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여름도 참 더웠다. 아침저녁으로 서늘해지는 날씨에 미리 담겨온 가을이 유난히 반가웠다. 매년 느끼던 반가움이지만, 가을과 함께 다가오는 추석은 이전처럼 반갑지 않았다. 올 추석은 결혼 후 처음으로 맞는 명절이었다. 생각이 복잡해졌다.
우리 부부는 추석 때 양가에 함께 가지 않았다. 대신 각자 자기 집으로 갔다. 고민이 없었던 건 아니다. '첫 명절부터 이래도 될까'하는 생각이 자주 마음을 흔들었다. 친구들도 우려 섞인 말을 건넸다. 그럴수록 더 신중하게 생각했다. 부부생활의 기준을 일관적으로 세우려면, 스타트를 잘 끊어야 했다. 처음부터 우리 생각을 선명하고 솔직하게 표현하면 오해는 차츰 줄어들 것 같았다. 몇 번의 고민 끝에 각자 집으로 가기로 최종 결론을 내리고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내 말을 가만히 듣던 아빠가 말했다.
"결혼했으면 그건 너희들끼리 알아서 하는 거야. 그렇게 해라."
걱정했던 것보다는 무난하게 받아들여주셔서 고마웠지만,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다. 부모님은 아내를 정말 좋아하신다. 기왕이면 함께 와서 정답게 오손도손 이야기도 나누고, 맛있는 음식도 함께 만들어 먹고 싶다고 했다. 처음이라 어렵고 불편하겠지만 원래 그렇게 부딪쳐가며 정이 드는 거라고 했다. 혹시 명절 문제로 둘이 다툰 건 아닌지 걱정도 하셨다. 다툼은 없었다고 솔직히 말씀드렸다.
우리 부부는 아직까지 집안일 문제로는 다투어본 적이 없다. 둘 중 한 사람이 지나치게 부지런하거나 반대로 게으르면 다툼의 여지가 있을 텐데, 우리는 둘 다 적당히 부지런하다. 한 사람이 집안일을 과중하게 떠맡지 않기 때문에, 굳이 역할을 정해놓을 필요도 없다. 청소와 분리수거, 요리와 설거지, 빨래와 건조, 방 정리정돈까지 우리 집안일은 흐름대로 하다 보면 그냥 자연스럽게 분담된다. 하지만 명절은 달랐다. 흐름대로가 아닌, 확실한 기준이 필요했다. 한국의 명절은 부부생활에서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집안일의 끝판왕이었다.
"명절이라고 해서 무조건 가는 건 아닌 것 같아. 부모님 생신이나 어버이날, 이런 좋은 날에 가서 같이 식사하고 대화하면서 즐겁게 시간 보내는 게 더 의미 있다고 생각해."
"꼭 명절에 같이 가야만 부부가 할 도리를 다 하는 게 아니야. 가더라도 마음이 우러나와서 가야지, 억지로 가면 결국 우리도 명절마다 힘들어질지도 몰라."
"명절에 꼭 같이 만나야 한다면, 연휴가 아니라 그 전후로 시간 맞춰 다녀오자. 그리고 연휴엔 각자 집으로 가는 거야. 그러면 가족이랑 함께 보내는 시간도 늘어나고 좋을 것 같아."
"자기네 명절 분위기는 그동안 어땠어? 여자들은 부엌일 하고, 남자들은 앉아서 TV 보며 얘기하는 그런 분위기야? 그러면 자기도 불편하지 않아?"
부끄럽지만 나는 이런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다. 전날에 전을 좀 부치던 걸 제외하면, 나이 서른 줄에 들어서까지 명절에 음식 만들고 내오고 치우고 설거지하는 일을 해본 적이 거의 없었다. 어릴 땐 당연히 할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커서는 갑자기 하겠다고 나서기가 뻘쭘해서 또 가만히 있었다. 아니다. 이건 변명이고, 사실 안 해도 돼서 안 했다. 아내가 하는 말은 마디마다 옳은 말뿐이었다. 뭐라 말하고 나서기가 무색해졌다.
