갠지스 모니카 원정대
<미국 여행 4일 차:갠지스 모니카/Salt straw/Teddys red taco/베니스 비치/스투시 LA점/더그로브몰/파머스마켓/더 뽕 중국집>
<갠지스 모니카 원정대의 서막>
조식 시간, 캐나다 워홀러와 나란히 앉아 살면서 본 몇 안되는 잘생긴 남자 얘기를 했다. 4년 전이지만 잊혀지지 않는 두 얼굴을 회상하며 나는 열변을 토했다. '뉴욕은 엉망이니 하버드에 가라! 하바드는 얼굴 보고 뽑는다!' 그러다 옆에 앉은 새로 온 남자 두 명과 대화를 하게 됐다. 친구인 줄 알았던 그들은 어제 처음 본 사이라고 했다. 한 명은 아무런 계획이 없는 P 중 P였고(스투시), 나머지 한 명은 계획형(체대생)이었다. 스투시는 제법 차분하게 말하는 내게 진실된 화법을 구사했다.
"잘생긴 남자 얘기할 때랑 굉장히 다르시네요."
그는 우리에게 이상형을 물었고 나는 지진희, 캐나다 워홀러는 박재범을 꼽았다.
"아저씨랑 양아치네..."
그의 뻘하게 터지는 화법은 탁재훈을 연상케 했다. 은은하게 광기 어린 큰 눈까지도. 옆에 있는 체대생은 상대적으로 정상으로 보였지만 이 민박에 정상은 없음을 알았기에 나는 즉흥 제안을 시도했다.
"오늘 뭐하는데요?"
"이 친구는 J라서 모든 일정이 다 짜져있는데 오늘만 비어있고, 저는 원래 계획 안 해요."
"그럼 산타 모니카 가실래요?"
"좋아요."
그렇게 최종적으로 결성된 갠지스 모니카 원정대, 위대한.. 아니, 그냥 서막이 올랐다.
<바야흐로 전국민 유튜버 시대>
우리는 민박 대문 앞에서 우버를 기다렸다. 스투시의 손에 조그만 카메라가 들려 있었다.
"뭐야, 당신 유튜버에요?"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기록용이에요."
나는 캐나다 워홀러를 가리키며 '이 분도 유튜버에요.'라고 소개했다. 유튜버로서 꽤나 야망 있던 캐나다 워홀러는 아예 카메라를 켜지도 않고 있었다. 참고로 나도 (망한) 유튜버 출신으로, 날로 먹는 인생을 위해 몇 년 전 좆소 사원 브이로그 채널을 운영한 적 있다. 바야흐로 전국민이 유튜버인 시대이기에.
앞 자리에는 체대생이 탔고, 뒷 자리에는 나, 캐나다 워홀러, 스투시 순으로 앉았다. 캐나다 워홀러는 다리 밑에 캐리어를 뒀기에 한쪽 다리를 접고 있어야 했다. 스투시는 자연스럽게 MIC를 쥔 탁재훈처럼 진행을 하기 시작했다.
"전에 누가 UCLA가 뭐의 약자인지 아냐길래 유니버시티.. 캘리포니아... 엘에이 아냐? 했는데 맞더라.ㅋㅋㅋ"
"그럼 MIT는?"
"메사추세츠, 테크놀로지."
"아이는요?"
"나! 내가 메사추세츠의 기술이다!"
광기로 번득이는 왕눈으로 내뱉는 헛소리에 우리는 뻘하게 터졌다. 그런데 아까부터 계속 껐다 켜기를 반복하던 스투시의 카메라는 때마침 꺼져 있었다. 물론 캐나다 워홀러의 카메라도 마찬가지였다.
"이걸 찍었어야지. 유튜번데 왜 안 찍냐고요."
"그러니까. 근데 다시 연기하면 이 느낌 안 나."
와중에 캐나다 워홀러는 접은 다리가 아프다며 고통을 호소했다. 하지만 공간 협소로 혼자서는 다리를 바꿀 수 없었다. 스투시는 매너리즘에 빠진 놀이공원 아르바이트생처럼 대신 캐나다 워홀러의 다리 방향을 바꿔줘야 했다.
