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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쵸 Sep 11. 2023

이렇게 워홀 가면 안 된다 표본의 개노답 워홀기 15

멜버른은 내 정착지가 될 자격이 있는가? 멜버른 여행 7일 차

  <멜버른 여행 7일 차:케틀블랙 카페/Beast city 버거/듁스 커피 로스터즈/플린더스역/By korea 한식당>



  <남의 생일만한 TMI는 없다>

  늘 그렇듯 느지막이 사우스 야라의 아침이 밝았다. 내가 늦게 일어났기 때문이다. 허겁지겁 전날 장 봐온 요거트와 프링글스, 포도를 먹어치우고 길을 나섰다. 오늘은 바리스타가 일하는 카페 '케틀 블랙'에 놀러 가기로 했다. 바리스타가 시드니에 여행 왔을 때 처음 보고 일주일 만이었다. 공교롭게도 오늘은 왕의 생일(찰스 x 엘리자베스)로 빅토리아주의 공휴일이기도 했다. 시급이 배로 줘야 하기 때문에 가게를 열지 않거나 손님에게 추가 비용을 부담시킨다고 했다. 호주는 주마다 공휴일이 다르지만 영국 속국답게 왕의 생일은 모든 주에 존재하는데 왜 하필 내가 여행 왔을 때란 말인가? 대체 걔 생일이 나랑 무슨 상관? 수영장 일진들이 강사 선물 명목으로 돈을 걷는 것과 다름이 무엇인가. 돈 뜯어 가는 방법도 가지가지구나 싶었다.


  <제사나 챙겨라>

  트램에서 내렸을 때 근처에 별다른 게 없었다. 기념관 같은 게 있긴 했지만 호주에 대한 어떤 것도 머릿속에 집어넣고 싶지 않았기에 그대로 지나쳤다. 바리스타가 일하는 카페는 예상보다 더 미어터지고 있었다. 바리스타는 포장 손님을 위한 야외 좌판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벌써부터 혼미해지려는 정신을 겨우 붙잡았다. 약속을 잡을 때 바리스타와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나 카페 놀러 가면 몰래 공짜 커피 줄래?'

  '가능하면. 바빠서 될지 모르겠지만.'

  공짜 커피는 텄구만. 바리스타에게 인사도 못 하고 우물쭈물 대는데 그의 동료와 눈이 마주쳤다. 동료의 언질에 바리스타가 돌아보았다. 두 번째 만남, 심지어 본 지 일주일 밖에 안 됐는데 어찌나 반갑던지. 바리스타의 배려로 영어를 쓰지 않고 바로 착석할 수 있었다. 가게에는 듣던 대로 오늘은 왕 생일이니 추가 금액이 붙는다는 안내표지판이 비치되어 있었다. 제사나 챙겨라...

멜번에서 워홀을 했어요, 철이 없었죠.. 커피가 좋아서 워홀을 오다니..

  항상 라떼만 먹지만 오늘따라 단 게 먹고 싶었다. 초코라떼를 주문하니 마시멜로우가 함께 나왔는데 처음에는 압축 물티슈인 줄 알았다. 마시멜로우를 좋아하지 않지만 가성비충은 음식을 남기지 않는다. 마시멜로우를 초코라떼에 마시멜로우를 퐁당 빠트려 먹어보았다. 음~ 별로네... 신발 밑창을 부드럽게 만들면 이런 맛일 것 같았다. 게다가 음료가 너무 달았다. 공복이라 그런지 몰라도 속이 느글거렸다. 요거트랑 프링글스, 포도는 밥이 아니냐고요? 네, 그런 건 밥이 될 수 없습니다. 저는 명백한 공복 상태였어요. 물론 남김없이 다 마셨다. 추가 비용이 붙는 마당에 남기면 더 비싼 금액을 지불하는 셈이 되기 때문에. 그 정도로 지독한 가성비충인 내가 브리즈번에서는 굶주렸음에도 음식을 남기게 되는데... 자세한 이야기는 '지도에서 파버리고 싶은 도시, 브리즈번'편에서 공개됩니다.

  바리스타를 기다리며 일기를 써 내려갔다. 혼란한 마음이 일기를 쓰는 순간에는 조금쯤 나아졌기 때문이다. 책 읽으려고 이북리더기도 챙겨 왔는데 일기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새 바리스타는 퇴근을 했고, 나는 켜보지도 못한 이북 리더기를 머쓱하게 집어넣었다. 일주일째 쓰지도 않을 물건을 죄다 챙겨 와 가방을 무겁게 들고 다니고 있다니.

