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에 가장 짧은 여름
2월에 입국해서 내가 손꼽아 기다리던 영국의 여름. 이곳의 여름이 아름답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고, 유럽 여행의 성수기도 6-8월이라고 하지 않던가. 드디어 내가 영국의 여름을 만끽하는구나!라고 생각했던 그 순간 여름이 지나가버렸다.
에어컨이 없는 집
지금 사는 집을 처음 봤을 때 에어컨이 없어서 놀랐다. 24시간 365일 에어컨 켜야만 살 수 있는 베트남에 살다 와서 더 그렇게 느꼈을지도 모른다. 과연 에어컨 없이 여름을 보낼 수 있냐고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봤더니 우리가 생각하는 '무더운 날씨'는 2주면 지나간다고 했다.
6월까지만 해도 추적추적 비 내리고, 긴 옷은 항상 걸쳐야 하는 날씨였는데 7월 중순이 되니 갑자기 여름이 찾아왔다. 날씨 앱에는 낮 최고기온이 30도라고 해서 일 평균 기온 35도인 곳에서 살던 나는 자신만만하게 창문을 열었다가... 엄청난 후회를 하게 된다.
우리 집 거실 창문은 살짝 동쪽을 향해있는데 그래서인지 아침 해가 길게 들어온다. 문제는 이곳의 햇빛이 서울이나 베트남보다 훨씬 강하다는 점. 햇빛 알레르기가 왜 생기는지 알 수 있을 정도다. 그리고 아침에 해가 들어와서 실내가 슬금슬금 더워지면 밤이 되어도 그 열기가 안 빠졌다. 처음에는 뭣도 모르고 일단 블라인드 다 걷고 창문도 열어놨었는데 그랬더니 밤에 잠을 못 잘 지경이었던 것.
그래서 특단의 조치를 취한 건 낮 12시 이전에 블라인드를 걷지 않는 거였다. 마치 아날로그 시대로 돌아간 기분... 해의 방향을 보면서 해가 우리 집 창문 넘어갔다 싶으면 그때서야 블라인드를 열었다. 그리고 불 앞에 서는 것도 답답해서 요리도 안 하게 되고, 냉면같이 시원한 음식만 먹었다.
또 이전에 소개한 대로 2달 만에 들어온 우리 집 소파는 패브릭 소재다. 뜨끈하게 데워진 집에서 저녁에 TV라도 볼라치면 푸근한 패브릭 소재가 영 답답하고 더웠다. 아마존에서 열심히 cooling mat를 찾았지만 사람용은 안 나오고 전부 개/고양이용만 나오길래 홧김에 나는 한국에서 택배를 받기로 했다. 소파에 까는 인견 패드를 위해서... (하지만 아직도 도착하지 않은 나의 택배, 아무래도 그 인견 패드는 내년에나 쓸 듯하다.)
비가 오더니 여름이 끝났다
그렇게 딱 일주일. 내 어린 시절 여름방학처럼 선풍기 앞에서 빈둥거리고, 시원한 과일 꺼내 먹고, 창문 앞뒤 다 열어두고 맞바람 맞으며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그러다 아마존에 이동식 에어컨을 살까말까 수십 번 검색하고, 에어컨 없이 문만 활짝 열어둔 카페에서 얼음이 다 녹은 아이스커피 마시는 게 지겹게 느껴지고, 길에 세워둔 우리 차에 뭐 커버라도 씌워야 되는 거 아닌가 했던 그 순간, 비가 한 번 오더니 더위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8월 초인 지금 창문 밖으로 패딩 입고 걸어가는 사람이 보이고, 운전 연수받으러 아침 7시에 나오면 추워서 차에 잠깐 히터를 틀어야 할 정도다. 얼죽아는 진작에 탈퇴했고, 불과 3주 전 열일하던 선풍기는 전원 연결 안 한지 오래, 낑낑대며 물 빼둔 온수매트는 한 달 만에 곧 복귀를 앞두고 있다. 아, 올해 여름이 이렇게 지나가다니...
어제는 집 근처 공원에 나갔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하지만 아무도 당황하지 않고 큰 나무 밑에 잠시 서서 비를 피한다. 그러다 비 그치면 다시 나서고, 비가 너무 거센 것만 아니면 적당히 재킷 후드 뒤집어쓰고 가던 길 간다. 이게 말로만 듣던 British Summer 로군.
영국에서 나는 보부상이 된다
이런 변덕스러운 날씨에 대처하려니 짐이 늘어난다. 일단 아우터는 바람막이나 방수재킷으로 고정, 스웨이드 재질 신발은 절대 안 됨, 쌀쌀할 때 껴입을 가디건, 잠깐 해 비칠 때 필요한 선글라스, 작게 접히는 우산, 자전거 타고 다니려면 가방도 기본 방수는 되어야 하고 커버가 있으면 베스트.
예전에 한국에서 헌터부츠가 유행한 적 있었는데 여기 오니 그게 정말 왜 필요한 지 알게 됐다. 장화가 없으면 바닥이 딱딱한 하이킹 신발이라도... 비가 자주 내려서 땅이 금방 질퍽해지고 신발이 쉽게 망가진다. 베트남에 이어 또다시 나는 고급 소재의 신발이 필요 없는 곳에 오게 된 거다.
8월 안에 또다시 더위가 찾아올 수도 있다는 예측이 있지만 7월 중순의 경험으로 봤을 때 그 더위도 아주 길지는 않을 듯하다. 이쯤 하니 에어컨 없이 살아도 된다는 말이 뭔지 알게 됐다.
여기는 한국보다 8시간 느린 곳이지만, 가을은 훨씬 앞서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