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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쵸 Sep 02. 2023

이렇게 워홀 가면 안 된다 표본의 개노답 워홀기 14

멜버른은 내 정착지가 될 자격이 있는가? 멜버른 여행 6일 차

  <멜버른 여행 6일 차:브런치 카페 Hardware Société/도서관/사우스 멜버른 마켓/st ali coffee loster/세인트 칼다 비치/야라리버 야경>



  <늦게 일어난 자만이 먹을 수 있는 것>

  이제 일찍 일어나는 건 포기했다. 대머리남에게는 아직도 연락이 없었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나는 결과로부터 원인까지 과정을 역추적하곤 한다. 어디서부터 어그러졌나, 그때 그러지 않았더라면 다른 결과에 서 있었을까 가정한다. 마지막으로 언젠가 지금의 반추가 우스우리만큼 괜찮아지는 순간이 올 것임을 되새긴다. 어쩌면 지금이 다른 완벽한 결말을 위한 단계일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 지금 이 순간도 대머리에 비해 너무도 과분한 내가 스스로 제물 길을 걷는 게 안타까워 우주가 개입한 걸지도 모른다. 그러니 아쉬울 것도 없다. 얼마 남지 않은 여행을 알차게 즐기기에도 부족하니까.

  느지막이 시티에 있는 브런치집 Hardware Société에 갔다. 세련된 외관과 달리 내부는 80년대 미국 영화 속 식당처럼 아기자기하고 귀여웠다. 좁은 면적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길쭉한 일자 식탁이 종으로 놓여 있었는데 만석이라 합석이 불가피해 보였다. 저 좁은 곳에 다닥다닥 부대껴 앉아야 한다니, 생각만으로 끔찍해서 뒷걸음질로 나갈 뻔했다.

  예상대로 앞, 옆사람과의 좁은 간격은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점원이 오늘의 음식이 적힌 쪽지와 메뉴판을 건넸다. 이곳의 대표 음식은 토스트류였지만 내게 단 음식은 식사가 아니기에 포크 밸리&프라이드 에그를 주문했다. 거기다 커피까지 하니 꽤나 부담되는 가격이었다. 맛없으면 가만 안 둔다, 하고 첫 입을 먹는 순간 괘씸함과 언짢음이 사르르 녹았다. 싱싱한 어린잎 채소와 독특한 크림소스를 얹은 반숙, 부드러운 돼지고기와 바게트는 조화로웠다. 근엄한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진짜 맛있다고 감탄을 연발했다. 그 감동이 어느 정도였냐면 커피를 유리잔에 내온 것도 눈 감아줄 수 있을 만큼이었다. 하지만 계란 아래에 깔려있던 거지 같은 콩이 모습을 드러낸 뒤로 먹는 속도가 현저히 느려졌다. 슬슬 배도 차서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는데 점원 아저씨가 다가와 그릇을 가져가려 했다. 나는 다급히 '노!'를 외쳤다. 호주에서는 어디를 가건 직원들이 뷔페 그릇 치우미처럼 수시로 접시를 가져가려고들 하는데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다. 결국 거지 같은 콩까지 모두 해치운 후에야 그릇을 넘겨주었다.


  <눈이 있지만 볼 수 없기에>

그냥 잘 생겨서 찍음 / 귀걸이 한 짝 잃어버림..^^.....

  읽을 수 있는 책은 한 권도 없으면서 또 도서관에 왔다. 글이나 써볼까 싶었지만 노트북을 가져오지 않았다. 어제 글을 쓴답시고 노트북을 챙겼다가 한 글자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달리 할 일이 없어서 일기를 썼다. 호주에 온 이후로 생긴 습관인데 감정을 관찰하고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였다. 워홀 오기 전 짐을 쌀 때 정작 필요한 팬티랑 수건 대신 이면지며 공책을 죄다 챙겨 왔다. 영어 공부 용으로 말이다. 그런데 정작 공부 대신 힘들 때 쓰는 일기장으로 소진했다.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면지는 빠른 속도로 폐지가 되어 버려졌다.

