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여행의 묘미는 낯섦과 새로움이다. 낯선 여행지에 가면 뭐든 서툴러지기 마련이다. 숨 쉬듯 당연하게 생각하고 흘려보내던 일상의 면면들이 여행지에서는 새로운 볼거리, 생각거리로 다가온다. 외국여행을 가면 이런 경험이 더욱 극적으로 변한다. 어느 도시에서나 흔히 볼 수 있던 잿빛 거리 속 풍경이 비로소 제 본연의 빛깔을 드러내기 시작하면, 그제야 나는 얼마쯤 황홀해진다. 나는 이런 생경함 속에서 여행의 매력을 발견한다.
아내는 여행지에서 겪을 생경함에 대해 철저히 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사람이다. 낯선 환경에서도 서툰 건 용납하지 않는다. 길을 헤매느라 시간을 낭비하거나 처음 겪는 일 앞에서 어쩔 줄 몰라 당황하는 건 아내에겐 추억거리가 아니다. 넋 놓고 멍 때릴 시간도 없다. 여행은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거두어야 하는 초단기 프로젝트니까.
이런 두 사람이 함께 여행을 하면 어떤 장면이 펼쳐질까. 우리 부부는 결혼 전에 몇 번의 여행을 함께 했다. 여행 스타일은 다르지만 둘 다 자기 스타일을 막무가내로 고집하는 성격이 아니기 때문에 적당히 맞추며 즐겁게 다닐 수 있었다. 우리 여행은 휴양과 관광, 맛집 탐방과 쇼핑이 대체로 사이좋게 균형을 이룬다. 그럼에도 물론, 마찰은 있다.
2년쯤 전, 약 열흘 간의 태국 여행을 마치고 귀국하는 날이었다. 공항 면세점에서 쇼핑을 하다가 탑승시간을 15분쯤 남겨두고 탑승구로 향했다. 한참 걷다 보니 뭔가 허전했다. 주머니 속 휴대폰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다.
"나 폰을 어디 두고왔나본데?" "정말? 우리 탑승 시간 얼마 안 남았는데. 가방 안에 있는 거 아냐?." "응. 다 뒤져봤는데 없어. 아까 화장품 매장에 놓고 온 것 같아. 금방 뛰어갔다 올게."
매장까진 거리가 꽤 됐고 시간은 촉박했지만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짐을 아내에게 몽땅 맡기고는 왔던 길을 되돌아 달렸다. 다행히 폰은 화장품 매장 카운터에서 보관 중이어서 곧바로 찾을 수 있었다. 직원에게 고맙다 말하고 다시 돌아갔을 땐 탑승시간까지 10분도 채 남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짐짓 과장된 한숨과 함께 안도의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찾았어. 얼른 가자. 짐은 내가 들게. 이리 줘."
아내는 내쪽을 보지 않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자기 꺼나 잘 챙겨."
아내에겐 화날 때 나오는 특유의 냉기가 있다. 글로는 감히 표현할 수 없는 시린 기운이 아내의 몸을 감싼다. 단둘이 있을 때 이런 냉기가 서리기 시작하면 나는 어떻게 해야할지 알 수 없어 패닉에 빠진다. 아내는 그런 순간에도 내가 쿨하게 장난을 걸어서 웃게 만들면 풀릴 거라고 했지만, 난 알고 있다. 아내가 기분 좋을 때 그냥 하는 소리일 뿐이라는 걸. 실제로 그렇게 했다간 간담이 얼어붙는 한기를 체험하게 될지 모른다. 나도 몇 번인가는 용기를 내 시도해보려고 했지만, 한 치의 농담도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그 냉기 앞에서 도저히 웃을 여유가 생기지 않았다.
물론 아내가 그런 스타일인 걸 모르지는 않았다. 아내는 우선 애매모호한 걸 싫어한다. 일처리도 시원시원하고 확실하다. 그렇지 않은 사람을 만나면 답답해하고 스트레스를 받는다. 아내의 이런 칼 같은 기준은 남편이라고 해서 특별히 비껴가지 않는다. 물건 잃어버리는 걸 도무지 이해 못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자기 물건 그때그때 확실히 챙기고, 어리바리하게 흘리고 다니지 않는 이상 어떻게 잃어버릴 수 있느냐는 식이다. 아내는 거의 모든 일에 자기 만의 뚜렷한 기준이 있고, 그 기준에 따라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속도가 가히 빛의 속도를 뛰어넘는다. 내가 어리둥절해지는 찰나의 시간 동안, 아내는 이미 나의 어떤 행동이 잘못되었고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 분석을 끝내놓곤 한다. 항상 느끼지만 실로 놀라운 능력이 아닐 수 없다.
내 입장에서는 굳이 그렇게 사람 몰아세울 거 있나 싶어 화나고 억울하지만, 당시에는 잘못한 것도 있고 하니 일단 참는다. (사실 참는다기보단 침묵당한다고 표현하는 게 적절할 것 같다.) 그렇게 조금 뜸을 들이면 아내의 화가 한숨 가라앉는데 그때가 바로 내 입장을 들이밀 타이밍이다. 아내도 꽉 막힌 사람은 아니라 화가 풀리면 대부분은 그냥 웃어넘긴다. 그렇게 몇 차례 웃음이 오가는 동안 분위기가 부드러워지면서 대화의 토대가 다져진다. 대화할 준비가 된 것이다.
비슷한 패턴을 꽤 오랫동안 겪다 보니 어느덧 익숙해진 듯하다. 마찰-침묵-대화로 이어지는 과정이 그리 낯설지 않다. 어떨 땐 마찰과 침묵이 대화를 위한 사전 준비작업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무턱대고 대화를 시도하기보다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며 서로 신중해지는 것이다. 다르게 살아온 사람들일수록 이런 준비작업이 더 중요하다. 매번 이렇게 공을 들이다 보면 대화라는 것이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만큼 더 소중해진다.
결혼해 보니 우리만의 대화 패턴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생각보다 어려웠다. 내 감정이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른 채 되는대로 설익은 말을 내뱉었다가 후회한 적도 있다. 그런 만큼 더 많이, 더 자주 대화할 필요를 느낀다. 지금까지 수없이 티격태격하며 서로 이해하고 맞춰온 것처럼, 앞으로 함께 지낼 날들도 작고 소박한 대화로 채워갈 수 있으면 좋겠다. 행복한 삶이란 그런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