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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딥마고 Dec 26. 2023

하이힐을 버리고

발뒤꿈치로 현실을 살다

humans of capitalism이라는 인스타그램 계정이 있다.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 안에서 사람들이 보이는 조금은 어리석은 행동들을 모아두고 같이 보자, 반성하자, 자조하자는 의도를 가진 계정으로 보인다. 어떤 댓글들은 게시물 속 인물들을 대상화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불편해질 때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별생각 없이 유희거리로 소비하고 넘기게 된다. 인스타그램을 켤 때 나는 대체로 스마트폰 좀비 상태이기도 하니까. 어쨌거나 도마 위에 타인을 잘 올려놓는 온라인 인류의 습성, '나는 안 저래'라는 회피감 내지는 왜곡된 안도감, 그리고 가끔은 자본주의 비판과도 같은 생산적인 사고가 이 계정의 연료가 되고 있는 것 같다.


이 계정에 얼마 전에 어떤 사람의 영상이 올라왔다. 어느 상점 앞에서 하이힐을 신고 서 있는 모습이었다. 뒤뚱대며 걷는다고 표현하기에는 온전히 서 있는 것도 어려워 보였다. 영상의 말미에, 그는 어찌어찌 발을 옮겨 상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다. 어쩌면 편한 운동화를 찾으러 가는 길일지도 몰랐다.

나는 이 사람을 판단할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20년 전, 낙성대역 근처 차갑고 울퉁불퉁한 아스팔트 위 스타킹 바람으로 서 있었던 스무 살의 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날 나는 엄마에게 받은 갈색 하이힐을 신고 하루의 끝을 맞이한 터였다. 기억하건대 그렇게까지 높은 굽은 아니었다. 5cm 정도? 그럼에도 뒤꿈치는 사정없이 짓이겨져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고, 발가락부터 발등, 발바닥까지 그나마 괜찮은 부위라고는 없었다. 결국 참지 못하고 횡단보도 앞에서 신발을 벗어버린 거다. 그러고도 한 발짝 내딛는 것조차 극한의 고통이었기에, 역에서 자취방까지 고작 몇백 미터 되는 거리가 이역만리처럼 느껴졌다.


엄마가 물려주신 것 외에 나를 거쳐간 하이힐은 족히 100족이 넘을 터인데, 각 신발과 나의 관계도 각양각색이었다. 너는 하이힐이지만 운동화처럼 편해, 너는 예쁘지만 어디 신고 나갈 수는 없어, 너는 꼭 마법처럼 내 기분을 밝게 해, 너는 버릴 순 없지만 그렇다고 신을 수도 없어. 나이를 먹어가며 낙성대역 근처 그 고통스러운 날을 가끔 떠올렸는데, 그날이 갖는 의미도 서서히 변화해 왔다. 그로부터 약 5년이 지나 12cm 힐도 거뜬히 신고 달릴 수 있었을 즈음에는 입문자가 으레 겪는 통과의례처럼 생각해 웃어넘겼고, 지금은 그날이 거의 수치스럽다. 생활인의 영역에서 이제 하이힐은 거의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만든 구두가 여자를 고통스럽게 한다 해도 개의치 않는다." - 크리스티앙 루부탱

"구두의 가학적인 면이 좋아요" - 마놀로 블라닉


우연처럼 위와 같은 구두 (남성)디자이너들의 말에 분노하는 온라인 커뮤니티의 게시글을 바로 며칠 후에 접하게 됐다. 댓글은 '응 그래서 안 신음' '안 예뻐' '촌스러워' '도태되었으면' 같은 반응들로 빼곡했다. 하이힐에 대한 콘텐츠를 두 번 연속으로 접하자, 잠시 어둠의 영역에 가려져 있던 또 다른 기억이 끌어올려졌다.


암흑의 취준생 시절 3년 연속으로 방송국 공채 시험에서 낙방하자, 나는 일단 사회 경험을 쌓기 위해서 어디라도 취직은 해야 되겠다 싶어서 여러 곳으로 눈을 돌렸었다. 인문대 졸업생이 도전할 수 있는 분야란 분야는 전부 뒤져 서류 지원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중에는 항공사 지상직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가 없을 정도로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직업인데, 여하튼 그 시절에는 꽤나 간절하고 고통스러웠다는 증거다. PD나 콘텐츠 쪽만 준비하다가 그쪽을 지원하는 사람들을 만나니 참 새로웠다. 뭐랄까, 판타지 세계관에 나오는 부족 개념에서 다른 부족 서식지로 놀러 온 것 같다는 느낌. 어떤 인재상이 된다더라, 어떻게 하면 무조건 탈락이라더라, 흉흉한(?) 소문이 나도는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은 것은 일부러 면접관들에게 발이 잘 보이는 세팅으로 가구들을 배치한다더라는 거였다. 그 이유는 여성의 경우 하이힐을 신었을 때 발을 가지런히 얌전히 둘 줄 아는가를 체크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한 번이라도 구두를 벗어 발끝에 걸친다거나 반만이라도 구두를 벗으면 이유를 불문하고 탈락처리한다고.


