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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쵸 Jun 30. 2023

이렇게 워홀 가면 안 된다 표본의 개노답 워홀기 12

멜버른은 내 정착지가 될 자격이 있는가? 멜버른 여행 4일 차

<멜버른 여행 4일 차:도서관/그리스 식당(Stalactites restaurant)/퀸 빅토리아 마켓/디저트 카페/Captains of Industry/분식집>



  <멜버른에서 만난 첫 번째 사람>

  멜버른에서 만나야 할 세 사람, 멀끔한 인상의 (대머리를 곁들인) 호주 남자, 바리스타 친구, 동년배 한국인 워홀러. 이 중 오늘 보기로 한 사람은 동년배 한국인 워홀러다. 그가 정착 초기에 쓴 고생담에 댓글을 단 걸 계기로 만남을 약속하게 됐다. 나이도, 그간의 마음고생도, 상황도 비슷한지라 할 말이 아주 많을 것 같았다.

  약속 장소인 도서관에 30분이나 일찍 왔는데 마침 동년배로부터 도착했다는 연락이 왔다.

  '체스판 앞에서 초록색 가방 메고 있어요.'

  체스판 근처에 동년배처럼 보이는 사람이 없어 주위를 두리번대는데 어떤 여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긴가민가하며 다가가자 베이지색 가방의 반대쪽 초록면이 보였다. 댓글로 떠들 때는 꽤나 친근했던 우리는 근엄한 얼굴로 수줍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스 식당 (Stalactites restaurant)>

  우리는 도서관에서 제일 가까운 맛집인 그리스 식당에 갔다. 우리는 여러 음식을 맛볼 수 있게 감자튀김이 포함된 모둠 고기에 빵을 추가했다. 대부분 롤 형태의 샌드위치를 먹고 있었기에 그걸 시켰어야 했나? 싶었지만 유명한 곳이니 믿어보기로 했다.

  음식을 기미 하자마자 든 생각은 '유명템은 이유가 있네.'였다. 남들이 안 시키는 건 이유가 있다는 얘기다. 감자튀김에는 시즈닝이 뿌려져 있었지만 너무 극미량이어서 절대미각을 발휘해야만 간신히 맛을 느낄 수 있었다. 자극에 길들여진 내게는 거의 이유식에 가까운 맛이었다. 먹는 내내 무슨무슨 원료 1000ppm 함유!라는 문구에 속아 헐레벌떡 충동구매한 사람이 된 기분이 들었다.(1000ppm은 퍼센트로 환산 시 0.1%이다.)

  모둠 고기는 처음 몇 입은 괜찮았지만 식는 속도가 굉장히 빨랐다. 특히 양고기가 순대 간처럼 퍽퍽하고 질겨서 나와 동년배 모두에게 외면을 받았다.


  <굴 못 먹는 사람과 초코파이 안 먹는 사람의 퀸 빅토리아 마켓 탐방기>

  밥 먹었으면 뭐다? 카페다. 우리는 하루에 커피 2잔은 마셔줘야 하는 카페인에 잠식당한 육체를 가졌으니까. 그런데 20분은 족히 걸었는데도 배가 불렀다. 그래서 근처에 있는 퀸 빅토리아 마켓으로 경로를 변경했다. 수산물, 육가공, 디저트, 커피 등... 규모는 작았지만 있을 건 다 있었다. 시드니에서 바리스타 친구를 만났을 때 마켓에서 굴을 먹어보라고 추천받았다. 1알씩 먹는 것도 가능하다면서.

  "굴 드실래요?"

  "10년 전에 굴 먹고 노로바이러스 걸린 뒤로 굴 못 먹는 몸이 되었어요."

  "여기 굴은 양식이 아니라서 괜찮을 거예요."

  서로의 눈빛에서 우리 둘 다 노로바이러스의 원인을 상기했음을 읽었다. 동년배는 망설임 끝에 '고'를 택했다. 나는 굴장수에게 최소 주문 수량을 물었고, 굴장수는 6알부터 구매가 가능하다고 했다.(11불) 멜버른에 마켓이 두 개가 있는데 1알씩 파는 곳은 여기가 아닌 듯했다.

  "3알 고?"

  "... 고."

  굴에 레몬즙을 뿌렸다. 10년 만의 도전을 앞둔 동년배에게 '시저가 굴을 그렇게 좋아했다네요.' 뜬금없이 tmi를 날리자 동년배가 '아.. 네.' 하고 답했다.

  굴은 레몬 뿌린 바다맛이었다. 짜고 시고 비리고. 두 알 먹을 때까지는 초장의 멋짐을 모르는 서양인들이 불쌍할 따름이었다. 그래도 3알째 먹을 때는 적응이 돼서 입가심용으로 나쁘지 않았다. 다행히 동년배에게 아무런 이상 증상이 없었고, 우리는 다시금 노로바이러스의 원인을 곱씹을 수 있었다.

