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절대가 없는 이유
<미국 여행 6일 차:시타델아울렛/가주마켓/아메바뮤직/돌비 시어터>
<거지 같은 디즈니의 여운을 잊게 하는 건>
어제 디즈니랜드의 여파인지 몸도 찌뿌둥하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었다. 그냥 오늘은 쉴까? 하지만 미국을 언제 다시 올 줄 알고. 가성비충인 나는 갠지스 모니카 대화방에 메시지를 남겼다. '오늘 일정에 껴주실 분?' 스투시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침 먹으러 내려와."
그래, 가까운 나라도 아니고 미국이잖아, 이겨내야지... 스스로를 세뇌하며 억지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맨발로 내려가 신발부터 확인했다. 디즈니랜드 똥물에 담가졌던 신발은 여전히 축축했다. 아침을 먹으며 디즈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했다. 내게 남은 건 젖은 신발과 라스베이거스에 가져가야 하는 똥물에 썩어가는 빨랫감뿐이라는 것도. 마침 근처에 계시던 마리 사장님이 그럼 오늘 빨래를 하라고 하셨다. 원래 빨래는 월, 수, 금만 가능했지만 사정이 있으니 어쩔 수 없는 거 아니겠냐면서.
오늘은 스투시의 일정에 끼기로 했다. 준비를 마치고 거실로 내려가니 마리 사장님이 계셨다.
"처음에 봤을 때 제대로 여행은 할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의외로 잘 다니더라."
마리 사장님의 기특하다는 표정에 미국에 온 첫날이 떠올랐다. 빨리 씻고 유니버셜 가야 하는데 만실이라 발을 동동 구르는 내게 마리 사장님 많은 배려를 해주셨다. 친근하게 말도 걸어주시고 얼리 체크인도 할 수 있게 해 주셨다. 부랴부랴 준비하느라 이마에 고데기 화상도 입고, 정신없이 우버 불러서 미친 듯이 유니버셜 스튜디오로 갔었는데. 미국에서 좋은 기억을 많이 만들 수 있었던 건 모두 사람들 덕분이었다. 그중 마리 사장님은 내가 첫 번째로 만난 좋은 사람이었다.
<미국에서 버스 공짜로 타는 법>
스투시와 함께 버스를 타러 가는 길, 때마침 버스가 정거장을 향해 오고 있었다. 그런데 기사가 손사래를 치며 한 블록 앞에 있는 정거장을 가리켰다. 마침 정거장 방면에 있는 신호등이 깜빡이고 있었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마구 뛰었다. 라스베이거스용 섹도시발 털신발을 신고,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떨어트려가며. 스투시는 내 휴대폰을 주워 뒤쫓아왔고, 버스 기사는 그런 우리가 불쌍해 보였는지 우리를 기다려주었다.
버스에 올라 주섬주섬 쌈짓돈을 꺼내는데 기사가 돈을 안 받겠다며 거부했다. 스투시는 미국 버스기사가 불쌍한 애들에게 관대하다며 전에도 공짜로 버스를 탄 적 있다고 했다. 버스에 탄 스투시가 돈을 세니까 기사가 여유로운 손짓으로 뒤를 가리키며 '그냥 타!'라고 했다면서. 미국은 조금만 불쌍해 보여도 돈을 아낄 수 있는 창조경제의 나라였다.
<무소유는 시타델에 무엇을 소유하러 가는가>
시타델 아울렛 무료 셔틀버스인 300번으로 환승한 끝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스투시는 하나라도 건진다는 일념으로 폴로, 타미힐피거 등을 열심히 봤고, 나는 동태눈으로 그 뒤를 쫓았다. 원체 무소유여서 사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관심도 없던 Hnm에 가니 왜 눈이 돌아가는 건지. 원피스를 사이즈도 확인하지 않고 집어 들었다가 터트릴 뻔 한 끝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XS는 대체 누가 입는데요...?
나는 원피스와 반팔니트, 귀걸이까지 들고서 계산대로 향했다. 할인을 받기 위해 가입까지 마친 뒤에 계속해서 증식하는 동전들을 손에 쏟아 불쑥 내밀었다.
"이 동전 쓸 수 있을까?"
