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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쵸 Jul 01. 2023

이렇게 워홀 가면 안 된다 표본의 개노답 워홀기 13

멜버른은 내 정착지가 될 자격이 있는가? 멜버른 여행 5일 차

<멜버른 여행 5일 차:마커커피/로즈 아티스트 마켓/Good measure-몽블랑 커피/감옥/이태리 식당 Fogria di fico>



  <동년배 없는 동년배 투어>

  오늘의 첫 목적지는 동년배가 추천한 마커 커피, 마침 사우스 야라에도 지점이 있었다. 숙소가 있는 주택가와 달리 번화가는 활기찬 분위기였고 사람도, 구경할 거리도 많았다. 구글맵이 알려준 대로 건물 안에 들어갔지만 카페는 보이지 않았다. 한 층 올라갔다가 내려왔다가 건물 밖으로 나가기를 반복한 끝에 다른 카페에 가기로 했다. 그런데 건물을 나와 몇 걸음 걷자마자 마커 커피 간판이 보였다. 미국에서도 호주에서 똥을 주는 구글맵..^^ㅗ....

  라떼와 아몬드 크루아상을 시켰다. 단 음식은 식사가 아니라는 주의였지만 가게에 짠 음식이 없어서 불가피했다. 커피는 맛있었지만 아몬드 크루아상 안에는 크림이 아닌 앙금이 들어 있었다. 앙금에서 언뜻 시큼한 맛이 났는데 원래 이런 맛인지 상한 건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물론 개의치 않고 다 먹었다. 위산이 다 이겨...

  동년배가 추천한 로즈 아티스트 마켓은 토요일 2시까지만 했기에 서둘러 움직여야 했다. 그런데 역무원이 전철역 개찰구를 막아서고는 사람들을 돌려보내고 있었다. 주말마다 교통수단이 난리라고 듣긴 했지만 토요일이 되자마자 겪다니. 우르르 맞은편 트램 정거장으로 이동했고, 꽉꽉 사람이 들어찬 트램을 타고 피츠로이로 향했다.

마이클 스캇 티셔츠 가격 30불 너무 양심 없는거 아니요..?

  마켓은 두 구역으로 나뉘어서 운영되었다. 이런 건 대체 누가 사는가, 파는 이의 양심은 어디에 있는가 싶은 물건 반, 그럴싸한 물건 반이었다. 그래도 수제품이 많아 구경하는 재미는 있었다. 멜버른에 있는 내내 편지를 쓰고 싶었기에 카드를 샀다.

  구글맵에는 4시까지 운영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동년배 말대로 2시가 가까워지자 파하는 분위기였다. 마음이 급해져서 처음에 조금 더 둘러보고 정하자며 지나쳤던 텀블러 구역으로 돌아왔다. 호주에서 사 먹기 가장 아까운 게 물인지라 물병이 필요하기는 했다. 보온, 보냉, 밀폐도 되는데 20불이면 거저였다. 나는 언제나 노랑, 아니면 분홍이지만 이 날은 차콜색을 골랐다. (그 선택이 복선이라도 되듯이 뜯지도 않고 보관하던 멜번산 물병은 누군가의 선물로 내 품을 떠났다.)


  <방광에 지배당하는 삶>

  근처에 맛집이 있어 갔는데 15분을 기다려야 했다. 대기하면서 볼 수 있게끔 자체 제작 상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는데 왜색이 가득했다. 게다가 손님들이 먹는 음식이 죄다 손바닥만 했다. 굳이 여기를 나까지 소비해 줄 필요 없다 싶어 그냥 나왔다.

  주린 배를 쥐고 다음 목적지인 Good measure 카페로 향했다. 이곳의 시그니처 메뉴는 크림이 올라간 오렌지 향이 나는 커피(몽블랑)였다. 모두들 아이스 몽블랑을 먹고 있었다. 하지만 멋 부린다고 계절을 무시한 착장을 입고 다녔기에 '뜨거운 오렌지 라떼'를 주문했다. 점원이 내게 뭐라고 이야기했지만 늘 그렇듯 알아듣지 못했다. 점원은 '애니띵 엘스?' 하고 물었고, 나는 샌드위치를 달라고 했다. 점원은 샌드위치 대신 디저트가 있다며 진열대를 가리켰다.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밥이 아니기 때문이다.

  멜버른에 온 지 4일 만에 1일 2 라떼에 성공했다. 오렌지 라떼는 오묘했다. 크림이 부드럽지만 너무 달지도, 느끼하지도 않고 상콤한 오렌지 향이 커피와 조화로웠다. 내내 허기와 추위라는 거지 2종 세트와 함께하던 내게 '넌 거지가 아니야.' 하고 일깨워주는 맛이었다.

