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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목 Nov 15. 2020

식물.인간

어쩌다 보니 시작된 일 ... ④

기계공학과를 나와 자동차 부품 관련 회사 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던 S는 유독 식물이 좋았다. 사람보다 동물보다 식물. 식물이 그렇게 좋았다. 연구소 건물 복도에는 화분들이 많았다. 정확하게는 방치된 화분들.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었지만 S의 눈에는 다 똑같았다. 화분이 품고 있는 건 다 살아있는 식물이었다. 

화분에는 아직도 분홍 리본에 창립 축하, 승진 축하 태그들이 붙어있었지만 그렇다고 화분에 눈길을 주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S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 이해되지 않았지만 건물 안의 많은 사람들에게 복도 여기저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화분은 일테면 투명인간 같은 존재였다.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

상황이 그렇다 보니 화분 속 식물들은 이미 말라서 죽었거나 죽어가고 있었다. 식물을 좋아하는 S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근무하는 층의 가까운 화분부터 살리기 시작했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일단 매일매일 물을 주고 그늘에 있는 화분은 최소한의 광합성을 할 수 있도록 햇빛 비치는 곳으로 자리를 옮겨주었다. 그것만으로도 많은 화분 속 식물들이 살아났고 그럼에도 살아나지 않는 아이들에게는 특약의 처방을 했다. 비타민도 주고 흙을 바꿔주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수액 처방도 했다. 다행히 인터넷의 바다에는 죽어가던 화분을 살려낸 수많은 경험사례들이 있었다. 덕분에 S가 근무하는 연구동의 화분들은 대부분 살아났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S는 마치 중고등학생 시절 점심시간에 운동장에서 조금이라도 더 뛰어놀기 위해 미리 도시락을 해치우던 아이들처럼 일찌감치 점심을 해결하고 화분에 물을 주러 갔는데 그곳에 K가 기다리고 서 있었다. 한 손에는 물 조리개 통을 든 채. 


K는 2년 터울의 후배 기수 연구원이었다. K는 S에게 S가 매일 연구소의 화분을 살리고 다니는 걸 알고 있었다며 허락해준다면 같이 하고 싶다고 했다. S는 반가웠다. 화분 돌보는 일을 도와줄 동료가 생겨서가 아니라 최근 생긴 궁금증이 하나 풀린 기분이 들어서였다. 실은 며칠 전부터 연구소에 자신 말고도 화분을 챙기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K는 그건 자신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런 존재가 나타났다면 아마도 저 친구가 아닐까 싶다며 손가락으로 S의 등 뒤를 가리켰다. S가 돌아보자 키가 190cm는 족히 되어 보이는데 정작 얼굴에는 아직 솜털이 다 가시지 않아 뽀송뽀송한 P가 서 있었다. P는 지난달 입사한 신입 연구원이었다. 감추려 해도 잘 감춰지지 않는 덩치라 알고 있었다. 아무튼 P의 양손에는 물통과 분무기, 그리고 비료가 섞인 흙 봉지가 들려 있었다. 






나는 아무래도 식물성 인간에게 마음이 끌리는 것 같다. S는 얼마 전 다른 일로 취재를 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만났다. 말투도 느릿하고 표정도 딱히 변화가 없었는데 식물 얘기를 할 때만큼은 옅은 미소를 숨기지 않았다. S는 결국 연구소를 나와 지금은 그 좋아하는 식물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그게 어떤 일인지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써 볼 생각이다. 아무튼 며칠 후 친한 동료 후배와 술자리를 하다 내가 만난 S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후배는 듣자마자 너무 재미있다며 내게 다큐 말고 영화로 만들자고 했다. 내가 다큐로 만들겠다고 말한 적도 없었는데 말이다. 


아무튼 제목은 <식물인간>으로 정했다. 뭘 만들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물론 여기서 ‘식물인간’은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식물을 닮은 식물形 인간 혹은 식물을 사랑하는 식물愛 인간에 가깝다. 이 세상에 상대적으로 해를 덜 끼치는 무해한 인간들 말이다. 비슷한 표현으로 초식남이라는 말이 있지만 일본식 조어라 그보다는 식물인간이 더 좋은 것 같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제목만 듣는다면 의식 없이 병상에 누워있는 환자를 먼저 떠올리겠지만. 


그러고 보니 예전부터 (식물을 좋아하는 입장에서) 식물인간이라는 말을 싫어했던 거 같다. 식물은 그냥 식물로 태어나 그 본연의 기능과 역할을 묵묵히 할 따름인데 굳이 식물을 불편함이나 결여된 무언가로 보는 건 그냥 인간 위주의 생각일 뿐이라 그랬다. 아무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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