  시티행 트램을 정거장에 가는 길, 바리스타는 공휴일이라 시급을 배로 받는다고 즐거워했다. 날강도들이라고 불평을 나와 확연히 다른 태도에서 근로자와 소비자의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늘 트램을 탈 때마다 방향을 몇 번씩 확인하느라 트램을 지나쳐보내야 했는데, 멜버른 고인 물인 바리스타 덕분에 편하게 탈 수 있었다. 그런데 바리스타가 카드를 찍지 않았다. 나도 반사적으로 카드를 찍으려던 손을 거두었다.

  "여기 무료 트램 존 아니잖아?"

  바리스타는 눈치 좀 챙기라는 듯한 표정으로 내게 속삭였다.

  "원래는 찍는 게 맞는데, 공휴일은 검문 안 해서 괜찮아."

  오늘 가는 모든 가게에서 강제로 추가 비용을 낼 테니까 이 정도는 괜찮다. 가난한 워홀러에게 아주 합리적이고 쏠쏠한 팁이었다. 나는 바리스타의 빠른 판단력과 대범함에 감탄했다.


  <살어리 살어리렷다 시티에 살어리렷다>

  파란색을 주로 사용한 팝아트풍의 햄버거 가게, Beast city. 메뉴가 너무 많은 데다 당연하게도 다 영어로 적혀 있어서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때 눈에 들어온 슈퍼주니어라는 K-버거, 주문을 하려다가 김치가 들어갔단 설명에 멈칫했다. 안전하게 대표 메뉴인 '비스트 우드 버거'를 택했다. 음~ 버거 주제에 16불~ 감튀도 없는데 싸가지도 없어.. 게다가 여기서도 추가 금액을 피해 갈 수 없었다. 그래도 이왕 먹는 거 돈 생각하지 말자고 되뇌었다. 나는 화장실을 다녀오기 위해 넓지도 않은 매장 끝까지 걸어갔으나 그곳엔 벽뿐이었다. 젠장, 또 영어 써야 되네... 나는 점원에게 다가가 물었다.

  "여기 화장실 어디예요?"

  "없어요."

  "네..? 원래 화장실이 없었어요?"

  "아니, 없어요."

  "있었는데..?"

  "아니, 없어요. 그냥."

  그럼 너넨 어디서 볼일을 본단 말이냐...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조용히 자리에 다시 앉았다. 곧이어 음식이 나왔다. 평범하디 평범한 햄버거맛이었다. 바리스타가 주문한 버거에 딸려 나온 감자튀김도 먹어 봤는데 그냥 케이준 양념 감자였다. 버거만으로도 비싼데 이거 좀 껴준다고 가격이 훌쩍 뛰다니, 날강도들... 한국에서는 치킨 한 마리 가격으로 여기서는 버거 단품만 먹을 수 있음에 아직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호주 워홀 빠른 적응의 관건은 한국물을 빨리 빼는 것이다. 가격도, 품질도 한국과의 비교를 멈추고 그러려니 하는 자에게 적합한 것이 워홀인데 나는 그러지를 못해 이리도 힘든가 보다.

  내일 지구가 망해도 사과나무를 심어야 하듯이 아무리 배가 불러도 커피는 마셔야 한다. 그간 부지런히 돌아다녔는데도 못 가본 카페가 많았다. 당연히 내 잘못은 아니고, 카페들이 죄다 일찍 닫기 때문이다. 카페에 가기에는 살짝 늦은 감이 있었는데 '듁스 커피 로스터즈'는 아직 영업 중이었다. 아직 못 가본 별표 장소이자 철이 없어 커피가 좋아 워홀을 온 바리스타도 인정한 곳이기도 했다.

  윌리엄 모리스풍의 벽지와 어두침침한 조명이 작지만 아늑한 카페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독서실처럼 벽을 보고 일렬로 주르륵 앉게끔 되어 있었는데 자리마다 콘센트가 구비되어 있었다. 혼자 노트북을 하거나 시간을 보내기 최적화된 장소였다. 자리가 없는지 좁은 내부가 서 있는 사람들로 꽉 차있었다. 앉아야 했다. 음료값에 자릿세 포함이라 포장하면 손해니까. 좁은 통로를 뚫고 들어가니 구석에 자리가 하나 있었다.