명절 음식 차리느라 고생해본 적이 없는 나는 아내의 말에 뭐라 대꾸하기가 무색했다.
어릴 적 기억에 나의 부모님은 명절만 지나고 나면 한 번씩 크게 다투셨다. 그 좋은 할머니 댁에 다녀와서 왜 그리 사납게 다투시는지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어렴풋이 엄마가 피해자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연휴 동안 엄마는 아빠의 가족들 시중을 드느라 정신없이 바빴기 때문이다. 반대로 아빠가 엄마의 가족들을 대하는 태도는 조금 달랐다. 더 정중하고 격식을 갖춘 모습이긴 했지만 엄마처럼 정신없이 혼나면서 이리저리 다니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아빠는 어디에서든 점잖게 앉아있어야 했고, 그러면 야트막한 문지방 너머 부엌에서 여자들이 떡이며 과일을 먹음직하게 차려 날랐다. 이런 비대칭적인 명절 풍경이 어렸던 엄마 속을 많이 상하게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시골만 갔다 오면 다투셨던 것이다.
적어도 우리는 이런 불합리한 관습을 똑같이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어릴 적에 엄마가 울지 않았으면 했던 마음 그대로, 엄마가 아빠에게 바랐을 방식 그대로, 내 아내에게 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우리 가족의 집안 행사에 아내의 일방적인 인내와 노동을 요구하지 않기로 했다. 그 과정이 아내를 향한 내 가족들의 진심 어린 호의로 덮여있다고 해도 말이다. 어쩌면 엄마가 서운해 할 수도 있겠지만, 나에겐 이것이 엄마가 젊을 때 겪어낸 고생에 대한 마땅한 도리이자 배려로 느껴진다.
사람들은 보통 엄마란 존재에 대한 애틋함을 가슴에 한 움큼씩 품고 살아간다. 왜 그리도 고생하며 사셨는지. 그런데 이 애틋함의 정서가 현실로 나타나는 모습이 어쩐지 볼수록 수상하다. 특히 남자들의 말과 행동에서 더 그렇다. 엄마가 고생하며 산 것이 못내 짠한 남자들이 제 아내더러 그 삶의 궤적을 비슷하게 그려가도록 요구하는 건 왜일까. 그게 효도라서? 내 엄마가 내 아내 같던 시절에 원하던 것이 정말로 그런 전통의 대물림이었을까. 수많은 아내들의 노동 없인 굴러갈 수조차 없는 전통이 정말 전통이라 불릴 자격이 있을까.
사람들 말마따나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서 명절에 양가에서 하룻밤씩 자고 오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은 아니다. TV, 인터넷에서는 때마다 여성들의 '전 부치기 파업'과 '명절 증후군', 퇴행적인 명절 관행을 이슈로 다루며 변화를 촉구한다. 그에 따라 (아주 미미하긴 해도) 명절 모임은 단출해졌고, 차례 절차도 간소해졌다. 그럼에도 우리 부부가 양가를 차례로 방문하는 전통 아닌 전통을 거부한 것은, 그것이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왜곡된 가족관계와 일그러진 성역할을 고착화하는데 적지 않게 기여했다는 판단에 둘 다 동의했기 때문이다. 잘못인 걸 알면서도 계속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많은 부부가 명절 때마다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남자는 부모와 아내 사이에서 쭈뼛대며 눈치 보느라 피곤하고, 여자는 남의 집에 와서 애먼 고생하고 있단 생각에 분이 가라앉지 않는다. 앞으로도 계속 이래야만 할까. 모든 집안에 적용할 수 있는 법칙까진 아니더라도, 아내가 평생 우리 집안사람들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어렴풋이 길이 보이지 않을까. 나는 우리 집 제사에 아내를 끌어들일 어떤 논리적 근거도 찾을 수 없다. 아내를 우리 집안사람으로 취급하려면 우리네 전통의 가치를 논해야 할 텐데, 여성들의 노동을 전제로 하는 이 억압적 전통이 나는 그리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다. 결국 우린 앞으로도 명절 연휴에 각자 집으로 향하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