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전 나는 대부분의 여가를 잠과 책으로 보냈다. 게임엔 원체 소질이 없어 흥미를 붙이기 어려웠고, 챙겨보는 TV 프로는 일주일에 두 개가 다였다. 매일 혼자서 조용했던 방, 나름 신중하게 고른 스탠드 불빛을 벗 삼아 책 읽다 잠드는 게 취미생활의 전부이던 시절이 있었다.
누군가 교사가 돼서 좋은 게 뭐냐고 물으면 책 살 돈과 책 읽을 시간이 넉넉한 점이라고 답했다. 지금 생각하면 허세가 절반이라 적잖이 민망하지만 그땐 진심이었다. 월급날마다 미리 눈여겨보았던 책들을 샀고, 약속 없는 주말 한껏 늘어진 시간에 널브러져 아무 책이나 펴고 덮었다. 시험공부를 하던 때처럼 뭘 열심히 외우며 읽지 않아도 되는 것이 큰 기쁨이었다.
그 시절, 외향적이었던 아내의 여가 시간은 나와는 사뭇 다르게 흘러갔다. 아내는 사람들을 만나고 어울리며 시간 보내길 좋아했다. 모임을 주도하면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소개하는 일에 적극적이었다. 나도 그렇게 소개받아 나간 자리에서 한참을 쭈뼛거리고 있다가 아내 쪽을 힐끔 쳐다보았는데, 역시 웃는 얼굴로 사람들과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 아내가 제법 리더십 있어 보였고 그만큼 멀게 느껴지기도 했다.
한 번은 아내가 다니던 스윙댄스 동호회 공연을 보러 간 적이 있다. 무대 공연이 끝나고 다 함께 축하하며 춤을 추는 광경이 한 편의 영화 같았다. 그 영화 같은 장면 한가운데에 아내가 있었다. 어둡게 깔린 조명 아래, 잔잔하게 흐르는 스윙 리듬에 맞추어 웃으며 춤을 추는 아내가 행복해 보였다. 한 번도 춤을 배워본 적 없고, 배울 생각도 없던 나에게 그 날의 축제 분위기는 완전히 신세계였다. 낭만적이라 감탄하면서도 한편으론 거리감이 느껴졌다.
당시의 아내는 나에게 별다른 거리감을 느끼지 않았던 것 같다. 아내가 보기에 우리 관계는 그저 평범했으니까. 그런 둘 사이의 거리를 이리 재고 저리 재며 괜한 고민에 잠을 설치는 건 오롯이 내 몫이었다. 왠지 공통분모가 없을 것만 같은 아내와 나의 여가 시간을 비교하며 좁고 아늑한 내 방 침대로 자꾸만 움츠러들었다. 전혀 그럴 필요 없었는데 말이다. 깊은 감정은 종종 사람을 위축되고 혼란스럽게 만든다.
결혼하고 보니 우리는 꽤 잘 맞는 한쌍이었다. 아내는 내가 책 읽는 걸 좋아하고, 나도 아내의 발랄하고 사교적인 성격을 좋아한다. 그뿐만 아니다. 나는 아내를 따라 조금씩 밝게 변했고 아내도 나를 따라 집순이가 되었다. 누가 더 많이 변했는지는 중요하지 않겠지만 주관적 느낌으로는 내쪽이 좀 더 많이 변했다. 나는 기본적으로 세상을 삐딱하게 보는 습관이 있는데 요즘은 그런 성향이 많이 누그러진 게 스스로도 느껴진다. 물론 아내의 영향이 크다. 누구나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사람을 닮아가게 마련이다.
퇴근 후 여가 시간에 우리는 자주 TV를 본다. 본방사수하는 프로는 딱히 없고, 그냥 채널을 돌리다가 재미있는 예능이 나오면 켜놓고 대화를 시작한다. 대화라기보단 일방적으로 내쪽에서 떠든다. 처음 가전을 장만할 때만 해도 TV는 필요 없다고 호언장담을 하던 내가 매일 TV 앞에서 한두 시간씩 수다를 떠는 경지에 이르렀다. 결혼 전부터 TV를 좋아하던 아내도 나만큼 푹 빠져서 보지는 않는다. 이건 이래서 어떻고, 저건 저래서 어떻고 하는 내 말들에 아내는 자연스러운 추임새를 곁들여 대꾸하거나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화답한다. 난 그 정도면 충분하다.
저녁식사 후에는 주 3회 함께 수영을 배우러 체육문화센터에 간다. 다른 날에는 산책이나 독서로 시간을 보내고, 가끔 영화를 본다. 내가 글을 쓰고 있으면 아내는 주로 스마트폰을 한다(지금도 아내는 내 노트북에 꽂은 USB로 충전을 하면서 스마트폰을 보고 있다). 주 2회 내가 축구하러 간 사이에 아내는 집에서 혼자 시간을 보낸다. 신체활동과 실내활동이 적당히 어우러진 일상의 루틴이 나에게 균형감과 안정감을 동시에 가져다준다. 모두 아내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얻은 것들이다.
또 한 가지 달라진 게 있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내는 사람들과 꾸준히 만나며 관계를 이어나가는 타입이다. 좀처럼 지인에게 먼저 연락을 취하는 일이 없는 나로서는 가장 닮기 어려운 모습이다. 아내는 그런 내게 같이 사람들 만나러나가자고 조른다. 이전 같으면 거절했을 모임에 흔쾌히 따라가 몇 번 만나보니 다들 괜찮은 사람들이었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올 때마다 여러 사람들과 저녁을 먹고 술 한 잔씩 걸치는 게 퍽 운치 있게 느껴졌다. 그래, 이렇게 한 사람씩 천천히 알아가는 거지. 사람을 사귀는 성격이 따로 있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최근에는 아내와 함께 여가 시간에 탈 자전거를 사려고 이것저것 알아보고 있다. 가격이 생각보다 만만찮다. 지금도 충분히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음에도 계속해서 새로운 것에 눈을 돌리는 이유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의 범위가 점점 넓어졌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부부의 시간은 축적의 시간이므로. 쌓이는 시간만큼 우리가 서로 닮게 된다면, 기왕이면 갖가지 색깔과 무늬로 우리의 시간을 수놓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