은 아는데 합쳤을 때 무슨 뜻인지 전혀 유추되지 않았다. 마치 '사장ㄴ 개쩌름 ㄹㅈㄷ'라는 문장을 본 외국인이 된 기분이었다. 어찌어찌 대답을 하니 '너 지금 한국이야?'라는 물음이 돌아왔고, 나는 답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쩌다가 만나기로 했느냐... 앞서 말했듯이 미남은 희귀하기에 꺼진 미남도 다시 봐야 한다. 베가스 보이는 딱히 말이 잘 통하지는 않았다. 언어의 한계도 있었지만, 딱히 잘 맞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말이 잘 통하는 추남보다는 말 안 통하는 미남이 좋기에 개저씨처럼 질척거렸다. 사실 나는 베가스 보이보다 나이가 꽤 많았다. 그렇다, 베가스 가이가 아닌 베가스 보이인 이유가 여기에서 드러난다. 그는 21세기에 태어났고, 나는....^^.... 스스로가 20살 신입생에게 껄떡대는 복학생 내지는 변태 부장 같다는 느낌이 들어 질척임을 멈췄다. 그러다 2023년이 코 앞에 다가온 어느 시점, 나는 다시 베가스 보이에게 연락을 했다. 그 뒤로 계속 대화를 주고받고 있다. 베가스 보이는 나를 바그다드 카페까지 태워주기로 했고, 라스베가스 투어도 도와주기로 했다. 드디어 나에게도 잘생긴 애와 같은 공간에서 숨 쉬는 날이 오는 건가? 두근...!
만나기 전에 할 일이 많았다. 내내 걱정거리였던 영어, 딱히 공부 안 할 거란 거 알기에...^^ 그냥 마음을 편히 갖기로 했다. 그리고 거지존 머리를 수습하기 위해 미용실을 가기로 했다. 필름 카메라용 필름도 구매했고, 새 속옷도 구매(??????)했다. 그리고 운동과 식이조절을 하고 있다.
이 만남의 결말이 무엇일지는 생각하지 않고 있다. 일장춘몽이 될지, 지속되는 인연이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쪽이던 어떠리. 지속되지 않더라도 여행을 설레게 하는 요소니까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아메리칸 영 보이와의 결말은 2월 중순에 공개됩니다. 결말을 모르니 스포를 할 수가 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