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잠과 책을 좋아한다. 잠을 첫째로 좋아하고, 그다음이 책이다. 어떤 사람들은 책만 펼치면 잠이 쏟아져 못 읽겠다고 하지만, 내겐 그거야말로 환상적 경험이다. 느릿하게 움직이던 눈동자가 점점 흐릿해지고 무거운 눈꺼풀이 그 위를 몇 번인가 덮는 사이, 손에 들려있던 책이 툭 떨어지는 그 한낮의 아른함. 잠의 대가들은 안다. 잠 중의 잠은 낮잠과 책잠이라는 걸. 내가 책을 좋아하는 건 독서 그 자체를 즐기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가로서의 잠을 장식해줄 수단으로 책만 한 게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결혼 전 나는 어딜 가든 거의 항상 책을 들고 다녔는데, 심지어 술자리나 등산을 갈 때도 책을 넣어가곤 했다. 자투리 시간에 읽기 위해서였지만, 그렇다고 술집에서 친구가 화장실에 갈 때마다 책을 꺼내 펼칠 정도로 광적인 독서가는 또 아니었다. 나는 그저 가방에 책이 들어있는 게 좋았다. 책들은 언제나 내게 묘한 안정감을 선물해주었다.
책에 관해서라면 나는 또 한 가지 유별난 버릇이 있었다. 책을 빌려보지 않는다는 것. 나는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항상 서점에 갔다. 그리 많은 액수는 아니지만 매달 10만 원쯤은 책을 사는데 썼다. 물론 결혼 전에 말이다. 결혼 후 지금까지 넉 달 동안 내가 산 책은 아내와 함께 둘러본 서점에서 산 소설책 두 권이 전부다. 아내는 책 구입에 그리 우호적인 사람이 아니다.
"그 책을 꼭 살 필요가 있을까?"
"소장할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한 번 읽고 말 책은 사는 게 아니야."
"그 정도는 도서관에서 빌려보면 돼."
"결혼하면 웬만한 책들은 다 싸서 집으로 보내자. 낡은 책이 너무 많으면 방이 안 예쁠 것 같아."
결혼 전에는 별생각 없이 사고 싶은 책을 살 수 있었다. 아내도 내가 새로 산 책을 자랑할 때 별 말이 없었다. 지금은 입장이 달라졌다. '부부는 경제공동체'라는 거창한 말까지는 굳이 꺼낼 필요도 없다. 보다 현실적인 문제는 내가 돈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 부부는 각자 같은 금액의 용돈을 정해놓고 쓰는데, 그 돈으로 기름값, 핸드폰 요금, 취미나 모임, 운동 등의 사회생활비(?)를 모두 감당해야 한다. 아내는 어떨지 모르지만 내겐 조금 적다. 이전처럼 책을 몇 권씩 사기엔 빠듯하다. 결국 책을 빌려 읽게 되었다.
사실 아내 말이 맞다. 책은 빌려서도 얼마든지 읽을 수 있다. 그러니 두 번 세 번 읽을 책이 아니라면 굳이 살 이유가 없다. 하지만 그건 책을 순전히 기능적 관점에서 바라본 경우에만 그렇다. 내겐 사놓고 아예 읽지 않은 책도 많다. 읽고 싶어 샀다가 흥미가 떨어졌거나 책 내용이 너무 어려운 경우에 특히 그렇다. 그럼에도 나는 그 책들을 사는 데 썼던 돈이 아깝지 않다. 책들도 되팔지 않고 계속 가지고 있다. 내겐 그것들이 책장에 꽂혀있는 것만으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몇 페이지 읽지도 못하면서 가방에 종일 무거운 책을 넣어 다니는 것과 같은 이유다. 묘한 안정감. 왠지 부자가 된 느낌에 괜히 마음이 부풀어 오른다.
그래선지 나에겐 서재라는 공간에 대한 로망이 있다. 책을 꾸준히 사놓으면 언젠가 근사한 서재를 꾸밀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을 놓지 않고 있다. 물론 지금은 한 발짝 물러서 자세를 낮추고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추진력을 얻기 위함일 뿐. 나는 분명 따뜻한 소파와 먼지 덮인 책들로 가득한 나의 서재를 갖게 될 것이다.
언젠가 집안에 투박하면서도 근사한 서재를 꾸미고 싶다.
그래도 아내가 결혼 전에 했던 저 가슴 철렁한 한 마디, 결혼하면 내 책들을 다 싸서 고향집으로 보내라는 말은 결국 실행되지 않았다. 나는 내 책들을 가지고 무사히 신혼집에 입성할 수 있었고, 커다란 책장 두 개에 그것들을 살뜰히 꽂아 넣었다. 아쉬운 대로 그 방을 서재라 부르고 있던 참에, 또 다른 해프닝이 벌어졌다. 아내가 데스크탑 컴퓨터를 사서 그 방에 설치하더니 어느 순간부터 서재를 PC방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살아보기 전엔 모를 일이 결혼이라지만, 서재와 PC방이 신혼집에서는 같은 방을 수식하는 말이 될 수도 있다는 건 정말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