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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쵸 Sep 18. 2023

이렇게 워홀 가면 안 된다 표본의 개노답 워홀기 16

멜버른은 내 정착지가 될 자격이 있는가? 멜버른 여행 8일 차

  <멜버른 여행 8일 차:Good measure/디저트 카페 Tori's>



  <멜버른에서 두 번 간 곳은>

  멜버른에서 간 곳 중 재방문하고 싶은 곳은 오렌지 커피(몽블랑)를 마셨던 Good measure와 브런치 카페 하드웨어 소사이어티, 숙소 근처의 바이트 오브 라이프다. 오늘은 Good measure에서 바리스타와 몽블랑 커피를 마시기로 했다. 주변에 멜버른 대학교뿐이어서 동선이 애매했지만 추운 날 커피로 몸을 녹였던 기억이 좋았다. 나무에 초록 식물로 특색을 준 인테리어도, 장식용이 아님을 알리듯 내내 돌던 엘피와 노르스름한 조명까지도. 가게에 있는 모두가 차가운 몽블랑 커피를 마시고 있었지만 나는 따뜻한 음료를 주문했다. 그렇게 시작된 듣기 평가 시간. 안 된다는 알겠는데 이유는 알아듣지 못했다. 원래 안 되는 건가? 이번만 안 되는 건가? 하지만 다시 묻는다고 알아들을 리 없기에 언제나처럼 진실은 저너머에 묻어야 했다.

  "그래.. 그냥 아이스로 줘.."

  맛없으면 가만 안 둔다... 영어를 못 해서 예스맨이 되곤 하지만 속내는 그렇지 않았다. 다행히 차가운 몽블랑 커피는 새콤한 첫 입부터 맛있었다. 하지만 크림은 음료의 치트키, 일부러 맛없게 만들기가 더 힘든 법이다. 분명 맛은 있는데 자꾸만 아쉬움이 남았다. 오렌지 향이 첨가된 흔한 아인슈페너보다는 따뜻한 몽블랑 커피가 더 특별했으니까. 얼음이 반인 손바닥만 한 잔에 담긴 커피는 몇 모금 마시지도 않았는데 사라졌다. 순식간에 음료를 해치우고 멍하니 바리스타를 기다렸다. 무의식적으로 잔을 들 때마다 얼음 위에서 분해된 느글대는 크림만이 입술에 닿았다. 뒤늦게 도착한 바리스타도 아이스 몽블랑 커피를 주문했다. 음료 사진을 같이 찍고 싶었지만 내 잔에는 크림 찌꺼기와 얼음뿐이었다. 곧이어 바리스타의 음료도 내 것처럼 됐지만.

  어제 하루를 꽉 채워 수다를 떨었으면서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여기서 읽는 이는 영어도 못하면서 어떻게 소통을 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실력차가 많이 나면 한쪽이 복장이 터지지만 둘 다 못 하면 역설적으로 소통이 원활해진다. 모호한 문장 속에서 화자의 숨은 뜻을 읽는 능력이 증대되는 셈이다.


  <일단 유명해지면 똥을 싸도 박수를 쳐준다>

  3시, 어지간한 카페는 문을 닫았지만 밥을 먹기도 애매한 시간. 메뚜기떼처럼 다음 거처를 찾아 헤매야하는 막막함에 잠겼다. 아직 공복인지라 허허벌판에 덜렁 있는 KFC에서 대충 나트륨을 때려 넣었다. 그리고 힙한 분위기와 디저트로 유명한 한국식 카페 Tori's로 향했다. 줄 설 각오를 하고 오긴 했지만 가게 밖에 서서 케익을 먹는 사람을 보자 뒷걸음질 치고 싶어졌다. 저렇게 먹을 바에는 안 먹고 싶었기 때문이다.

인테리어 대충 뭐 이런 느낌

  이왕은 언제나 사람의 발목을 붙잡는다. 이왕 여기까지 온 거, 그 얄팍한 심리가 더 큰 피해를 초래한다. 직감을 따르지 못한 죄로 나는 긴 줄에 합류했다. 그렇게 입성한 가게는 얼핏 보면 그럴싸했지만 인테리어에 통일성이 없었다. 힙해 보일법한 잡동사니들을 마구 때려 넣었기 때문이다. 흔한 한국 핫플 카페 같으면서도 자체 제작 상품들은 일본풍이어서 브랜드로서의 철학이 없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때? 힙하지? 사진 찍고 싶지? 그럼 와서 돈이나 써라! 곳곳에서 읽히는 생각이 너무나도 촌스러웠다. 하지만 여기는 전시회장이 아닌 카페니까 가장 중요한 건 맛이다. 그런데 진열장에 있는 케익은 2009년에 머물러 있었다. 마트에 납품하는 기본형 공장 제조 케익. 한국에서는 음식 트렌드를 따라잡기가 힘들었는데 호주에서는 뒤처진 실태에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호주는 전통도 없는 주제에 왜 2010년으로 나아가지 못하는가.

