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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쵸 Jun 22. 2023

이렇게 워홀 가면 안 된다 표본의 개노답 워홀기 11

멜버른은 내 정착지가 될 자격이 있는가? 멜버른 여행 3일 차

 <멜버른 여행 3일 차:플린더스역/세인트 폴 성당/피츠로이/룬 크루아상/콜링우드/Aunty Peg's/스미스 스트릿/이태리 식당 Kaprica/칼턴 가든스>



  <룬 크루아상 오픈런 도전!>

  내일의 행선지는 피츠로이, 이유는 별표 찍어둔 장소가 몰려 있기에. 특히 인기가 많은 룬 크루아상은 오픈하는 시간에 맞춰서 가야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웠으나 9시가 넘어 기상했다.(영업 시작 시간 오전 7시 30분) 쩔수 없^^ 빠른 포기 후 아침 루틴인 명상을 했다. 사실 나는 내가 일찍 일어날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숙소에서 피츠로이까지 한 번에 가는 트램이 있었지만 왜인지 몰라도 트레인에서 트램으로 환승하는 경로를 택했다. 마침 환승역이 플린더스 역이었는데 이 앞에서 꼭 사진을 찍어야 한다고 유학원 사장님이 추천해 줬던 게 생각났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모르는 사람에게 말 걸고 싶지 않았기에 아쉽지만 사진은 포기해야 했다.


  <50.5 : 49.5>

  역 바로 맞은편에 성당이 있길래 지나치지 못하고 들렀다. 밖에서 봤을 때는 몰랐는데 시드니 세인트 메리 성당보다 규모가 작았다. 그래도 가이드로 보이는 사람이 관광객들에게 설명을 해주고 있었던 걸로 봐서 역사가 있는 곳 같았다. 슬쩍 껴서 들어볼까 했지만 영어가 또 내 발목을 잡네...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뭘까에 대해 생각했다.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 같기도 누군가를 향한 기도 같기도 한 생각은 유기적으로 얽혀 있어 어느 쪽이라고 명확히 정의 내리기 어려웠다. 그간 나는 내 인생의 소명이 내 소설의 세계관 완성시키기와 소울메이트 찾기라고 생각해 왔다. 내 마음이 어느 쪽을 더 원하는지를 몰라 갈팡질팡 했었다. 소설의 세계관을 완성해도 소울메이트를 찾지 못한다면 공허할 것 같았고, 소울메이트를 찾아도 작가로서 이룬 게 없다면 관계로 회피한 기분이 들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그 순간을 기점으로 내 1순위는 '진짜 작가'가 되는 것임을 확신했다. 작가로서 자리를 잡아 언제든, 어디든 자유롭게 여행하는 삶을 살고 싶었다. 그러니 근원적 우울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글을 써서 결과를 내야 했다. 그래야만 비로소 불안정한 내면이 단단해질 테니.


  <고생 끝에 피츠로이 간다>

  트램 정거장에 왔는데 처음엔 이 방향이 맞는지 몰라서, 이후로는 뭘 타야 하는지 헷갈려서 몇 대를 그냥 보냈다. 고심 끝에 방향은 맞다는 결론을 내리고 일단 트램을 탔는데 구글맵에 적혀있는 번호랑 내가 탄 트램 번호가 다른 게 영 마음에 걸려 한 정거장 뒤에 내렸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번호도 잘 확인하고 트램을 탔다. 피츠로이 쪽으로 가는 건 맞는데 정거장 이름이 전부 일치하지 않았다. 무언가 잘못 됐지만 이제 내릴 수도 없어서 구글맵을 계속 살피며 피츠로이와 가장 가까운 정거장에 정차했을 때 내렸다. 트램을 타고도 20분을 넘게 걷는 기적의 경로! 그래도 날씨 따뜻하고 시티랑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서 구경하며 걷는 재미가 있었다.


  <심즈 총각, 인스타 뭐예요>

  널찍한 매장과 쿨한 인테리어, 손님도 별로 없어서 금방 내가 주문할 차례가 왔다. 그런데 점원이 어딘가로 사라졌다. 인마, 어디 가, 주문받고 가야지. 그때 다른 점원이 주문을 받으러 왔다. 내 인생의 테마인 '언제나 뜻밖의 개이득 대잔치'에 걸맞게 그는 인간 심즈였다. 보급형 어린 션 오프라이 느낌이었다. 늘씬하고 탄탄한 몸은 흰 티로 인해 더욱 돋보였다. (이런 구체적인 서술이 흡사 치한 같아 보일지라도 미남을 기록해야 한다는 사명을 저버릴 수 없다.) 잘생겨도 악세서리한 남자라면 질색을 했는데 그는 귀걸이 한 모습마저도 용납이 됐다. 나는 실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주체하지 못하며 라떼와 아몬드 크루아상을 주문했다. (얼굴 보느라 가격도 아예 안 봐서 가격이 싸가지가 없었단 것도 나중에 누가 알려줘서 알았다.) 서빙도 심즈 총각이 해줄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아 이내 웃음을 잃었지만.

