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이유 없이 기분이 처질 때가 있다. 아무와도 말하지 않고 혼자 있고 싶은 날. 그런 날에는 평소처럼 부드럽게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다. 근무 외 시간을 대부분 둘이서만 보내는 우리 부부에게 이런 날이 찾아오면 아직까진 꽤나 난감하다. 누구의 탓이라 콕 집어 말하기 애매한, 원인불명의 냉전이 시작되는 것이다.
왠지 어색한 공기.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막상 입 밖으로 아무 말이나 내뱉고 나면 오히려 가식적인 인간이 될 것만 같은 거부감에 애꿎은 TV만 바라본다. 아슬아슬한 감정이 우리 사이 거리를 차츰 늘려가는 게 느껴져도 아무렇지 않게 침묵을 지키며 책장을 넘긴다. 적어도 눈에 띄는 갈등은 없으니까, 라고 되뇌며 침대에 누워 등을 돌린다. 이상하다고 먼저 말을 꺼내는 순간 모든 걸 인정하고 지게 될 것만 같은 유치한 승부욕이 잠드는 순간까지 나를 지배한다. 냉전의 조건이 갖춰진 것이다.
분명 정상이 아닌데, 그렇다고 일상의 균형이 흔들릴 만큼 비정상은 또 아닌 상태가 바로 냉전이다. 어떤 사람은 싸운 뒤 표면적으로는 화해했지만 꽁한 마음이 다 풀리지는 않은 상태가 냉전이라고 하던데 내 경우에 그건 별 일이 아니다. 속시원히 터놓고 얘기할 만한 문제가 없어서 감정만 소진되는 상태가 힘들지. 매일 소소한 대화로 하루를 정리하는 우리 부부에게, 냉전은 생각보다 큰 장애물이다.
이렇게 다툰 일 한 번 없이 서로 꽁해진 상태에서도 꼭 지켜야 할 규칙이 한 가지 있다면, 말을 하지 않더라도 속으로는 꾸준히 상대의 마음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럴 바엔 차라리 말을 걸고 대화로 해결하라고 하고 싶지만 그게 맘처럼 안 될 때가 있다. 사람 감정이 언제고 맘대로 컨트롤이 가능하다면 이런 글을 쓸 필요도 없지 않았을까. 그래서 규칙을 세워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 감정은 맘대로 안 돼도 행동은 조절할 수 있으니, 축축 처지는 상황에서도 상대의 기분을 생각하고 이성적으로 배려할 수 있다면 그리 나쁜 상황은 아니다. 누군가 절묘하게 표현한 대로 사랑이란, '화났을 때에도 상대방을 돌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궁합이 좋아도 두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데 아무 트러블이 없을 수는 없다. 어쩌면 사이좋을 때보다 이렇게 트러블이 생겼을 때 보이는 태도가 장기적으로 훨씬 중요할지 모른다. 만약 내가 지금 화가 나는데도 되려 상대의 마음이 걱정된다면 그게 진짜 배려고 사랑이 아닐까.
사랑이란 화났을 때에도 상대방을 돌보는 것이다.
"기분 좋은가 봐? 이제 표정이 좀 돌아왔네."
"무슨 말이야?"
"며칠 동안 표정이 아주 그냥 죽 쑨 것 같더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자기가 밝아지니까 나도 좋아."
한창 냉전 중일 때는 '그래, 누가 이기나 보자'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는 게 결혼생활이다. 그때는 그 문제가 앞으로의 부부관계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내 고집을 꺾을 마음이 들지 않는다. 하지만 결혼 생활을 부드럽게 지탱하는 건 승부가 아니라 양보다. 정말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라면, 어느 한 사람이 이겨서 끝을 보는 것보다 서로 한 발짝 물러나 상대가 숨 쉴 틈을 마련해주는 게 좋다.
아내는 요즘 내가 말없이 가라앉아도 이유를 묻지 않고 기다려주는 편이다. 덕분에 나는 집에서도 충분히 시간을 갖고 내 안에서 피어난 감정들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다. 전적으로 아내의 이해심에 빚져야만 누릴 수 있는 호사다. 사랑하는 누군가와 공동의 삶을 꾸려가면서도 혼자만의 루틴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건 상대가 나를 배려하고 있기 때문이지 내 방식이 유별나게 합리적이어서는 아닐 것이다. 비단 결혼뿐만이 아니다. 모든 인간관계는 필연적으로 서로에게 이익과 손해를 안겨준다. 그리고 대부분의 관계는 이 이익과 손해에 대한 저울질로 지속 여부가 결정되지만 사랑과 애정으로 묶인 관계는 다르다. 사랑은 상대로 인해 발생하는 일정한 불이익을 이해하고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아가페적 선언이다. 아내가 내게 그러듯, 나도 아내에게 조건 없이 따스한 배려를 베풀 수 있는 사람이 되기로 조용히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