  호주 카페 디저트 지분 90%는 크루아상이다. 그 외에 불량식품 느낌 팍팍 나는 쿠키나 간혹 브라우니 정도. 그놈의 크루상에 넌덜머리가 난 나는 한국에서는 줘도 안 먹을 케익들 중 뭘 먹을지를 골라야 하는 난제에 빠졌다. 내가 좋아하는 과일 생크림 케익에는 떡하니 딸기가 박혀 있었다. 호주 딸기는 빨간 부분도 심지의 흰 부분 맛이 나는 데다 서걱거리는 식감이 오이와 다름없었다. 베리류도 별다른 맛이 없고 초코 흉내를 내는 장식용 종이 같았다. 그렇게 하나씩 함정들을 제하다 보니 초콜릿 케익 하나 남았다. 드디어 내가 주문할 차례가 왔고, 점원은 '앉을자리가 안 날 수도 있는데 일단 주문은 하셔야 돼요~'를 시전 했다. 왜 가게 밖에서 서서 먹고, 매장에 서성대는 손님들이 앉아있는 자들을 노려봤는지 그제야 알았다. 이때라도 박차고 나갔어야 했는데 '이왕 기다린 거'가 또다시 내 발목을 잡았다.

  음료와 케익은 금방 나왔는데 자리가 없었다. 들어온 순서대로 앉는 게 아니라 먼저 앉는 놈이 임자인 방식이었기에 자칫하면 영원히 못 앉을 수도 있었다. 우두커니 서서 기다리는데 앉아서 수다를 떠는 사람들을 빗자루로 쓸어 밖에 내다 버리고 싶었다. 다 먹었으면 나가주겠니? 여기 서 있는 거 안 보여? 눈치 없어? 다행히 매의 눈을 가진 바리스타 덕에 빠르게 앉을 수 있었다. 화장실 들어갈 때랑 나올 때 다르다더니 앉고 나니 아까 전의 나 같은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게 됐다.

  커피는 나쁘지 않았다. 멜버른은 커피 맛이 상향 평준화 되어 있기에 어딜 가도 기본은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케익은... 종아리를 걷어야 하는 맛이었다. 기다리는 시간이나 과장된 가격 때문에 점수가 깎인 게 아니라 객관적으로 흔한 마트 케익이었다. 초콜릿과 토핑이 조화롭지 않은 데다 초콜릿 자체도 그닥이었다. 달콤하지도 그렇다고 적절히 씁쓰름한 것도 아닌, 익다만 홍시 같은 어정쩡한 초콜릿이었다.

  손님 수와 맛이 비례하지 않는 건 호주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한국에서도 여기가 왜 유명한가에 대한 의문을 넘어서 쓰레기를 음식이랍시고 파는 곳이 많으니까. 그래도 인테리어가 멋지거나 다른 장점이 있다면 그나마 상쇄가 되는데 여기는 무엇도 없었다. 그렇다면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지불한 만큼 이용시간으로 만회하는 수밖에 없다. 본격적으로 수다를 떨기 위해 코트로 배를 가리고 슬쩍 지퍼를 풀었다. 숨 쉬기가 한결 자유로워졌고, 카페에 계속 머물고 싶어졌다. 당연히 여기가 좋아서는 아니다. 다시 지퍼를 올릴 생각을 하니 끔찍했기 때문이다.

복부는 자유예요...!


  <부초 둘이 손을 꼭 잡고>

  리버티 도서관 앞에서 바리스타와 함께 트램을 기다렸다. 내일이면 시드니로 돌아가야 했고, 우리에게 다음이 있을지를 확신할 수 없기에 더욱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내 거취가 어떻게 될지 나도 몰랐고, 바리스타 또 한 그랬으니까. 낯선 땅에 홀로 떨어진 뒤로 마음이 약해졌는지 갑자기 눈물이 터질 듯 울렁댔다. 이럴 때 불안은 껴안은 누군가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됐다. 부초 같은 처지인 우리 사이에는 언어를 넘어선 유대가 있었기에. 워홀에서 만난 인연은 언제든 헤어질 수 있고, 다음을 기약한다 해도 그 순간이 마지막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늘 그렇듯 우리는 다음을 기약했다. 멜버른에서든, 시드니에서든.

 시티를 뒤로하고 떠나는 길, 점차 차분해지는 주변 풍경들. 불빛이 줄어드니 얼마나 밤이 깊었는가가 와닿았다. 맥도날드 맞은편 트램 정거장에 내려 숙소까지 걸어갔다. 멜버른에만 오면 분명해질 것 같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시드니가 나를 위한 곳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지만 뭘 해야 할지,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른 채 무턱대고 지역을 옮길 자신이 없었다. 차라리 그간 놀면서 까먹은 돈도 메꿀 겸 세컨 비자를 미리 따러 갈까? 기승전 호주 욕으로 귀결되는 판국에 비자 연장은커녕 1년을 채울지도 불확실했지만, 그렇다고 한국으로 돌아갈 용기도 없었다. 미련이 남지 않을 만큼 최선을 다하지 않았음을 스스로가 더 잘 알았기에.

  불현듯 나는 건너 건너 알게 된 양공장 노동자가 떠올랐다. 그래, 여행이 끝나면 양공장에 가자. 지금이 새로운 곳에서 혼자 헤쳐나갈 절호의 기회였다. 어쩌면 그곳에서 나약한 마음은 강해지고 범람하는 생각들은 잠재워질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는 내 다음 행로를 양공장으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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