  우리는 라떼와 피스타치오컵케익, 쿠키를 주문했다. 나는 쿠키를 좋아하지 않아서 그 유명한 뉴욕 르뱅쿠키도 먹자마자 '윽' 소리가 나왔기에 평가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바리스타는 굉장히 만족스러워했다. 사실 나는 컵케익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데 기름기가 많다는 편견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 건 느끼하지도 너무 달지도 않고 담백했다. 제형도 단단한 편에 가까워서 자르기도 편했다. 나는 컵케익을 가로로 반 잘라 마카롱처럼 크림이 가운데 오게 얹었다. 모양은 덜 예쁘지만 추잡스럽게 먹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시험기간에 방청소만 해도 시간이 훌쩍 지나듯이, 금방 영업 종료 시간이 가까워졌다. 메뚜기떼처럼 다음 장소를 찾아다녔지만 파란 하늘이 분홍빛으로 물드는 동안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분위기 좋고 인기 많은 카페들은 죄다 일찍 열고 일찍 닫기 때문에. 한참을 걷다 보니 플린더스 역에 도착했다. 순전히 사진만을 위한 장소인 이 앞에서 사진을 남기지 못했는데 바리스타 덕분에 찍을 수 있었다.

  금세 하늘이 어둑해졌다. 우리는 감성 카페 찾기를 포기하고 '오래 운영하는' 식당 겸 카페에 갔다. 카페에서는 촌스러운 빵을 팔았고 이태리 식당에는 푸드코트 느낌이 공존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잡탕찌개 같은 곳, 끔찍한 혼종에 몸이 거부했지만 멜버른 시티에 우리를 품어줄 곳은 여기가 유일했다. 감성이 없어 카페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지만 커피 맛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에서 음미하며 마실 이유는 없었기에 대충 숭늉처럼 때려 넣고는 커피 두 번 마시기 성공했음에 의의를 두었다.


  <말은 제주로 사람은 멜번으로>

  어느덧 어둑해진 하늘, 우리는 저녁으로 한식을 먹기로 했다. 시티 내에 있는 한식당 By Korea는 대부분 해외에 있는 한식당처럼 분식과 포차를 아울렀다. 잡탕찌개 가게는 근본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한식당에 한정해서는 오히려 괜찮았다. 어차피 전문점이 없으니 차라리 뷔페처럼 다양한 메뉴를(물론 맛도 뷔페 수준을 벗어나지 않는)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기서는 영어 안 써도 되니까. 궁금한 게 있으면 자유롭게 물어볼 수도 있고.

  "배가 많이 고프진 않은데 김치부침개랑 떡볶이 두 명이 먹기에 괜찮을까요?"

  "음.. 양이 많을 것 같은데 하나 시키고 다시 시키시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그래서 김치부침개를 먼저 주문했다. 사람이 많은 데다 배달 주문도 계속 들어오고 있어 음식이 나오기까지 꽤 오래 걸렸다. 손바닥부침개.. 아니, 김치부침개의 손바닥만 한 양에 우리는 말없이 시선을 주고받았다. 바로 떡볶이를 추가 주문했고, 처음 주문을 받았던 직원과 어색한 웃음을 주고받았다.

  그래도 맛은 있었다. 당연히 감탄이 나올 정도로 맛있다는 뜻은 아니다. 한국에서였다면 평범한 수준이지만 호주에서 시도했던 한식들이 대체로 별로였기에 이 정도면 선녀였다. 하지만 김치부침개를 처음 먹는 바리스타는 굉장히 만족스러워했다. 지금처럼 해외에 있는 보급형 한식들을 맛있게 먹는 외국인들을 보면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가짜가 진짜가 되는 해외 한식당 세계... 나도 타국의 가짜 음식들을 진짜로 알고 감탄해왔겠지.

  떡볶이 부침개를 다 먹고도 한참이 지나고서야 나왔다. 맛은 집 떡볶이 같았다. 맛이 없다는 뜻이다. 자고로 된장찌개와 떡볶이는 집에서 아무리 조미료 넣고 만들어봤자 사 먹는 맛이 안 나기 마련인데 파는 떡볶이가 이렇게 심심할 수 있음에 놀랐다. 그간 모든 면에서 시드니보다 멜버른에 높은 점수를 줬지만 떡볶이만은 멜버른의 패배였다.

  우리는 자취인 답게 마무리로 울월스에 들러 장을 봤다. 포도가 먹고 싶었지만 세일을 하지 않아 과감히 돌아섰다. 그건 바리스타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아무리 맛있어도 세일 품목이 아니면 사지 않는다고 했다. 투잡 하는 워홀러나 백수 워홀러나 다 똑같음을 느꼈다.

  바리스타와 함께 트램 정거장인 리버티 도서관 앞까지 걸어갔다. 불빛 가득한 멜버른의 시티는 고전적인 건물들과 어우러졌다. 잡탕찌개 같은 시드니 타운홀의 뽕짝대는 밤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트램 도착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 바리스타는 집이 코앞이라면서 같이 기다려주었다. 멜버른에 사는 바리스타가 부러웠다. 시드니 시티에 갈 때마다 '이게 뭐야, 너무 구려'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마 멜버른에 살았더라면 그러지 않았을 테지. 나는 멜버른에 있으면서도 멜버른을 갈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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