  커피의 도시라는 명칭에 걸맞게 멜버른 어느 카페를 가도 커피 맛이 평균은 됐기에, 커피는 나쁘지 않았다. 대표 메뉴인 아몬드 크루아상은 굳이 따지자면 맛있는 편이지만 생각보다는 평범했다. 몇 시간을 기다려서라도 먹을 가치가 있다고들 하던데 절대 그 정도 아니다. 겉면에 촘촘하게 박혀있는 아몬드 때문에 시도해 볼 가치가 있기는 하지만 안에 왜 앙금을 넣는지를 모르겠다. 호주에서 시도한 모든 아몬드 크루아상 안에 크림 대신 앙금이 들어있었는데 개인적으로는 완두앙금빵 같아서 별로였다. 좋은 아침 패스츄리 범계점 아몬드 크루아상이 훨씬 나았다. 앙금이 아닌 크림이 들어 있는데 묽어서 잘 흐르지만 그만큼 부드럽고 느끼하지는 않다. 여태까지 5명에게 먹였고 모두 극찬했다. 가격도 룬 크루아상의 1/2인 데다가 줄 설필요도 없다. 하지만 범계에는 심즈 총각이 없으니까... 네, 룬 크루아상 최고.


  <라떼 없는 카페가 있다?>

  피츠로이를 구경하며 걷다 보니 바로 옆 동네인 콜링우드까지 갔다. 커피가 맛있다고 추천받은 카페 Aunty Peg's도 마침 거기 있었다. 입구에 패트와 매트의 힙스터 버전 같은 콧수염쟁이 두 명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카페보다는 상점이나 원두 제작 공장 같아서 시골쥐처럼 두리번대니 힙수염쟁이가 인사를 건넸다. 순간 그들의 힙에 질식할 뻔했지만 간신히 정신줄을 잡았다.

  "여기 카페야?"

  "응. 카페야."

  "라떼 줘."

  "우린 라떼 없어."

  "어...? (뭐야, 카펜데 왜 라떼가 없어. 나 농락하냐.) 라떼 왜 없어...?"

  "우린 블랙만 파니까..^^."

  나는 절대 돈 주고 아메리카노를 사 먹지 않는다. 명장이 만든 커피나 카누나 내 입에는 똑같기 때문이다. 오는 길에 카페도 못 봤거니와 웬만한 카페는 다 닫은 시간이기에 동공에 지진이 났다. 힙수염쟁이는 친절하게 트램을 타고 10분만 가면 라떼를 파는 카페가 있다고 알려줬다.

  "꼭 트램 타야 돼...?"

  "어.. 응. 그래도 10분 아니고 5분인 것 같아."

  "(귀찮으니까) 그냥 먹을게.^^...."

  그들은 메뉴판을 건넸고 나는 다시 동공에 지진이 났다. 어차피 블랙밖에 없는데 메뉴가 왜 이렇게 많은 건데요. 하는 수 없이 '나 쓴 거 못 먹어.'라고 했고 힙수염쟁이는 시음을 시켜줄 테니 따라오라고 했다. 나는 그를 따라 제조실까지 들어갔고 그는 당황하며 나가라고 했다. 따라오라면서요...

  그가 시음용 커피를 건넸다. 마시자마자 쿠훼훼훽 아저씨처럼 기침을 했다. 서로 어색한 웃음을 교환한 뒤에 두 번째 커피를 시음했다. 이번엔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처음보다 더 아저씨처럼 고통스러운 소리를 냈다. 세 번째 시음을 시켜주려는 그를 만류하며 방금 마신 걸로 달라고 했다. 어차피 뭘 마셔도 똑같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장인처럼 커피를 내리는 그에게 혹시 이 근처에 카드를 살 곳이 있냐고 물었다.

  "카드..? 웬 카드?"

  "크리스마스 카드 같은 거.^^"

  크리스마스를 6개월 전부터 준비하는 놈으로 보였는지 힙수염쟁이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는 스미스 거리에 기념품 가게들이 있다고 추천해 주었다. '철자 모르니까 네가 써줘.^^'라는 요구에 구글맵에 직접 검색도 해주었다.

팁 포함 9불

   내가 시킨 커피는 Honduras 어쩌구로, 꿀이 들어가서 달콤하다고 했는데 그냥 사약 같았다. 이게 그나마 덜 쓴 거면 다른 건 얼마나 쓰단 말인가 싶었다. 마감 시간까지 손님이 계속 왔는데 다양한 방식으로 커피를 제조했다. 일반 카페에서 쓰는 머신도 있고, 드립형식도 있고, 다도처럼 무슨 뭉쳐진 잎을 떼어내서 만들기도 했다. 재방문 의사는 없지만 한 번쯤은 가볼 만했다. 계산할 때 팁 내라는 창이 떠서 어이가 없었지만, 힙수염쟁이들이 친절해서 1불 줬다.