대부분의 시시껄렁한 이야기와 상황들은 영상에 남는 대신 기억 속에서 휘발되었다. 하지만 가는 내내 배가 아플만큼 웃었던 것만큼은 선명했다.
<인생 영화 세 편이면 그 사람에 대해 알 수 있다>
스투시는 인생 영화 세 편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면서 서로의 인생 영화를 말해보자고 했다. 캐나다 워홀러는 노트북과 해리포터, 나는 바드카드 카페와 남자사용 설명서를 꼽았다. 대부분 잘 모르는 영화인데 스투시는 두 영화 다 알고 있었다. 알고보니 그는 영화 전공이었다. 그는 웬만한 영화는 다 안다며 나머지 하나가 뭐냐고 물었다. 주저 끝에 나는 '지옥행 특급 택시'라고 말했다. 제목부터 풍기는 쌈마이 감성에 모두 (비)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나는 지옥행 특급 택시에서 이상한 사람임이 들통.. 아니, 낙인이 찍혔다.
<고도로 발달한 갠지스 모니카는 광안리와 다름 없다>
샌디에고에서 바닷가라고 다 춥지 않다는 걸 체득했으면서 스타킹에 자켓까지 챙겼다. 그런데 우버에서 내리고 무언가 잊은 것 같아 곰곰히 생각해보니 자켓이 없었다. 처음부터 안 챙겼나, 아니면 우버에 두고 내렸나? 숙소에 돌아가기 전까지는 알 수 없기에 애써 찜찜함을 지우고 멀리 보이는 갠지스 모니카로 향했다.
예상대로 부둣가를 걷는데 여기저기서 이상한 뽕끼 가득한 노래가 들렸다. 보기도 전에 비하했던 것처럼 갠지스같은 똥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푸르름에 감탄할 정도는 아니었다. 부둣가는 탑골 같았고 바다는 광안리 같았다. 물론 광안대교 없는 갠지스 모니카쪽이 더 후졌다. 우리는 감흥 없이 사진을 찍으며 '광안리네..'를 번갈아가며 중얼댔다. 그때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어제 샌디에고 투어 가이드였던 알렉스였다. LA 참 좁다, 좁아.
<너는 내게 모욕감을 줬어>
우리는 베니스 비치 방향으로 쭉 걸었다. 도중에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렸다 베니스 비치에 갈 계획이었다. 햇빛이 점점 강해졌다. 니트 상의는 통풍도 안 되고, 스타킹은 갑갑해서 박박 찢고 싶었다. 수중에 자켓이 없어서 천만 다행이다 싶을 정도로 더웠다. 아이스크림을 국밥 때리듯이 해치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는 길에 그네와 밧줄이 있길래 우리는 잠시 멈춰서 그네를 타고 밧줄을 기어 올랐다. 가뿐하게 줄을 타는 스투시는 흡사 코코넛을 따러 가는 원숭이 같았다.
갠지스 모니카와 멀어질 수록 분위기가 달라졌다. 울창한 야자수, 하나 둘 출몰하는 잘생기고 몸 좋은 남자들, 무수한 상탈남들... 자꾸만 눈이 돌아갔다. 이래서 다들 베니스 비치, 베니스 비치 한 거구나... 캐나다 워홀러의 고개가 수시로 돌아갔다. 장바구니에 담듯이 반사적으로 외쳤다.
"오, 내 남친!"
"오, 내거!"
그리고 털보만 지나가면 내게 다가와 은밀히 속삭였다.
"언니, 저 남자..."
"닥쳐."
