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람 Aug 22. 2021

이오카스테가 말한다면?

소설 <호모 파버>, 막스 프리쉬

완독. 밑줄도 긋고 포스트잇도 붙여가면서... 일단 매끄럽게 읽힌다는 점에서 역자분께 박수를 보내고 싶다. 다만 <호모 파버>의 중심주제가 문명 또는 기술 비판이라는 '옮긴이의 말'에는 공감하지 못했다(예술은 거대담론에서 종속되지 않는다. 예술은 거대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예술가는 현상을 바라보는 가장 냉철한 눈을 획득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이 이 소설의 주요 모티프로 쓰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막스 프리쉬가 (오이디푸스의 어머니인)이오카스테의 입장에서 재해석해서 쓴 소설이라고 느꼈다. <오이디푸스 왕>에서 그녀는 자신이 아들과 동침했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자살한 인물로 처리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모방론에 입각한 플라톤의 예술관에 반박하며, 사실성에 대한 플롯(가상성)의 우위를 강조하는 맥락에서 소포클레스를 칭찬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와서 다시 읽어보면 다소 급작스러운 전개가 눈에 띄는 것이 사실이다.


잠시 펜을 내려놓고 당혹스러워 하고 있는 기원전 4세기의 소포클레스를 상상해보자. 이 비극작가를 당혹스럽게 만든 이는, 다름 아닌 그의 비극 속 등장인물 중 한 명인 이오카스테였다. 소포클레스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망설였던 지점, 즉 오이디푸스 왕의 시공간이 구조화되는 바로 그 빈 공간에 대해 막스 프리쉬는 의문을 던졌고, <호모 파버>라는 소설은 거기서 출발했다.


어떻게 본다면 <호모 파버>의 주인공 파버는 한나와의 과거를, 그녀와 자신의 친딸인 자베트 사이에서 반복하는 인물이다. 사건이 의미화되기 위해서는 그 자신이 반복되어야 한다(어떤 관점에서 보면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사건 그 자체가 반복되기 위한 도구이자 꼭두각시들이다). 파버는  통계학과 기술공학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지만 정작 연인관계에서는 '앎'으로부터 철저히 배제당해 있다.


그는 혼전임신한 여자친구(한나)에게 던진 말이 상처가 되는 줄 모르고 있고, 여행지에서 만나 사랑에 빠진 소녀(자베르)가 자신의 친딸인지 모르고 있다. 여기서 첫번째에 해당하는 무지가 두번째에 해당하는 무지로 그를 이끈다.


 만일 그가 한나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다면 그는 한나와 결혼했을 것이고 자베르가 자신의 친딸인지 몰랐을 리도 없었을 것이다. 이 소설에서 가장 폭력적인 장면이 묘사된 67페이지를 보자. "네가 네 아이를 원하면 우리는 물론 결혼해야지", "나랑 결혼할래, 안 할래?"..... 이런 정신나간 놈이 또 있을까?


그런데 이처럼 파버의 발화가 분열되는 증상적인 지점(그는 내용상으로는 한나에게 결혼이 마치 그녀의 자유로운 선택인 것처럼 묻지만, 남성에게 주어진 고정된 성역할을 배반함으로써 피앙세를 가장 폭력적인 방식으로 모독했다)이 고대 비극작가 소포클레스에게도 그대로 드러난다면 어쩔 것인가?


즉 소포클레스는 이오카스테의 자살이 마치 그녀의 비극적 결단이며 자유로운 선택인 것처럼 만들었지만, 실은 버려진 자신의 아들도 못 알아보는 바보천치로 묘사함으로써 그녀를, 더 나아가 모성 그 자체를 모독했다면?...


따라서 막스 프리쉬는 <오이디푸스 왕>을 반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단, 이오카스테는 더 이상 극의 가장자리를 배회하지 않는다. 오히려 프레임의 정중앙에 배치되면서 자신의 내밀한 속내를 털어놓기 시작한다.


 근친상간이라는 소재가 쓰였으나 소설은 놀랍게도 우아하며, 오이디푸스 왕과는 달리 모던하다. 인간의 감정을 최대한 섬세하게 다룰 줄 아는 작가였다고 느꼈다. (저자의 다른 작품인 <슈틸러>도 목록에 추가할 것)




#호모파버 #막스프리쉬 #정미경 #을유문화사 #책리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