지금이나 그때나 한국 사회가 박스 안에 넣어두는 '단아한 서비스직 여성'과는 거리가 먼 나는, 해당 토론 면접에서 상대방의 논변에 집중하느라 아마도 발뒤꿈치를 살며시 구두에서 꺼냈던 모양이다. 아직도 명확히 기억나는 건 아차 싶어서 다시 구두를 신으며 '나는 탈락이구나' 자포자기했던 순간이다. 그리고 그 소문이 사실이었는지 확인하지는 못한 채, 나는 항공사 직원이 아닌 방송국 직원이 되어 하이힐이 아닌 운동화와 워커를 신으며 일할 수 있었다. 방송국에서는 거꾸로 밤샘 편집을 할 때 하이힐은커녕 운동화도 불편하다는 듯 삼선 슬리퍼가 거의 교복처럼 통용되었다. 나는 반대로 슬리퍼는 내 발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밤을 새울 때도 꼭 발을 감싸 쥐는 형태의 신발을 택했다.



그레타 거윅 연출의 영화 <바비>에는 바비가 발뒤꿈치가 바닥에 닿는다며 불안해하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과연, 생각해 보면 바비의 발은 바로 하이힐을 신기기 좋게 늘 뒤꿈치가 들려 있었고, 어릴 때 그걸 이상하게 여긴 친구는 없었다. 바비는 땅에 닿은 뒤꿈치를 하고선 '인형의 세계'를 떠나 '현실'의 세계로 간다. 현실은 더럽고 고되며 부조리하다는 것을 온몸으로 겪는 데 하이힐은 부적합하다는 듯이. 사실 정말 그랬다. 스무 살의 내가 극한의 고통을 견뎌가며 도달하고 싶었던 것은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자리에 선 독립적인 여성의 환상적 이미지였다. 그러니까 그렇게 피투성이 발을 해가면서까지 사회적인 요구에 따라 스스로를 하나의 도상으로 자리매김하고 싶었던, 어린 여성의 애처로운 시도였던 것이다. 현실에서 정말 가치로운 것은 결코 발뒤꿈치를 땅에 내리지 않고서는 쟁취할 수 없다는 것도 모르고 말이다.


바닥에 발뒤꿈치를 내디뎌 힘차게 뛰거나 스스로 가고 싶은 곳에 빠르게 당도하는 그 능력은 무엇인가를 제 손으로 이룩하는 데는 기본적으로 필요한 요소였음을 이제 나는 안다. 대부분의 직업의 세계는 하이힐을 신고 집중할 수 있을 만큼 여유롭거나 피상적이지 못하다. 하이힐을 신은 내 다리를 보라며 남성의 관점으로 여성의 관능미를 강조한 아이돌의 무대를 연출할 때조차, 가장 필요했던 건 튼튼한 두 다리와 단단하게 땅에 딛고 달릴 수 있는 발뒤꿈치였다.


공항에서 일하는 항공사 직원들을 볼 때, 그래서 나는 가끔 신발을 보게 된다. 어느 날은 어느 승무원의 뒤꿈치에 붙은 반창고를 보았다. 나는 그들의 일상을 감히 상상하기가 어렵다.


지금 와서 조금 과장하는 말이지만, 내가 대학교를 다닐 때 힐을 신지 않았더라면 도서관에 조금 더 자주 가고 더 오래 있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불필요한 신체 통증을 견디는 데 쓰는 에너지를, 지성의 키를 높이는 데로 전환시켰더라면. 지금의 내가 매일 마주하는 지성에 대한 끝도 없는 동경과 심연에의 공포를 채울 만큼 더 넓고 깊은 사색을 얻었을지도.


이 글을 쓰면서 건져낸 20년 전 기억의 조각엔, 그때 내가 하이힐을 벗고 스타킹만 신은 발로 아스팔트 위에 서서 횡단보도 건너편을 바라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억에 따르면 건너편 건물 2층엔 '미네르바'라는 중고서점 내지는 카페 같은 게 있었던 것 같다. 내가 그날 하이힐이 아니라 운동화를 신고 있었더라면, 힘을 내어 그곳에 들어가 보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우리는 도상이 아닌 인간이며, 스스로를 그렇게 취급할 때에야 더 멀리 걸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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