"물론이지~"
점원은 내 손에서 동전을 하나하나 골라갔다. 이후로도 가는 곳마다 동전 털기를 시전 했다. 요깃거리를 사러 들린 앤티엔스에서 페퍼로니 프레첼을 살 때도, 스타벅스에서 피스타치오 라떼를 살 때도. 불친절한 뉴요커들조차 동전 털기에는 100% 협조해 주었기에, 친절한 캘리포니아에서는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세상에 '절대'가 없는 이유>
다음 목적지인 가주마켓까지 대중교통을 타고 가기로 했다. 버스에서 내린 후, 스투시는 '이제 전철로 환승해야 돼.'라고 산뜻하게 말했다. 유니언 스퀘어 역 근방에는 사람도 없고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우버만 타기로 한 계획이 애초에 깨지긴 했지만, 현지인들조차 말리는 전철을 타는 건 좀 아니잖아. 우버를 타자고 해봤지만 돌아온 대답은 '둘이니까 괜찮아.' '나 태권도 유단자야.'였다. 너, 총보다 빨라...?
우려와 달리 역 안은 노숙자도 없고 생각보다 안전해 보였다. 저렴한 대중교통 맛을 몇 번 본 나는 5.5불을 주고 전철 1일권을 구매했다. 그리고 전철에 타자마자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칸 안에는 거친 삶을 살아온듯한 사람들만 있었다. 유일한 동양인인 우리에게 시선이 집중되었고, 누군가 뒤에서 소리를 질러댔다. 앉으라고 하는 것 같았다. 때마침 앞쪽에 유모차를 끌고 온 중년 여성을 발견했다. 나는 그가 구원자라도 되는 양 앞으로 향하는데 좌석마다 묽은 액체가 뿌려져 있었다. 그리고 중년 여성에게 가까워졌을 때 그가 고철덩이를 들고 탄 장발 남자였음을 알았다. 맞은편에는 약에 취해 눈이 풀린 남자가 있었고, 뒤에서는 광인이 여전히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구원이 아닌 수렁으로 도망쳤음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뒤따라온 스투시가 일단 앉자면서 털썩 좌석에 앉았다. 뒤늦은 내 '안돼' 외침과 동시에 스투시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질색팔색을 하며 어제 산 찐투시 티셔츠와 외투, 바지는 물론 속옷까지 젖었다고 했다. 현지인들이 왜 말렸는지를 실감한 우리는 다음 역에서 내려 옆 칸으로 옮기기로 했다.
열차 문이 열렸다. 그런데 옆 칸은 닫혀 있었다. 당황도 잠시, 멀리 열려있는 칸이 보였다. 우리는 마구 달려 열린 칸을 잡아 탔다. 다행히 살아서 전철에서 내릴 수 있었다. 다시는 전철을 타지 않으리. 우버보다 싸다고 혹하지 않으리. 총보다 빠른 태권도 가이를 믿지 않으리.
<직장인에게는 수요일이, 12일간 여행 중에는 6일 차가 한계>
작은 한인타운에 있는 가주마켓 1층 가주김밥에서 식사를 했다. 돼지고기덮밥과 라볶이를 시켰는데 맛은 있었지만 음식에서 머리카락이 나왔다. 그보다 더 입맛을 떨어지게 한 건 가게 주인이 쉬지도 않고 쥐 잡듯이 직원을 잡아대는 장면이었다. 보통 음식에 이물질이 나오면 클레임을 거는 편이지만 그랬다가는 직원들에게 잡들이를 할 것 같아서 조용히 넘어갔다.
다음 목적지인 아메바 뮤직은 엘피와 씨디, 책을 파는 가게로 알라딘 중고서점 같은 곳이다. 나는 친한 언니에게 선물할 U2 엘피와 휴대폰 충전선을 구매했다. 때마침 방전된 스투시의 휴대폰에 충전선을 개시했다. 그간 데이터와 배터리 거지로서 고생했던 순간들이 스쳐갔다. 더는 5%를 충전하기 위해 몇 시간 동안 케이블 각도를 맞추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엘피를 하나씩 들고 가는데 우리 옆으로 자전거 폭주족들떼가 요란스럽게 스쳐 지나갔다. 끝도 없는 행렬에 저들은 누구인가? 왜 저러고 있는가? 의문을 가졌지만 끝내 해소되지 않았다.
밤의 명예의 거리는 낮과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스투시는 여기에 오스카 시상식이 열리는 돌비 시어터가 있다고 했다. 그런데 아무리 구글 맵을 따라가도 돌비 시어터가 나오지 않았다. 너무 늦어서 닫은 것 같다고, 그래서 눈에 띄지 않는 것 같다고 결론을 내리고 돌아가려는데, 내 눈에 딱 돌비 시어터가 들어왔다! 우리는 후다닥 안으로 들어갔다. 계단에 올라 기념사진을 찍고, 기둥에 적힌 내가 태어난 년도에 오스카 상을 받은 작품도 확인했다.