  도피성 여행이 끝나고 시드니로 돌아가면 뭘 해야 할지 막막했다. 어학원을 다시 다니고 싶지도, 일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시드니보다는 멜버른이 내게 더 잘 맞는다는 것 하나만 분명했다. 하지만 집 최소 거주 기간이 한 달이나 남아 지역 이동을 할 수도 없었다. 이는 미리 세컨을 따러 갈 수도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사실 세컨이 내게 필요한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혼란스럽고 힘들었던 것과 별개로 호주는 내게 전혀 매력적인 국가가 아니었으니까. 보통 고통이 어디서 기인했는지 속으로 생각만 했을 때는 불분명하지만 글로 쓰다 보면 명확해진다. 하지만 아무리 강박적으로 일기를 붙잡고 있어도 전혀 명쾌해지지 않았다.


  <무소유로 시장에 존재하기>

  사우스 멜버른 마켓에 가기 위해 트램을 탔다. 동년배와 갔던 퀸 빅토리아 마켓보다 훨씬 규모가 커서 상점 수도 많고 품목도 다양했다. 퀸 빅토리아 마켓에서는 해산물도 굴이나 새우가 주였고 서서 먹어야 했는데 사우스 멜버른 마켓에는 랍스터도 있고 않아서 먹을 공간도 있었다. 그 외에 초콜릿, 수제 디저트, 꽃 집, 뷰티 살롱, 인테리어 제품, 식당, 카페 등 시장이라기보다는 대형 마트에 가까웠다. 난 아무것도 사지 않았다. 캐리어 두 개와 백팩을 이고 지고 다니며 짐이 족쇄임을 체감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 집'이 없는 지금 소유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결정적으로 시장이지만 가격은 백화점과 다름이 없었다.

  내부를 다 돌고 바깥으로 나왔을 때 기둥에 묶여있는 개를 발견했다. 오래간 나쵸와 페퍼를 보지 못했기에 개만 보면 몸이 반응했다. 개 옆에 쪼그려 앉자 근처에 있던 할아버지가 내게 말을 걸었다.

  "얘 내 딸이 키우는 개인데 이름 브루노야."

  그리고 그는 홀연히 사라졌다. 내가 개 훔쳐가면 어쩌려고요; 나는 카페에서 남의 노트북을 대신 지켜주는 사람처럼 브루노의 옆을 지켰다. 얼마 뒤 그의 딸이 나타났다. 우리는 짧은 대화를 나누고 헤어졌는데 자꾸만 다시 마주쳤다. 그럴 때마다 나는 못 본 척 어색하게 허공으로 시선을 돌려야 했다.


  <호주가 변방 거지섬을 탈출하는 법>

  오늘의 두 번째 커피는 St ali coffee loster에서 마시기로 했다. 순전히 사우스 멜버른 마켓에서 가까웠기 때문이다. 카페는 여러 방면에서 힙스러움을 뿜어냈다. 나무로 된 인테리어와 정비복 같은 직원들의 유니폼, 심지어 화장실까지. 나는 따뜻한 라떼를 주문했는데 역시나 유리잔에 담겨 나왔다. 커피를 유리컵에 안 담으면 추방된다는 헌법이라도 있는 걸까? 구준엽과 똑딱 핀처럼 뜨거운 커피와 유리잔은 호환되지 않는다. 배달 음식을 시켰을 때 뜨거운 국물이 비닐에 담겨 오면 맛있게 먹으면서도 환경 호르몬 걱정이 된다. 그런데 뜨거운 음료에 유리잔은 환경 호르몬도 없는데 찜찜하게 만든다. 심지어 맛도 없다. 커피의 도시로 유명한 멜버른까지 이 지경임을 통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호주가 변방 거지섬을 탈출하려면 뜨거운 음료 유리잔에 내오면 감옥 보내는 법을 만들어야 한다.


  <구름 낀 날에는 석양을 볼 수 없다>

그냥 람부탄같이 생겨서 찍음

  내 여행 방식은 별표를 마구잡이로 찍고 근처를 쭉 훑기다. 그렇게 다음 목적지는 세인트 칼다 비치로 낙점됐다. 원래 바다들이 죄다 외곽에 있어서 갈 생각이 없었는데 왜 별표를 찍어놨는지 가물가물했다. 그래도 이왕 가는 거 석양이나 보고 와야지. 대머리가 외면하지만 않았더라면 차로 편하게 갈 수 있었을 텐데...

