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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산책, 매일 하루분의 환기

우리가 주인공인 이야기

by 달리

나와 아내는 매일 1-2회 산책을 한다. 반듯하게 난 도로를 따라 동네를 두어 바퀴 자박하게 걷다 보면 딱 그만한 시간이 소리 없이 지나있다. 우리는 대화를 나누면서, 주인을 따라 산책 나온 개들과 사람을 피하지 않는 길고양이 두 마리, 크고 작은 나무와 좁다란 잔디밭, 그리고 기억에서 곧 사라질 사람들의 면면을 눈에 담는다. 특히 밤에는 그리 화려하지 않은 불빛 덕분에 좀 더 운치 있는 산책을 즐길 수 있다.


밤 산책을 나보다 더 좋아하는 아내는 아이러니하게도 작은 곤충과 날벌레를 유독 무서워한다. 걷다 보면 대략 스무 걸음 주기로 마주치게 되는 작고 흔한 벌레 한 마리에도 기겁을 한다. 가로등 불빛을 반사하는 흰 보도블록 위에 숨죽인 채 앉아있는 귀뚜라미를 용케 발견하고는 살금살금 에둘러간다. 가까이 날벌레라도 한 마리 날아드는 날에는, 외마디 비명을 딱 내 귀에만 쨍하게 들릴 정도로 뱉어낸다. 커봐야 손가락 마디 하나 정도나 될 텐데 아내는 매번 무서워서 펄쩍 뛰고, 나는 그런 아내의 모습이 재미있어서 웃는다. 이런 깨알 같은 즐거움이 밤 산책의 묘미를 더해준다.


어젯밤엔 불 꺼진 간판들 사이로, 요즘 들어 더 보기 드물어진, 늦은 손님으로 북적한 가게를 발견하고 잠시 걸음을 멈췄다. 우리 부부완 별 상관없는 일이겠지만 왠지 눈길이 갔다. 아니, 어쩌면 상관이 있다. 기쁨이든 슬픔이든 나누어야 하루만큼이라도 더 살만해진다는 이 시기에, 어제는 없던 손님이 오늘 저렇게 많아졌는데 한 동네 주민으로서 마음 씀씀이마저 리 인색해서야 영 사는 맛이 나지 않는다. 그렇게 밋밋하게 살아가고 싶지는 않다.


우리 부부는 요즘 외식을 하지 않는다. 집 근처 마트에서 간단히 장을 본 것들로 집에 가서 단출하게 차려먹는데 익숙해졌다. 한 달에 두어 번 있던 술자리도 다 사라졌다. 자연히 집 안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났다. 힘들다 말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유행병의 직격탄을 맞은 사람들과 방역의 최전선에서 분투하는 사람들이 나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힘겨운 시기를 지나고 있다는 걸 알 만큼은 나이 들었다. 나는 그저 몇 가지 건조한 일상을 섞어 나열하고 있을 뿐이다.


집 안에 있는 동안 나는 아내의 옆에서 TV를 보고, 책을 읽고, 영화를 본다. 그럴 때면 우리가 나누는 대화의 주제도 그와 관련된 것으로 알게 모르게 빠져든다. 물론 재미는 있지만 부부가 언제나 그런 이야기만 하고 살 수는 없다. 아무리 좋은 이야기라도 결국 간접 경험의 세계이고, 그 세계의 일정 부분은 허구로 남을 수밖에 없으며, 무엇보다 나와 내 아내가 그 안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우리가 주인공이 되어 살아가는 단단한 현실의 이야기도 필요하다.


밤 산책은 그런 우리 두 사람이 주인공인 이야기가 펼쳐지는 통로다. 걷는 동안 우리는 TV와 핸드폰, 책과 영화로부터 해방된다. 단지 내 아담한 산책길을 걸을 때, 차가 다니지 않는 쪽문을 나설 때, 계획에 없던 마트나 아이스크림 가게를 들를 때, 낯익은 산책 루트를 그대로 따르거나 따르지 않을 때, 우리는 우리 아닌 다른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자유를 누린다. 그렇게 한참 동안 시간을 보내고 들어오면 그사이 환기된 집안의 공기가 한결 개운하다. 그저 기분 탓일까. 아무렴 어떤가. 공기든 기분이든 삶에는 매일 하루분의 환기가 필요한 법이고, 우리는 밤 산책이란 꼭 맞는 방법을 찾았으니, 그거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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