사실 오늘 하루가 꽤나 피곤했다. 섹도시발 털신을 신고 하루종일 걸어야 했고, 디즈니랜드의 여독이 아직 풀리지 않은 데다 적지는 않았지만 스투시와 말다툼 아닌 말다툼도 했었다. 그간 사회성을 최대치로 끌어 썼고 6일 차에 한계가 온 것이다. 그런데 관심도 없었고 있는지도 몰랐던 돌비 시어터는 오늘 간 곳 중 가장 나를 들뜨게 했다. 포기했을 때 발견해서인지 뜻밖의 행운처럼 느껴졌다. 과정이 수월하지 않아 더 값지게 다가오는 순간이 있다. 힘든 순간 끝에는 섹도시발 신발로도 계단을 마구 뛰어오를 만큼 즐거운 순간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칙필레의 참맛은 알지만>
저녁으로 칙필레를 포장하기로 했다. 낮에 일하던 동태눈 직원들과 달리 밤에 일하는 직원들은 꽤나 친절했다. 버거와 너겟을 사서 우버를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거실에 포장해 온 음식과 10여 가지 소스를 펴놓고 빨래 순서를 정했다. 나도 디즈니 똥물에 옷이 쫄딱 젖었고 스투시도 지하철에서 주스 테러를 당했으니까. 스투시가 먼저 빨래를 하고, 건조기를 쓸 때 내가 세탁기를 쓰기로 했다.
스투시는 칙필레는 이렇게 먹어야 한다며, 빵을 분리하더니 소스를 발랐다. 너겟과 감자튀김은 받아온 다른 소스에 취향껏 찍어 먹으면 된다고 했다.
"이제 소스를 모두 받아와야 하는 이유야."
둘째 날 현지인 투어에서 소스를 왜 묻는가에 대한 궁금증이 드디어 해결됐다. 소스를 발라 먹으니 확실히 더 맛있었다. 뉴욕 파이브가이즈에 갔을 때 '토핑 뭐 넣어줄까?'라는 질문에 '노 땡스.'라고 답했던 기억이 났다. 빵, 치즈, 고기만 있는 버거를 먹어본 적 있는가? 나는 파이브가이즈에 가봤지만 거기가 왜 맛있는지를 아직도 모른다.
<자취 3년 차의 세탁법>
마리 사장님이 말한 '너무 적은 양'이 얼마인지 몰라 그간 쌓인 빨래를 전부 들고 내려왔다. 다 넣지도 않았는데 작은 통돌이에 빨래가 꽉 들어찼다. 나는 건조기에서 빨래를 꺼내고 있는 스투시에게 물었다.
"이 정도 돌리면 너무 적은 건 아니겠지?"
"아니ㅋㅋㅋ 빨래 안 해봤어? 세탁기 돌아가지도 않아. 반은 빼야 된다고."
자취 3년 차인데요. 하는 수 없이 반절을 빼고서 동전을 넣으려는데 하도 동전을 털고 다녀서인지 쿼터가 없었다. 스투시는 내게 1불을 달라더니 쿼터 3개, 0.75불을 줬다. 환전 수수료라는 명목으로. 미국에만 오면 다들 창조경제꾼이 되는 건가.
<6일 차 민박의 밤>
방에 들어갔을 때 새로운 사람이 있었다. 새삼 방 인원이 얼마나 많이 바뀌었는가에 대한 감상에 젖었다. 이제 이 방에는 나와 미국 고인 물, 새로운 분까지 세명만 남았구나. 나는 그분의 냉한 인상, 힙한 차림새에 어색한 인사를 나누었다. 힙스터 앞에 서면 쪽을 못 쓰는 찐따이기에.
멍하니 잘 준비하기 싫어서 미적대고 있는데 새로 온 분이 먼저 말을 걸었다. 이야기를 나눠보니 차가운 인상과 달리 붙임성 좋고 허당미가 있는 친구였다. 본인의 MBTI(ENFP)부터 왜 미국에 왔는지까지 아기 병아리처럼 조잘대더니 자기 유튜브를 구독해 주면 재밌는 이야기를 해주겠다고 했다. 쿼터보다 싼 이용료에 나는 ENFP의 유튜브를 구독했고, 그의 짝사랑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ENFP는 혼자 간 베가스 투어에서 옆자리에 앉은 또래와 계속 연락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거 꽤나 운명적인걸요...? 흥미로우면서도 가슴이 싸하게 식은 건 베가스에 사는 애 아부지 때문인가. 내 운명은 어디에 있는가? 정답은 알 수 없지만 그게 베가스가 아님은 확실했다. 그래도 우리에게 말하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워 어쩔 줄을 모르는 그 모습이 참 귀여웠다. 사회성이 한계치에 다다랐다고 느꼈던 게 거짓말처럼 일과를 마치고 수다를 떠는 이 시간이 참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