놀리듯이 '언니 남친ㅋㅋㅋㅋ' 하며 웃었더라면 아무렇지 않았을텐데, 캐나다 워홀러는 몹시 진지했다. 내 눈을 어디까지 낮춰 보는가에 대한 회의감, 그 뒤에 찾아온 성찰의 시간. 그간 사람들은 내가 잘생겼다한 남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맹탕' '돌아서면 기억조차 안 나는 외국인 1,2,3' 'NPC' '자국 여자들한테 버려져서 아시아 순방도는 옐로피버' 결말은 한결같이 '제발 확인받고 좋아해라'는 당부였다. 아무래도 이대로 수녀원으로 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알을 깨면 죽는다고 생각했던 날들>
아이스크림 가게에 가는 동안 스투시의 인생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혼자 힘으로 장기 세계 여행을 했고 뒤늦게 생긴 영화에 대한 흥미에 영화과에 입학했으며, 그간의 경험을 글로 써서 작가가 됐다. 마치 '잉여들의 히치하이킹'을 처음 봤을 때와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 삶을 살 수도 있구나, 무모하지만 용감하게.
내 지난 인생은 은닉의 연속이었다. 티끌만큼의 상처조차 두려워 자꾸만 안으로 숨어들었다. 워홀을 가고 싶었지만 '어차피 영어도 못 하는데', '인종차별 당할 게 뻔한데 굳이?' 라며 스스로를 속였고, 혼자 해외 여행은 돈, 영어, 인종차별, 스스로에 대한 불신 때문에 27살에야 처음 갔다. 사실 두려워서 외면하는 거란 걸 알았지만 맞닥들이기 두려워 욕망으로부터 눈 감았다.
15년도 더 된 내 꿈은 작가가 되는 것이다. 20대 중반까지 신춘문예에 도전했고, 그 이후로도 계속 글을 써왔다. 나는 내가 누구에게도 읽히지 않을 글을 쓰며 영원히 오지 않을 '언젠가'를 기다리다가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 소설은 순문학도, 장르 문학도 아니었으니까. 그렇다고 먹힐만한 글을 쓰기는 싫었고, 자비 출판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 외에도 안 되는 이유들을 대자면 끝이 없었다. 스스로를 혐오하는 사람처럼 내 발목을 잡고 용기를 꺾는 건 언제나 나 자신이었다.
그런데 스투시는 자비 출판을 했고, 독립 서점에 발품을 팔아 책을 납품했다. 나는 누군가 내 글을 발견해 공식적인 절차를 밟아야만 작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그는 내가 가짜라고 생각했던 방식으로 작가가 됐다. 독자가 있고, 수입이 있는 진짜 작가.
뭐든 할 수 있고, 뭐든 될 수 있는 세상에서 나는 알에 갇혀 있었구나. 그곳이 요새라고 굳게 믿으며. 세상과의 기싸움에 번번히 나가 떨어지면서도 삶이 왜 이렇게 피곤한지 알지 못한 채. 조금만 더 용감했더라면, 조금 더 나를 믿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늦었지만 나는 알을 깨고 나와 머리를 내밀고 싶었다. 그렇게 세상에서 첫 숨을 내쉬고 싶었다.
<순간에 머물지라도 찬란히 빛나는>
드디어 도착한 아이스크림 가게, 나는 미리 정해둔 허니라벤더와 배+블루치즈를 주문했다. 내가 아이스크림을 해치우는 동안 다른 원정대원들은 시식을 하고 있었다. 라벤더를 맛본 그들은 내게 '왜 로션을 먹고 있냐'고 물었다.
빠른 속도로 아이스크림을 해치우고 베니스 비치로 향하는데 캐나다 워홀러가 공항에 갈 시간이 됐다. 우리는 벤치에 앉아 함께 우버를 기다렸다. 따가운 햇볕 아래 레모나를 나눠 먹으며. 곧이어 우버가 왔고 캐나다 워홀러는 웃으며 떠났다. 그 모습은 샛노란 레모나 알갱이같기도 했고 따사로운 햇빛 조각 같기도 했다. 풍경과 어우러진 미소가 참 예뻐서 한동안 잊혀지지 않을 것 같았다. 언젠가 또 볼 수 있을까? 아마 그러기는 힘들겠지. 습관처럼 든 인연이 지속될 수 있는가에 대한 생각을 애써 지웠다. 순간에 머문 인연일지라도 순간만큼은 찬란했으니까 괜찮았다. 삶이 다채로울 수 있는 건 내 인생 곳곳에 존재하는 그들 덕분이기에.