  정거장에 내리니 전형적인 바닷가 동네가 나왔다. 멀리 보이는 넓은 잔디밭과 야자수가 여태껏 구경한 멜버른과 판이했다. 기대감을 안고 10분여간을 걸어 도착한 곳은 인천 앞바다였다. 횟집 없는 소래포구와 다름이 무엇인가. 인천이 고향인 사람이 향수병을 달래기 위해 올법한 곳에 왜 별표를 찍었는가? 심지어 나는 인천인도 아닌데.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은 석양은커녕 음침함만 가득했다. 대머리남이 같이 왔더라면 다른 의미의 석양을 볼 수 있었을 텐데... 씁쓸함을 장착찬 채 사연 있는 사람처럼 바다를 거닐었다. 이 날씨에 수영을 하는 광인 한 명을 제외하고는 볼만한 게 하나도 없었다. 그새 하늘은 캄캄하게 물들어서 더욱 음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트램 승차장으로 터덜터덜 향하는데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스타킹 올이 나가 있었다. 근처에 시드니에도 있는 루나 파크 놀이공원이 있었는데 가본 적도 없는 월미도에 온 것 같았다. 여기 왜 별표를 찍었는지 나중에 기억났는데 아주 작은 펭귄의 서식지라서였다. 물론 내가 본 건 인천 뿐이지만.


  <자연 꺼져!>

  시장 이후로 계속된 잘못된 선택을 만회하기 위해 야라 리버에 가기로 했다. 둘째 날 얼결에 들르긴 했지만 아직 야라 리버의 야경을 보지 못했으니까.

  밤의 야라 리버는 낮보다 압도적이었다. 강 양 옆으로 끝없이 펼쳐진 상점과 불빛들, 그 뒤로 마치 팝업 카드처럼 펼쳐진 빌딩 숲... 얼마 만에 보는 제대로 된 도시인가. 세인트 칼다 비치에서 잡쳤던 기분이 야라 리버를 걷는 것만으로도 들뜨기 시작했다. 이거지, 자연 꺼져!

  맞은편으로 건너가니 빌딩숲이 더 가까이 보였다. 브루클린 브릿지를 건널 때 받았던 거대한 빌딩숲이 가까워져 오는 느낌을 야라 리버에서도 느꼈다. 둘이 동급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어디가 보급형인지는 다들 알 테니 굳이 언급하진 않겠다. 그래도 시드니보다는 멜버른 야경이 훨씬 멋졌다. 시드니에서 현저히 낮아진 눈이 매사에 감동을 느끼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 고맙다, 시드니야.


  <잡탕찌개의 나라 호주에서 가장 핫한 곳>

  여태껏 나처럼 호주를 싫어하는 사람을 본 적 없다. 주변에서 나는 호주 혐오자로 불렸으며, 내가 한국에 갔다가 다시 돌아온다 할 때 다들 '안 올 것 같은데...'라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호주는 도시로서의 매력도 자연으로서의 매력도 애매했다. 도시 중 도시를 원한다면 뉴욕, 고풍스러운 건물을 좋아한다면 유럽, 흥청망청 놀고 싶다면 태국, 대자연의 위엄을 느끼고 싶다면 북남미. 하지만 호주는? 잡탕찌개처럼 특성도 매력도 없는 변두리 섬나라일 뿐. 그게 미국병, 태국병은 있어도 호주병은 없는 이유다.

  그렇다면 이 변두리 섬의 장점은 무엇인가? 바로 포도다. 얼마나 장점이 없으면 포도 따위가 장점인가는 중요치 않다. 죄다 비싸고 짜고 맛없는 나라에서 포도라도 맛있다는 게 어디인가. 그래서 호주에서의 몇 안 되는 나의 낙은 포도 먹기다. 멜버른에 온 이후로 못 먹은 포도를 사려고 울월스에 가는데 유독 시드니 시티 같은 구역이 나왔다. 이 익숙한 꼬질꼬질함... 멜버른도 어쩔 수 없는 호주구나 싶어 갑자기 후져 보이기 시작했다.

  장을 본 뒤 트램을 기다리는데 문득 마이키 카드 잔고가 얼마 남았을까 궁금해졌다. 기기에 카드를 대니 잔액이 0원으로 떴다. 멜버른 시티 중심은 무료 트램 존이어서 트램을 무료로 탈 수 있다. 그 구간을 지나면 카드를 탭 해야 하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 현지인들을 보고 배우기까지 했는데. 믿을 수 없어 다시 확인해도 결과는 같았다. 욕이 나왔다. 호주에 오고 는 건 욕과 무단 횡단 실력뿐이다. 하는 수 없이 최소 단위인 5불을 충전하고서 내일부터는 더 뻔뻔해지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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