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 자연이 네게 뭐라고 하니>
사랑하는 사람(연인이든 가족이든)에 대해서 온전히 말할 수 없는 이유는 내가 이미 그 사랑에 속해 있기 때문에. 그리고 이것은 자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우리는 자연 속에 속해 있기 때문에 자연 바깥에서, 그것으로부터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할 수 없다(그리고 바로 이러한 불가능성이 자연에 관해 말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격발한다). 홍상수는 초기작부터 인간의 언어나 앎에 대해 회의적이었으나 이제는 언어의 불완전성을 아름다움으로 전환시키는 시적 순간들을 포착한다. 장미는 무엇을 의미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장미나 꽃은 무의미하기 때문에, 더 나아가 무의미할수록 그것의 아름다움이 재배가된다는 사실.
초기작들과는 달리 홍상수의 영화에는 언제부턴가 작은 남성들(대표적으로는 기주봉, 권해효)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영화 속 시인도 마찬가지. 그가 자랑으로 여기는 시적 재능과 오래된 중고 자동차, 그리고 자연에 대한 불가지론적 태도는 여자친구 또는 그녀의 가족들에게 참된 신랑감이라는 가치 기준에 의거한 평가의 대상일 뿐이다. 축소된 남성상이랄까... 그런 것들이 점점 더 빈번하게 등장한다. 술자리에서 소동을 부리고 밤늦게 깨어난 시인은 자신의 정체성의 중핵이, 여자친구의 가족과 같은 타인들의 담화 속에서 탈중심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래도 아버지가 뒤에 계시잖아요” "재능이 없어"
홍상수의 영화는 무언가를 더하는 영화가 아니라 지속해서 덜어내는 영화이다. 감산의 영화, 또는 미니멀리즘이라고 불러도 좋다. 마치 바틀비처럼 되도록이면 “하지 않는 것을 선호하는 것”이다. 어떻게 찍어야 될지를 아는 게 아니라 어떻게 찍으면 안되는지를 아는 것 같다. 초점이 흐린 장면을 의도적으로 보여주는 것도, 지금 우리가 보는 것이 카메라가 찍은 장면이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고 환기시키려는 데 목적이 있다. 그는 언어 뒤로 숨지 않고 카메라 뒤로 숨지 않는다. 관객은 언제나 언어의 부조리와 대면하고 카메라와, 영화 속 이미지에 심적으로 동화되지 않는다. 이 간극으로서의 물질적 공백을 지속해서 움켜잡으려는 힘. 영화 이미지를 주제나 메시지에 종속시킴으로써 상투적인 관념에 사로잡히지 않으려는 일종의 도주선 같은 것. 이것을 홍상수 식의 리얼리즘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