  다음으로 들린 곳은 초콜릿 상점이었다. 동년배는 여기가 굉장히 유명한 집이라고 했다. 여기 초콜릿을 사용해 음료를 만드는 카페는 맛이 보증된 곳으로 봐도 될 정도라도 했다. 우리는 사각 초콜릿 두 개를 사서 시장 앞에서 나눠 먹었다. 브라우니나 파베 초콜릿일 줄 알았는데 초콜릿 가루를 묻힌 마시멜로였다. 네, 당신이 상상하는 그 맛 맞아요. 초코파이.


  <호주 놈들아 대가리 박자>

  디저트가 유명한 곳이라고 동년배가 안내한 카페, 여전히 배가 부른 우리는 커피만 시켰다. 커피는 유리잔에 담겨 나왔다. 호주에 정이 안 붙는 이유 중 하나가 뜨거운 음료를 유리잔에 주는 것이다. 뜨거워서 쥐기도 힘들고 빨리 식어서 맛도 없는 데다 심미적으로도 엉망인데 대체 왜? 종이컵에 와인 따라 마시는 것과 무엇이 다른지? 나는 바리스타인 동년배에게 호주 놈들은 왜 이런 기본도 안된 짓을 하는지 물었지만 동년배도 명확한 이유는 몰랐다.

  시드니에서는 내내 '유리잔에 커피 내오는 놈들 대가리 박아라..'라고 생각했다. 맛있는 커피집이 드물었고, 아이스 라떼 달라는 말에 뭔 개소리냐는 표정으로 아이스크림을 먹으라고 하질 않나(놀랍게도 아이스커피가 없었다), 미지근한 커피에 녹은 빙하마냥 얼음 두어 개 둥둥 떠있는 걸 아이스라고 줬으니까. 멜버른은 커피의 도시니까 이런 근본 없는 짓 안 할 거란 생각을 비웃듯 멜버른 놈들도 똑같았다. 외눈박이 세상에서 두 눈박이가 병신이라는 말처럼 이쯤 되면 내가 이상한 놈인가 싶었다.

  호주 놈들아 기억해. 뜨거운 건 머그잔, 차가운 건 유리잔! 아이스 음료에 얼음 팍팍 넣으라고.


  <눈 낮춘 자의 최후는?>

  우리는 비슷한 점이 많았다. 한 번쯤 해외살이를 해보고 싶었지만 뚜렷한 목표 없이는 시간만 버린다는 이야기 때문에, 용기가 부족해서 그저 열망이 사그라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코로나 시대의 도래가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바뀌었고 급격한 기후 변화 소식을 접할 때면 당장 내일이라도 죽을 수 있겠구나 불안에 떨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에서 '왜 진작 도전해보지 않았을까.' 수없이 후회했다. 하고 싶은 일을 미루면 영원히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우리를 열망에 다가서게 했다. 일단 해보자는 근거 없는 용기가 등을 떠밀어줬기에 우리는 여기에서 만날 수 있었다.

  호주는 우리에게 최선책이 아니었다. 내가 늘 꿈꿨던 국가는 북미였고, 동년배는 영국을 앓았다. 공교롭게 둘 다 1 지망에서 떨어졌고, 그래서 신청하는 족족 비자를 뿌리는 호주를 택했다. 하지만 내게 호주는 신발 안 신고 다니는 애들이 사는 변방 섬나라였고, 호주에 대해 아는 거라곤 토르, 캥거루, 코알라뿐이었다. 그래도 눈을 낮췄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청명한 날씨, 바다, 워라밸, 주 4일제 통과 등의 장점들을 찾아보며 기대에 젖었다.

  그런데 막상 오고 나니 말만 해외 살이지 별 게 없었다. 오히려 한국에서보다 삶의 질은 떨어졌고, 이 나이에 사서 고생한다는 자괴감의 연속이었다. 그제야 눈을 낮췄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려한 미국의 도시와 런던만의 분위기에 대한 열망은 호주의 어설픈 도시로 채울 수 없었다. 어쩌면 우리는 해외라면 어디든 좋았던 게 아니라 미국과 영국이어야만 했던 걸지도 몰랐다. 내 버킷리스트는 12월 뉴욕에서 존 맥래플린 콘서트 보기였고 동년배는 크리스마스를 런던에서 보내고 싶어 했으니까. 그래서 종종 여기서 애매하게 시간과 돈을 버리느니 차라리 미국/영국으로 여행을 가자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큰맘 먹고 온 워홀을 이렇게 포기했다가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경우의 수가 우리의 발목을 잡았다. 우리는 한 치 앞도 모르는 바람 앞 등불 같은 처지였고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바뀌었으며 경로를 벗어났다는 두려움 매 순간 직면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 머물러야 하는 이유가 있는가에 대해서 확신할 수 없었다. 아직까지는 알을 깨고 나왔음에 의의를 두는 정도에 불과했으니까.