  이제는 진짜 밥을 먹어야 했다. 시내로 가는 트램 정거장에 왔는데 전광판에는 30분 뒤에 도착한다고 떠있었다. 하지만 구글맵에는 잠시 후 도착이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화장실이 가고 싶었다. 작은 방광이란 슬픈 운명의 굴레에 갇힌 나는 여행 때마다 낭패를 봤기에 어느 쪽을 믿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인간은 본인 좋을 대로 생각하는 법인지라 트램을 기다리기로 했다.

  오지도 않은 트램이 구글맵 상에서 떠나고 도착 예정 시간이 변경되기를 반복했다. 초연했던 나는 불안한 걸음으로 정거장을 배회하며 욕을 갈겼다. 흡사 광인 같은 모습에 내 주변에만 사람이 없었다. 결국 전광판에 떴던 시간을 채우고서야 트램이 왔다. 트램에서는 괜찮았는데 목적지에 가까워 올수록 방광은 자비가 없어졌다. 신호등 앞을 가로막고 선 인간들을 밀치며 '다 꺼져! 오줌 싸야 돼!' 소리치고 싶었다. 차에 치이든가 말든가 길 건너는 것 외에는 뵈는 게 없었다. 제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게 해 달라며 애원해서인지 예정보다 빠르게 카페에 도착했다. 카페는 마감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알게 뭔가. 잠시 해방과 자유의 시간을 가진 끝에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게 된 나는 카운터로 가 '주문할 수 있나요?' 물었다. 점원은 미안해하는 표정으로 마감했다고 했지만 나는 괜찮았다. 이곳에서의 목적을 다 했기 때문이다.


  <남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라>

  저녁을 먹으러 이태리 식당 Fogria di fico에 갔다. 문 열기까지 시간이 남아 주변을 걸었다. 건너편 통유리 건물이 석양을 반사해 맞은편 건물에 물결을 드리우고 있었다. 오자마자 멜버른이 마음에 들었지만 아직 마음에 와닿는 아름다운 풍경을 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주홍빛 건물 위로 일렁이는 빛깔, 그 너머 펼쳐진 하늘은 너무 아름다웠다. 홀린 듯 감옥이 있는 건너편으로 걸어갔다. 이렇게 예쁜데 주위에 관광객 하나 없이 정복을 입은 몇 사람만이 드나들었다. 이 건물은 대체 뭘까? 주위를 살피니 안내문이 하나 있었다. 감옥이었다. 그래서 개미 한 마리 얼씬도 안 하는 거였군.

  감옥 둘레길을 걷는데 석양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곳에서 발견한 아름다움은 온전히 나만 소유할 수 있기에 더 즐거웠다. 모퉁이를 돌자 감옥 위로 크게 뜬 무지개가 보였다. 가려고 했던 카페도 못 가고, 트램도 오래 기다렸지만 흐린 멜버른에서 선명한 무지개는 뜻밖의 선물이었다.

  여담이지만 감옥 사진을 본 스코티시는 저기가 원조 매드맥스(1979)에 나온 장소 같다고 했다. 찾아보니 멜버른에서 매드맥스를 촬영하기는 했더라. 영화를 안 봐서 사실 유무는 모르겠지만.


  <이태리 식당에서 국밥 한 그릇>

  석양을 좀 더 보려고 다리를 따라 내려갔다. 왼쪽으로는 철도 오른쪽으로는 빌딩숲이 펼쳐져있었다. 끝까지 아래로 내려왔을 때 강과 다리가 보였다. 유람선에서 뽕끼 가득한 음악이 흘러나왔고 순간 여기가 한강인가 싶었다.

  이태리 식당에 들어서자 점원은 예약을 안 했다는 내게 뭐라고 길게 이야기했다. 나는 다 한 귀로 흘리며 '영어 좀 그만해...'라고 생각했다. 혼자 여행의 장점은 예약을 안 해도 된다는 거지,라고 생각하며 메뉴를 펼쳤다. 예상보다 훨씬 비싼 가격에 왜 그는 나를 입뺀 하지 않았는가에 대해 곱씹었다. 조용히 나갈까 잠시 고민하다가 이왕 여행 온 거 나를 위한 선물을 하기로 했다. 해산물 오일 파스타를 시켰는데 해물이 풍부하게 들어 있었다. 맛은 당장 내가 주방 들어가서 만들어도 될 법한 평범한 맛이었다. 다들 가족, 연인끼리 와서 이야기를 나누고 분위기를 즐겼는데 나만 근엄한 얼굴로 국밥 말아먹듯 해치웠다. 시드니로 돌아가면 빨리 일 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일과를 마무리한 후에 구글맵을 보며 아직 못 간 곳을 확인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바다에 별표가 찍혀 있었다. 나는 대머리를 곁들인 멜버른 남에게 바다까지 태워줄 수 있냐고 연락했다. 어렴풋이 예감하고 있었다. 답이 오지 않으리란 걸. 무엇이든 한 번 어그러진 것은 전과 같을 수 없으니까. 어쨌거나 멜버른에서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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