<고수는 뺐지만 대마는 곁들인>
어느새 조식이 다 꺼졌는지 허기가 졌다. 우리는 베니스 비치 코앞에 있는 'Teddys red taco' 타코집에 들렀다. 고수를 뺀 디럭스 플레이트와 캔 콜라 3개를 주문하고 테라스 자리에 앉았다. 사방에서 대마 냄새가 진동했다. 우리 바로 뒤에서도 누군가 가습기처럼 대마 연기를 계속 뿜어댔다.
우리는 타코를 먹으며 앞으로의 여행 계획에 대해 얘기했다. 체대생은 2주간 LA를 구석구석 볼 예정이었고, 라스베가스에서 넘어온 스투시는 LA가 여행의 종착지라고 했다. 내가 LA에서 베가스로 넘어가 5일을 머물 거라고 하자 그들은 1차로 기겁했다. 이틀이면 충분한 곳에서 5일이나 뭘 할거냐면서.
사실 캐년 투어, 매직 마이크를 빼고는 아무런 계획이 없었다. 애 아부지가 속된 말로 나가리된 상황에서 베가스는 내 마음 속에서도 '나가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스투시가 물었다.
"혹시 부자세요?"
"거진데요."
"5일이면 호텔 리조트피도 꽤 나올 텐데 감당할 수 있어요?"
"리조트피가 뭔데요?"
호텔 예약을 한 건 내가 아니라 캐년 투어 여행사였다. 가격이 가장 싸서 엑스칼리버를 예약했다고 하자 여행사는 저렴한 가격에 위치가 좋은 호텔을 대신 예매해주겠다고 제안했었다. 아고다에 뜬 가격의 절반 가격이니 덥석 물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 사람 진짜 아무 것도 모르네. 체크아웃 할때 내야되는 돈인데 결제비용의 절반 정도 나올걸요."
"그거 알았으면 호텔 안 묵었죠. 노잼 도시에서 5일이나!"
"그 비싼 돈 주고 노잼 도시에 5일이나 묵는다니까 당연히 부자인줄 알았죠."
부자가 아닌 나는 부랴부랴 메일을 뒤졌다. 예약증에는 '리조트피 포함 가격'이라고 적혀 있었다. 방금 전까지 똥줄이 타들어가던 나는 그제서야 함박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그 가격에 그 위치? 역시 게으름뱅이에게는 얼레벌레 행운이 따른다니까.
<눈이 멀 것 같은 베니스 비치>
갠지스 모니카에서 동태눈으로 쓱 둘러보고 자리를 떴던 것과 달리 베니스 비치에서는 초입부터 감탄이 나왔다. 이게 미국 바다다! 이게 마이애미다!(마이애미 안 가봄) 젊은이들이 많았고 힙한 분위기였으며 규모도 더 컸다.
우리는 해변에 나란히 앉아서 바다를 봤다. 반짝이는 물결 위로 상체만 내놓은 아저씨가 원반을 던지면 개가 바다로 뛰어들어가 물어오기를 반복했다. 아름다웠다. 그런데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돋보기 아래 놓인 개미처럼 나를 불태워 죽일 기세로 햇빛이 내리쬐었다. 노을지는 풍경을 보고 싶었지만 이대로 있다가는 실명할 것 같았다. 시야가 허옇게 물어갔다. 그 와중에 까만 스타킹은 너무도 선명했다. 선글라스나 들고 오지 스타킹은 왜 싸들고 왔는가, 앞으로 남은 여정을 선글라스 없이 버틸 수 있을까? 나는 LA의 햇빛을 우습게 본 댓가를 치루었다.
<살다 살다 처음 듣는 그 이름, 스투시>
우버가 잡히지 않아 버스를 타기로 했다. 그래서 다음 목적지인 스투시 매장과 가장 가까운 정류장에 내려 다시 우버를 부르기로 했다. 잠시간 우버 안 잡히면 어떡하지? 걱정했지만 셋다 '몰라' 라며 남일처럼 넘겼다.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데 우리 앞에 걷던 흑인 아저씨가 갑자기 벽에 가 붙었다. 잠시 멈춰있던 아저씨는 고개를 돌려 우리에게 손을 흔들어보였다. 스투시는 내게 방금 저 아저씨가 노상방뇨를 했다고 알려주었다.