  <사랑이란 무엇인가>

  나는 호주에만 오면 운명적인 사랑에 빠져 편하게 영주권 따고 개들을 데려와서 살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오니 호주 남자들 콧수염은 못 봐주겠고, 호주도 싫었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는 말이 맞았다. 그래서인지 자꾸만 스코틀랜드에 가 스코티시가 내 소울메이트인지 확인하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가, 변두리 섬! 여기서는 어딜 가도 비싸고 멀고 환승해야 했다. 게다가 스스로도 이 충동이 욕망을 쟁취하려는 용기인지 또 다른 곳으로의 회피인지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동년배에게 사랑이란 뭘까요? 하고 물었다.

  "갑자기요?"

  "네. 사랑은 뭘까요?"

  "살면서 이런 질문 처음 받아봐서 자기 전에 생각날 것 같아요."

  나는 동년배에게 스코틀랜드에 소울메이트를 찾으러 가야 하는가에 대해 이야기했다. 환승 두 번, 250만 원을 들여 이 애매한 시기에 런던도 아닌 스코틀랜드에 갈 가치가 있는가? 충동적인 나조차 정답이 No임을 알았다. 심지어 동년배는 동년배는 안정과 규칙성을 중시했다. 나는 한국에서의 별일 없는 일상을 지루한 죽음이라고 생각했지만 동년배는 소소한 행복으로 느꼈으니까. 이렇듯 성향이 다른 우리지만 '얼굴 보고 판단하자'는 점은 같았다. 나는 스코티시의 사진을 보여주었고 동년배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그냥 외국인 아니에요?"

  "잘생기지 않았어요? 다른 사진 보실래요?"

  "사진 여러 장 보여줘야 하는 것부터가 안 잘생겼다는 증거예요."

  "그래도 한 번 보세요."

  다른 사진을 본 동년배의 얼굴에는 여전히 찝찝한 의문이 가득했다.

  "저희 카페에 이런 외국인 하루에 오천 명씩 오는데요."

  사실 나는 엄청난 금사빠, 금사식이라 친구들은 내게 '빨리 아무나 좋아하고 차여서 웃음 좀 줘라'라고 했다. 심지어 기준도 없어서 모두에게 '눈 좀 똑바로 뜨고 다녀라', '앞으로는 허락 맡고 좋아해라'는 말을 들었다. 이번에는 진짜 미남이라고 생각했는데 냉혹한 동년배의 눈빛에는 한치의 거짓도 없었다. 나는 부랴부랴 멜버른에서 만나기로 한 (대머리를 곁들인) 남자 사진을 보여주었다.

  "맹탕이잖아요."

  "네? 둘 다 별로예요?"

  "아까 외국인은 아예 기억도 안 나고 이 사람은 맹탕 이미지 때문에 기억은 나는 정도예요."

  "그럼 저 스코틀랜드 가지 말아요?"

  "그냥 길거리 외국인 아무나 붙잡고 만나세요.."

  동년배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내게 둘 다 미남이 아니니 아쉬워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못을 박았다. 나는 '사람들이 저한테 눈 똑바로 뜨고 다니라는데 동의하시나요?'라고 물었고 동년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Captains of Industry>

  3시, 대부분의 호주 카페가 문을 닫는 시간이다. 점원들이 마감을 하기 시작했고 우리는 다음 카페로 메뚜기떼처럼 자리를 옮겼다. 1일 2 커피쯤은 충분히 가능한 우리였지만 이곳도 카페는 마감한 뒤여서 술만 주문할 수 있었다. 논알코올 두 잔을 시켰고 별다른 특색은 없었다.

  나는 이제 몇 장 남지 않은 우리 개들 포토카드를 동년배에게 건넸다. 우리는 음료를 배경으로 포토카드를 들고 사진을 찍었다.(예절샷이라고들 부른다) 동년배는 살다 살다 강아지 예절샷은 처음 해본다고 했다.

  창 밖으로 지붕에 쌓인 낙엽더미와 유럽 스러운 풍경이 보였다. 호주에서 발견한 유럽에 꽤나 만족한 우리는 비록 음료는 맛없지만 여기 오기를 잘했다 싶었다. 동년배는 내게 맞은편에 있는 HnM건물이 사진 찍는 명소라고 알려주었다.

