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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전략, 부부케미와 멀티태스킹의 상관관계

다중작업에 취약한 모든 남편들을 위하여

by 달리

아내와 둘이 여행을 갔을 때의 일이다. 즐겁고 고단했던 하루 일정을 마치고 숙소에 돌아와 각자 휴식을 취했다. 나는 책을 읽었고 아내는 디지털카메라와 폰으로 그날 찍은 사진을 돌려보고 있었다. 사진들이 잘 나왔는지 기분이 좋아 보였고, 중간중간 괜찮은 사진을 골라 내게 보여주면서 밝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이거 어때? 괜찮아?"

"이 사진은 배경은 맘에 드는데 내가 별로인 거 같아."

"이거 봐봐. 자기 사진 찍는 기술이 많이 늘었는데?"

"이건 아래가 조금만 덜 나왔으면 더 예뻤겠다."

"이 사진 나 귀엽게 나왔지? 어때? 귀여워?"


처음에는 나도 책 읽는 중간중간 사진으로 눈을 돌리며 고개를 끄덕이거나 맞장구를 쳤는데, 비슷한 패턴으로 반복되는 질문에 점점 반응이 흐릿해졌다. 시선을 책에 고정하고는 '아하', '음', 'Uh-Huh' 따위의 추임새로 대답을 대신했더니 어느 순간 아내가 내 다리를 툭 건드리면서 묵직한 저음으로 물어왔다.


"야. 귀엽냐고."


야. 귀엽냐고.


그 순간 읽던 책을 덮고 사진이 너무너무 귀엽다고 호들갑을 떨었던 게 그 사진을 보기 전인지 보고 난 다음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중요한 건 내가 사진을 보고 실제로 무슨 생각을 했느냐가 아니라 내가 맡은 바 임무를 성실히 수행했냐 안 했냐이기 때문이다. 시대가 어느 땐데 아내가 말하는데 남편이 책을 읽으면서 딴청을 부리나.


물론 책을 읽으면서도 아내의 말을 귀담아들을 수 있는, 이른바 멀티태스킹에 능한 남편이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내 경험을 근거로 성급하게 일반화하여 말하자면 남자들은 평균적으로 멀티태스킹에 취약하다. 내 경우는 그게 조금 심할 뿐. 나는 TV를 보며 전화를 받을 수 없고, 혼잡한 도로에서 차선을 변경하며 옆사람과 대화할 수 없고, 시끄러운 음악을 들으며 공부할 수 없고,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업무를 처리할 수 없고, 책을 읽으면서 아내의 말에 반응할 수 없다. 그걸 아는 아내는 가끔 내가 무언가에 빠져있어 다른 데 신경을 못써도 그냥 그러려니 이해한다.


하지만 그것도 때와 장소와 상황을 가려야 한다. 하루치 여행사진을 평가·반성하고 내일의 인생샷을 위해 결의를 다짐해야 하는 중대한 시점에, 책을 읽는다는 사소한 이유로 공동의 임무에 소홀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멀티태스킹이 안 되면 우선순위라도 잘 짜야한다. 뭐는 지금 해야 하고 뭐는 나중에 해도 되는지를 잘 파악해서 그에 맞게 처리하는 알고리즘을 장착해야 한다. 아니면 멀티태스킹 능력을 단련하거나. 근데 그게 정말 연습하면 좋아지기는 하나.


"자기는 어차피 내 말 잘 안 듣잖아."


얼마 전에 아내가 샐쭉한 표정으로 내게 한 말이다. 내가 다른 일에 빠져 아내가 한 얘기를 잘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 몇 번 반복되자 섭섭했던 모양이다. 짐짓 아닌 척, 뒤늦게 다 기억나는 척하며 미안한 마음을 드러냈지만 속으로 뜨끔했다. 말을 안 들으려고 한 건 아닌데, 라며 변명이 나오려는 걸 참고 앞으론 아내와 대화할 때 조금 더 집중력을 발휘하기로 마음먹었다.


결국 나처럼 멀티에 약한 남자들은 애초부터 우선순위 영역에 올인하는 게 현명하다. 한 번에 두 가지를 해치우려 욕심내지 말고 순서를 정해서 하나씩 해결하는 거다. 그것만 잘해도 부부케미가 보통 이상은 유지될 수 있다. 잘만 해내면 멀티가 안 되는 게 오히려 집중력이 좋은 증거라는 식으로 분석되기도 한다. 정신이 여러 군데로 분산되지 않으니 한 가지 일을 밀도 있게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내 경험을 근거로 성급하게 단언하자면, 우린 그저 멀티가 안 될 뿐이고 집중력은 그를 보완하기 위한 생존전략일 뿐이다. 그러니 다중작업에 취약한 모든 남편들의 집중력에 아내의 가호가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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