"어떻게 알아?"
"봤으니까."
묻지 않아도 무엇을 봤는지 알 수 있었다. 벽을 따라 강 줄기가 길게 나 있었기 때문이다.
"빨리 알려줬어야지. 나도 보게!"
스투시는 이 새끼는 뭐지, 라는 표정으로 나를 봤다.
치안 때문에 우버만 타리라 결심했는데 버스를 타다니. 첫날부터 계획대로 펼쳐진 게 하나도 없었지만 그 어그러짐들이 꽤나 즐거웠다. 게다가 버스비는 단돈 1.75불로 우버보다 19.5배 저렴했다. 창조경제였다.
우버를 타면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은 "웨어 아 유 프롬?"이다. 그 다음으로는 "노쓰? 사우쓰?"가 있다. 우리가 남한에서 왔다고 하자 기사는 "한국 차 좋아요"라고 했다. 그의 차는 도요타였다.
모순으로 가득한 그의 차에서 '갠지스 모니카 원정대' 대화방이 만들어졌다. 갠지스강만 보고 떠난 캐나다 워홀러는 비행기가 연착돼 LA 공항에 갇혀있었다. 내가 베가스는 매직 마이크지! 라고 얘기해도 귓등으로도 안 듣던 그는 홧김에 매직 마이크를 예약했다고 했다.
(찐)스투시 매장은 여타의 편집샵처럼 제품이 몇 개 없었다. 스투시는 티셔츠를 정신없이 뒤적였다. 별로 살만한 거 없어보인다는 말에 스투시는 찐투시가 얼마나 유명하고 인기가 많은지 아냐며 찐투시 대변인처럼 열변을 토했다. 믿어지지 않았지만 터무니 없이 비싼 가격이 그의 말이 사실임을 입증했다. 하지만 나와 체대생은 브랜드에 그다지 관심이 없어서 고르는 옷마다 족족 '별론데요?' '그걸요?' '그 돈 주고요?' '왜요?'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스투시는 '찐투시의 가치를 모르는 바보들 같으니라고!'라며 역정을 냈다. 결국 스투시는 우리가 개중 가장 낫다고 한 초록색 로고가 박힌 티셔츠 하나를 샀다.
다음 목적지로 가는 길, 낮은 건물들 뒤로 거의 저문 석양이 깔려 있었다. 우리는 하늘이 까맣게 물들도록 소비의 가치에 대해 논했다. 스투시는 찐투시가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브랜드이기에 절대 낭비가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실용주의자인 나와 체대생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빨면 목 다 늘어나는데?"
"그럼 티셔츠를 얼마 주고 사야되는데?"
"이만원?"
스투시는 '이만원? 이만워언?'하며 억양으로 빈정댔다. 그리고는 체대생의 바지를 가리켰다.
"이것도 비싼 바진데 이건 되고?"
"바지는 세탁해도 변형 안 되고, 오래 입으니까 티셔츠보다는 낫지?"
스투시는 내게 대체 돈을 어디에 쓰냐며 분통을 터트렸다. 나는 배달 음식이나 세일 제품 쟁이는 것 외에는 돈을 잘 쓰지 않았다. 물욕이 없는 편이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돈을 투자하는 곳이 있다면 개들에게다. 병원비나 정기적으로 들어가는 약값 같은 것들.
"아, 개 목줄 17만원짜리 산 적 있어요."
"모순 쩐다.."
"근데 목줄은 안전이랑 관련 있는 거니까."
"말이 안 통하네.."
그렇게 찐투시 논쟁 2차전이 막을 내렸다.
밤의 더 그로브 몰은 들를만한 가치가 있었다. 어두운 하늘에 뿌려지는 분수, 고풍스러운 건물들은 꽤나 낭만적이었다.
