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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람 Sep 27. 2024

이졸데 카림, <나르시시즘의 고통>을 읽고

이졸데 카림의 주장에 의하면 독서모임과 같은 취미 공동체는 직장과 같은 사회적 공동체와는 달리 '사교성'만 존재하는 일종의 나르시시즘적 공동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독서모임이 토론 모임이라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나르시시즘적 '반향'이나 독백을 넘어서는 이질적인 의견들의 공존 가능성 또한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러시아 평론가 미하일 바흐친은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을 전체주의의 '독백'과는 반대되는 의미에서 '대화'주의라는 개념으로 포착했다고 알려집니다. 바흐친이 설명하는 대화는 어디까지나 타자와의 대화인데 여기서 타자를 외국인으로 해석한다면 단일 언어로는 정리되거나 환원되지 않는 것이야말로 그러한 '대화'일지도 모릅니다. 완전한 번역은 불가능하기에 어디까지나 의역에 불과하며 따라서 늘 오해의 여지를 남기게 되는.

이와는 반대로 나르시시트는 자신의 언어를 완전히 번역할 수 있다고, 자신의 내면을 진정성의 기치하에 타자에게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단지 하나의 가치 기준만이 전부라고 믿는 이들일지도. 기준이나 척도가 하나일 때 평가는 쉬워지겠죠. 무엇이든 평가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평가하는 것이 쉽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거의 '꼰대'와 오늘날의 나르시시트가 동일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꼰대 역시 하나의 가치 기준에 따라 평가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당대의 사회적인 가치 체계(보통 '상식'이라고 일컫는)에 의존합니다. 이와는 달리 나르시시스트는 그러한 기준 자체를 자기 내부에서 찾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나르시시트는 반사회적이고 꼰대는 사회적이라고 간단히 일축할 수 있을까요? 당연한 얘기지만 당대의 가치 기준은 영원불변하지 않습니다. 지나간 '시절'의 향수에 취해 있는 사람을 우리는 보통 꼰대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꼰대는 정말이지 바쁜 사람입니다. 꼰대는 뉴스 기사나 가십거리 등을 통해 사회적 기준을 열심히 좇느라 정작 자기 자신을 놓치기도 합니다(알랭드 보통의 <뉴스의 시대>에 따르면 소설가 플로베르는 뉴스가 우둔한 자를 무장시키고 바보에게 권위를 부여했다고 비판했다고 합니다. “신문이 독자로 하여금, 정직한 사람이라면 결코 타인에게 떠넘기는데 동의하면 안 되는 어떤 임무를 교묘하게 부추긴다. 그 임무란 바로 ‘생각하기’다.”). 반면에 나르시시트는 꼰대가 놓친, 이 자기만 있는 사람입니다. 일시적 감정에 의해 대상을 평가하기에 그는 대상과의 ‘감각적 확신’, 일종의 직접성에 매혹됩니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이 직접성의 무매개적인 측면을 비판했습니다.

“감각적 확신이 가진 구체적인 내용은 그것을 가장 풍부한 인식, 심지어 무한히 풍요로움을 지닌 인식으로 나타도록 만든다. 더 나아가 감각적 확신은 가장 참다운 인식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감각적 확신은 대상에서 아무것도 빠뜨리지 않고 전체적인 완벽함의 상태로 대상을 눈앞에 두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런 확신은 사실은 스스로 자신이 가장 추상적이고 가장 빈약한 진리임을 알려준다. (...)우리는 '지금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지금은 밤이다'라고 대답한다. (...) 이제 우리가 기록해 놓은 진리를 '지금', 이 한낮에 다시 들여다보면, 그 진리가 퇴색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게 된다. 밤이었던 '지금'은 보존된다. 요컨대 '지금'은 그것이 그러하다고 고시된 것으로, 즉 하나의 존재하는 것으로 취급된다. 그렇지만 '지금'은 오히려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임을 스스로 입증한다. 물론 '지금' 자체는 유지되지만 밤이 아닌 것으로서 유지된다. 그러므로 '지금'은 직접적인 것이 아니라 매개된 것이다.”

놀라운 것은 나르시시트가 이러한 감각적 확신의 직접성을, 즉 자신의 가장 개인적이고 내밀한 부분 자체를 타인에게 인정받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가능한 시도이기에 나르시시즘은 (타인에게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나르시시스트 그 자신에게 고통이 됩니다. 예컨대 인스타그램에서 볼 수 있듯이 자신의 셀카 이미지에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나르시시즘적 행위는 이상적 자아=셀카 이미지와 불일치하는 한편 오로지 그것에 의해 인도되는 현실적 자아의 구성적 한계에 의해 불일치=실패를 반복해서 생산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 운전자들은 표지판이나 네비게이션을 따라 행로를 결정합니다. 비유컨대 카림의 설명대로 나르키소스가 외려 반-나르시시즘적인 이유는 표지판=자아이상에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거리가 부재했기 때문입니다. 모방해야 할 대상을, 자기 자신의 소유물로서 간취하는 것....이것은 금일 발표된 메타의 스마트 안경 '오 라이언'의 미래를 상상하게 합니다. 우리가 사물 그 자체에 다가갈 때 오히려 상실하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답은 우리 자신이지 않을까요?

Ps.

인간의 성은 직접적인 방식으로 표현되면 사라집니다. "라면 먹으러 갈래?", "우리집에서 넷플릭스 볼래?" 등등... 섹슈얼리티가 언제나 우회적인 방식으로 표현되는 이유입니다.

또한 JMS 사태에서 볼 수 있듯이 신의 대리자에 불과한 목사가 직접 신을 사칭하는 경우, 신앙공동체는 그것의 대립물인 세속적 사이비 종교집단으로 전도됩니다. "나는 신이다"고 주장하는 목사는 "나는 나다"라는 자기준거성을 타인에게 요청하기 때문에 타자는 어디까지나 자기를 비추는 거울(관객)일 뿐입니다. 우리가 지금 대통령에게 보는 것도 이러한 나르시시즘적인 면모가 아닐까요? 국민이 무슨 관객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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