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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취함존중 Mar 20. 2017

주막에 관한 3가지 재미난 이야기

시간과 공간을 넘어, 시대와 국경을 넘어, 사람이 집을 떠나 여행을 하게 되면 먹고 잘 곳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농업 국가였던 조선은 상업이나 무역이 발달한 국가들에 비해 여행자를 위한 시설이 낙후되어 있었는데 -사극에서 날 저물면 아무 집이나 들어가 '재워달라'고 말하는 건 매우 팩트임-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상업과 화폐의 유통이 활성화되며 자연스레 상업적인 업소들이 증가하였고 그 중 대표적인 곳이 주막이었다.


1. 주막은 우리나라에서만 "酒막"이다.


세계 어느 나라나 여행객에게 돈을 받고 밥과 술, 잠자리를 제공하는 장소가 존재한다. 문화권이 비슷한 동아시아 3국에서 중국은 이를 반점(밥 반 飯, 가게 점 店)이라 불렀고 일본은 숙옥(잠잘 숙 宿, 집 옥 屋)이라 불렀다. 똑같은 서비스를 제공하면서도 중국인들은 음식과 먹거리를, 일본 사람들은 잠자리에 초점을 둔 문화를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이 곳을 주막(술 酒, 장막 幕)이라 불렀다. 이 얼마나 풍류 민족이란 말인가.



2. 주막은 "잠값"을 받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밥과 술에는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책정했으나 숙박비는 받지 않았던 것. 이는 곧 주막의 비즈니스 모델이 숙소가 아닌 주점이자 식당이었음을 말한다. 조선시대 사극을 보면 해 지고 난 후 주막에서 탁주 한 사발에 국밥을 말아먹던 나그네가 초가삼간 주막의 방문을 왈칵 열어 젖히며 괴나리 봇짐 베고 먼저 자고 있던  또 다른 나그네에게 


"거 신세 좀 지겠습니다. 흠흠."

하며 지친 몸을 뉘어 가는 장면이 종종 등장한다. 꽁잠을 위해선 낯선이와의 동침이라는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술과 음식을 먹지 않고 잠만 자는 경우는 드물었으며 따라서 숙소는 매우 열악했다고 한다. 특히 아녀자와 여행하는 경우, 남자는 변소에 가기도 매우 어려웠다고. 역시 예나 지금이나 세상에 공짜란 없다 -_- ;;; 



3. 주막은 술의 판매와 제조가 "분리"되면서 사라져 갔다.


주막의 등장에 대한 공식적인 역사적 기록은 정확하지 않다. 다만 원(院)의 쇠퇴와 함께 17세기 무렵 쓰여진 책에 조금씩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 시작은 모호하였으나 끝은 확실한데 1916년 일제강점기, 주세령을 강화하면서 부터 주막은 서서히 그 수가 감소하고 해방 후에는 종적을 감추다시피 하게 된다. 가양주와 마찬가지로 주막에서는 직접 술을 만들어 팔았는데 1909년 주세법이 발효된 이후, 1910년 주권이 완전히 일본에 넘어가고 1916년 강화된 주세령을 실시하면서 '자가용 술 제조(자)'에 관해 이천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는 등 제조, 판매, 면허 상속 등에 관해 제재를 가하기 시작한다. 주막에서는 직접 만든 술을 점점 팔기 어려워졌으며 근처 양조장에서 술을 사와서 팔거나 직접 양조장을 차리는 수 밖에 없었는데 초가삼간에 운영하던 주막들이 그만한 자금을 댈 수 있을리 만무했다. 조선주조사에 따르면 전국 12만 곳에 달하던 주막은 1930년대 이후 5천 여 곳 이하로 급격히 줄었다고 한다.




100년 전에 사라진 주막이 부활한다면?

100년 전에 사라지지 않고 계속 다른 형태로 진화해 왔다면?


과연 어떤 모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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