스투시는 가족 선물을 사야한다며 코치 매장에 들렀다. 점원은 친절하게 여러 가방을 추천했다. 하지만 우리 중 코치의 가치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브랜드의 가치에 대해 잘 아는 전전 직장 동료 정성호씨에게 연락을 했다. 숨막히는 고인물 회사에 다니는 성호씨로부터 바로 답장이 왔다. 한국은 근무 시간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가로막는 건 느려 터진 미국 인터넷 뿐이었다. 사진이 보내지기까지는 억겁의 세월이 걸렸기에 우리는 빈 손으로 매장을 나왔다.
<짬뽕집에서 뒷걸음질 치면 잡히는 것>
민박 사장님이 추천해준 짬뽕집, 차돌 짬뽕 세 개와 탕수육을 시켰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탕수육 하나에 메인 메뉴는 인원 수보다 하나 적게 시켜서 먹고 있었다. 양이 많은데다 너무 매워 속이 쓰려 반쯤 먹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러다 실수로 젓가락을 쳐서 허공에 튀어올랐다. 젓가락은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고 단무지 그릇에 오징어가 안착했다.
바로 윗층 카페에서 아이스 커피를 포장해 숙소까지 걸어갔다. LA 치안 걱정한 사람이 맞나 무색했다. 쌀쌀해진 밤공기에 찬 음료까지 마시니 오한이 들었다. 하루 종일 더위에 고통 받다가 이제는 추위에 고통 받았다. 대체 자켓은 어디에 두고 온 걸까?
가는 내내 존 맥래플린의 노래를 들었다. 한국에 돌아가고 일주일 뒤에 LA에서 열리는 그의 콘서트, 비행기 표를 예매하고 나서 그 사실을 떠올리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 콘서트에 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한 번 취소했다가 다시 산 표였기에 깔끔하게 포기했었다. 더 이상의 지출을 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런데 이제 와서? 표를 변경한다고 해도 베가스 아웃은 바꿀 수가 없어서 다시 LA로 돌아왔다가 베가스로 와야 했다. 마음이 원하는 것과 합리적인 것 사이의 간극이 컸다. 그런데도 자꾸만 번복하고 싶었다.
<아직 끝나지 않은 뉴욕 여행을 마무리짓기 위해>
거실에는 내가 두고 간 자켓만이 의자에 얌전히 걸려 있었다. 잘 준비를 마친 나는 꽉 찬 하루의 마무리를 위해 1층으로 내려갔다. 네다섯명의 사람들이 거실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중 샌디에고 투어를 같이 갔던 가이드도 있었다. 나는 그에게 장기 여행을 하면 만남과 이별이 무상하지 않느냐 물었다. 절대적으로도 나와 상대적으로도 어린 나이의 가이드의 대답은 간단했다. 인연을 이어가려고 노력하는 편이라 먼저 만나자고 연락도 스스럼 없이 하지만,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다면 그냥 받아들인다고.
나는 만남에 앞서 이별을 두려워했고, 행복한 순간에도 다가올 슬픔에 몰두했다. 인연에는 필연적으로 이별에 따르는 법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미 단절된 인연에게 연락을 하는 건 무척 부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뉴욕에서 같이 동행한 사람들의 필름 사진도 아직 전해주지 못했다. 인화를 하기까지 2년이 걸렸고, 이제와 연락하면 이상하겠지 싶어서 접었다. 또 다시 2년이 지났고, 이제는 4년이나 지나 더 연락을 할 수 없었다.
가이드는 절대 싫어할 리 없으니 일단 연락 해보라고 했다. 싫다고하면 어쩔 수 없지만 그건 연락하기 전까지는 절대 알 수 없다면서. 심장이 마구 뛰었고, 도망치고만 싶었다. 하지만 6년만에 연락하는 것보다는 4년만에 연락하는 게 낫기에 떨리는 마음으로 메세지를 보냈다. 내 뉴욕 여행을 함께해주었던 그들의 순간을 담은 사진과 함께.
내게 라스베가스에서 매직 마이크 보기라는 버킷 리스트를 만들어준 언니는 4년만의 연락에도 다정하게 맞아주었다.'누군가의 기억 속에 멋진 언니로 남아있다니 기분이 좋다'면서.