  <이태리 국밥 파스타>

스미스 거리 / 노을 / 도서관

  스미스 거리에는 아기자기한 상점과 식당들이 몰려 있었다. 카드를 파는 곳은 이미 문을 닫은 뒤였다. 식당으로 가는 동안 해가 천천히 넘어가는 거리 풍경을 볼 수 있었다. 낮과는 또 다른 매력에 멜버른에 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였지만 그래서 더 온전히 느끼고 자유롭게 사색할 수 있어 좋았다.

  이태리 식당 Kaprica에 도착했다. 예약했냐는 물음에 당당하게 '노'라고 답했지만, 혼자라서 좋은 점은 웬만하면 그냥 들여보내준다는 것이다. 메뉴판을 받아 들고 처음 든 생각은 생각보다 싸네였다. 가장 비싼 메뉴도 30불을 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제 먹은 거지 같은 36불짜리 피자가 떠오르자 화가 치솟았다.

  나는 새우 토마토 스파게티를 주문했다. 기다리는 동안 식당은 손님으로 가득 찼다. 특별한 날을 기념하러 온 사람들, 분위기를 즐기며 천천히 식사하는 사람들 틈에서 나만 국밥 말아먹듯이 5분 만에 식사를 마쳤다. 나는 회전율을 높여주는 일등 공신인 빨리 먹고 빨리 꺼지는 손님이기 때문이다.


  <철학적 생각을 멈출 수는 없는가>

  근처에 칼턴 가든스가 있어서 이왕 온 거 들렀다 가기로 했다. 공원은 평범했지만 분수대 앞에 섰을 때는 한참을 시선을 떼지 못했다. 신화 속 인물을 조각한듯한 커다란 분수가 캄캄한 하늘에 물을 흩뿌렸고, 분수를 기점으로 절반은 고층 빌딩이 나머지 반쪽은 고전 양식의 건물이(왕립 전시관)이 대조를 이루었다.

  만화 그리스 로마 신화를 보고 자란 세대답게 나는 이쪽에도 흥미가 있었다. 그래서 신화를 차용해 A thousand dreams of you도 썼던 거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신은 하데스인데 네가 좋아하는 신화 속 인물은 누구냐고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밤새도록 신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그런 사람이라면 아마 나와 무척 닮았을 테니까. 하지만 묻고 싶은 사람은 있어도 물을 수는 없었다. 그저 언젠가를 기약하는 수밖에.

  숙소까지 트램을 타고 돌아왔다. 글을 쓰려고 노트북을 켰는데 어쩌다 보니 미국에서 사귄 친구인 우성이 형과 새벽까지 수다를 떨었다. 미국에서 같은 민박에 묵었던 체대생과 부산에서 만난 적 있는데 그때 우성이 형 얘기가 나와 대뜸 영상통화를 걸었다. 딱 한 번 본 사이인 데다 한 달 만에 영상 통화를 거니 당연히 받지 않더라. 그래도 그걸 계기로 그날도 우성이 형과 새벽까지 수다를 떨었다. 서울 올라오라는 즉흥 제안에 우성이 형은 올 듯 말 듯 밀당 끝에 상경하기도 했다. 철학적 생각을 자주 하는 점이나 마음이 힘든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애쓰는 점, 생각의 흐름 등이 나랑 많이 닮은 친구였다. 만약 쌍둥이 자매가 있으면 이렇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무슨 말만 하면 이미 상대방도 그 생각을 하고 있어서 '너도? 나도.'를 추임새처럼 계속 말하게 된달까. 거의 뇌가 동기화된 수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멜버른에만 오면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윤곽이 잡힐 줄 알았다. 세컨을 따러 갈지, 멜버른으로 이사를 갈지, 아니면 제3의 대안을 찾을지... 하지만 은연중에 이 여행이 회피에 불과함을 알고 있었다.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몰라 답답했고 하루에도 몇 번씩 계획이 바뀌었다.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고 이야기하자 우성이 형은 이렇게 말했다.

  '거기 있는 것만으로도 뭘 하고 있는 거구만.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잘하는 거여. 너무 힘들면 그냥 돌아와.'

  '너와의 시간을 많이 가지면 좋을 것 같네. 호주에 있는 동안 너 좋아하는 글쓰기도 하고 좋아하는 거 하면서 지내. 너무 애쓰려고 하지 않아도 돼.'

  "그래, 이겨내야지."

  '이겨내지 마, 그냥 지내. 못 이긴다, 그냥 깨지지 말고 잘 견뎌. 깨지면 마이 아파.'

  매직으로 까맣게 칠한 안경을 쓴 듯 여전히 내 앞날은 캄캄했지만 전보다는 덜 막막하게 느껴졌다. 조금 한심하면 어때, 이 나이에 시간 낭비 하는 게 뭐, 숨만 잘 쉬면 되지. 우성이 형 말대로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힘을 내고 있는 거니까. 그러니 이 혼돈기에 약간의 게으름쯤은 눈 감아주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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