  "..저기가요? ..왜요?"

  "몰라요."

  우리는 호주에서 각각 미국과 영국을 앓았다. 런던에 가본 적 없는 내게 동년배는 런던을 묘사했고, 마찬가지로 나는 뉴욕에 가본 적 없는 동년배에게 뉴욕을 묘사했다. 동년배는 도시가 너무 좋아 종종 스파이더맨을 보며 대리 만족을 한다고 했고, 나도 특유의 느낌이 좋아 주기적으로 브리짓 존스의 일기를 봤다. 우리는 가질 수 없는 무지개를 쫓는 사람처럼 아련함에 잠겼다. 그리고 도돌이표처럼 '이 거지 같은 섬 뜨고 만다...'로 귀결됐다.


  <월드 스타는 나를 호주에 붙잡아둘 수 있는가>

  시저가 굴을 좋아했다는 Tmi에 복수라도 하듯 동년배도 Tmi를 시전 했다.

  "11월에 샘 스미스 온대요."

  "그래서요..?"

  "그렇다고요.."

  사실 우리 둘 다 샘 스미스에게 일말의 관심이 없었다. 게다가 당장 내일 어디 있을지도 모르는 우리에게 11월은 너무 까마득했다. 하지만 왜인지 나는 샘 스미스 내한 콘서트 가격을 찾아보았고, 갑자기 호주 콘서트에 가고 싶어졌다. 한국에서는 20만 원이 넘는데 호주에서는 가장 싼 좌석이 9만 원이었으니까! 사장님이 미쳤어요는 못 참지.

  동년배는 콘서트에 같이 가자는 제안에 언제 호주에서 도망칠지 모른다고 답했다. 그건 피차일반이었기에 우리는 '만약에'를 걸고 훗날을 기약했다.

  "표는 언제 살까요?"

  "임박해서 사려고요.."

  "그래도 샘스미스 월드스타인데, 너무 무시하시는 거 아닌가요?"

  "비버나 시런이었으면 바로 샀을 텐데.. 샘씨는 그렇게까지 미리 준비하고 싶지는 않네요.."

  "언홀리.."

  나는 혼자서라도 샘 스미스 콘서트에 가고 싶었다. 그간 '돌아오라, 탕아여.', '난 여기서 널 기다리고 있어. 돌아와서 XX에 재취업해줘. 나랑 같이 불행해줘.'라고 나를 소환하던 전 직장동료들에게 'ㅠ' 외에 달리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 후로 나는 샘 스미스란 그럴싸한 이유를 들 수 있게 됐다. 물론 그들에게서 돌아온 답은 "킹스미스나 봐.."였지만...


  <호주 놈들아, 가짜 한식에 만족하지 말아 줘>

  우리는 저녁을 먹으러 비와이 코리아라는 한식당에 갔다. 그런데 줄이 너무 길었다. 아무리 맛있어도 기다려서 먹느니 안 간다 주의인 우리는 분식집으로 목적지를 바꿨다. 가게 안에 사람이 버글댔지만 다행히 자리가 있었다. 때를 잘 맞춰 왔다며 들어가려는데 가게 입구에 있는 네온사인이 눈에 들어왔다. 인과 없는 상스러운 두 문장에 동년배와 나는 짠 듯이 시선을 교환했다. 저런 싼 티 나는 문장을 여기서까지 볼 줄이야. 우리는 그저 웃었다.

  호주에 있는 모든 한식당이 그러하듯 이곳 또한 가격이 시건방졌다. 하지만 거의 5점에 육박하는 평점을 믿고 로제 떡볶이와 기본 김밥을 주문했다. 그런데 김밥은 질소 과자처럼 공기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이렇게 여백이 있어도 김밥이 말리나? 싶을 정도로. 떡볶이는 거의 탕에 가까울 정도로 국물이 많았는데, 인심이 넉넉해서라기보다는 졸이는 과정을 생략한 것 같았다. 나는 어묵보다는 떡을 좋아하는데 떡에 간이 하나도 배어있지 않아서 자꾸만 어묵에 손이 갔다.

  "한국에서 이렇게 팔면 망했을 텐데요."

  "한국에서 먹던 거를 바라지를 마세요."

  동년배의 답에서 체념이 느껴졌고, 나는 아직 한국 물을 빼려면 멀었음을 깨달았다.

  앞으로 얼마나 호주에 머물지는 몰랐지만 우리는 헤어질 때 다음을 기약했다. 샘 스미스 콘서트장에서 만나자면서. 아마도 지켜지지 않을 확률이 컸지만 그래도 기약할 미래가 있다는 건 설렜다. 무엇도 기대되지 않는 곳에 사는 것보다 훨씬 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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