20대 초반 직장 동료와 여행을 왔던 친구도 반가워하며 한국에 돌아오면 만나자고 했다. 20대 초반 친구의 연락처가 없어 대신 전달해달라는 부탁도 흔쾌히 들어주었다. 퇴사를 해서 연락을 안 한지 꽤 됐는데 이 계기로 연락도 하고 그때 기억도 떠올릴 수 있으니 잘 됐다면서.
부자연스러우니까, 불쾌해할 테니까, 괜히 나서봤자 꼴만 우스워지니까 상처받을 건덕지를 만들지 말자고 숨어들었던 게 우스울 정도로 그들은 다정했다. 늘 시절 인연을 되뇌었으면서 영원만이 유의미한 건 아님을 잊고 지냈었다. 순간일지라도 함께여서 즐거웠다면 충분했다. 잊고 지내던 여행지에서의 추억, 그 때의 나와 우리들은 뜬금 없는 연락에도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진짜니까. 용기 내기 잘했다, 안 하던 짓을 하길 잘 했다.
퇴직금과 연차 수당까지 팽개치고 충동적으로 떠난 여행, 처음에 바란 건 매직마이크와 애 아부지와의 만남 뿐이었다. 첫 단추부터 우당탕탕 빠그러진 여행은 나를 전혀 예측 못한 경로로 매 순간 내던졌다. 충격을 받은 만큼 껍질 안으로 빛이 들어왔다. 매사 시니컬하고 빈정거림을 일삼던 내 안에서 자꾸만 긍정적인 무언가가 솟아났다. 상처받기 싫어서 마음의 반절도 표현하지 않고 살았는데, 늘 스스로에게 '자제해'라고 되뇌었는데, 마냥 신이 났다. 앞으로도 분명히 엉망진창 와장창일 이 여행이 더 기대가 됐다.
<라스베가스에서 만나요>
방에 돌아오니 새로운 분이 와 계셨다. 미국에 자주 와서인지 나처럼 온 김에 다 봐야한다는 간절함이 없는 분이었다. J4도 조슈아 트리 투어를 마치고 돌아왔다. 내일 일정이 취소됐다기에 나는 스투시와 같이 다니라고 제안했다. 솔깃해하는 J4의 반응에 갠지스 모니카 원정대 방에 메세지를 남겼다. 체대생으로부터 그가 기절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나는 J4에게 내일 같이 다닐 일행을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했다.
J4는 14일 밤에 투어가 끝나고 베가스 시내로 갈 예정이라면서 내게 베가스에서 만나자고 했다. 마침 발렌타인데이니까 클럽을 가자는 그는 갑자기 클럽에서 사라져도 이해해주겠다며 관대를 베풀었다. 나도 그에게 아직 베가스 숙소 안 구했으면 내 방에 묵자고 제안했다.
"언니, 남자랑 가야되면 어떡해요?"
"침대 두 개라 괜찮아."
"방해되잖아요.. *^^*"
"관람해.. *^^* 조선시대 합방처럼 조언도 해주고.."
드레스 코드, 섹도시발. 컨셉, 초콜렛 먹기. 과연 두 불나방들은 베가스를 찢을 수 있을 것인가?
<합리성을 생각할 수 밖에 없는 밤>
벌써 새벽 네시였다. 존 맥래플린 콘서트가 계속 아른대 한 번 알아나 보기로 했다. 환불하고 새로 사기에는 환불 수수료 20%에 편도 표가 터무니 없이 비쌌다. 귀국 일자를 변경하기 위해 여행사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문의를 하려면 가입 후 인증을 하거나 전화를 해야했다. 둘 다 당장은 불가능했다. 하는 수 없이 운영을 하는 건지 아닌지 모르겠는 여행사 인스타를 찾아내 메세지를 남겼다.
때마침 기절했던 스투시로부터 메세지가 왔다. 내가 내일 일정 없으면 J4랑 같이 다니라고 하자, 그는 내게 왜 안 자냐고 물었다. 나는 그에게 '주무세요 아버님', 하고 화답했다.
"할머니."
"조상님."
"공룡"
"가이아"
"빅뱅"
"카오스"
끝나지 않는 초월적 늙은이 대기 대결에서 이겼지만 여전히 잠이 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