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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작가 Aug 08. 2022

찌찔함의 역사 1.

내가 얼마나 찌질한지 모르는 곳에서 다시한 번 찌질해지기 : 편입

아주 어렸을 적부터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다. 절묘한 타이밍과 우여곡절 끝에 조금 무리수를 두고 한국에 귀국한 뒤 영화과에 편입했다. 캐나다에서 딴 학점으로 자연스럽게 3학년으로 편입하게 되었는데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혔다. 편입하자마자 영화를 만들어야 했다. 그야말로 멘붕이었다.


교과서에 친절히 나와있는 것도 아니고 어디 매뉴얼이 있어 찾아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철저히 현장에서 도제 시스템으로 배워가는 것이 학생영화 작업의 현실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드디어 찾았노라 무리해서 들어간 학교를 이대로 그만둘 수 없었다. 나는 내 상황을 직시해야 했다..


그런데 하루가 다르게 나는 초조해졌다. 초조해질수록 진해지는 감정... 간절함. 사람이 극도로 초조해지면 절박해진다는 것과 그리고 절박해지며 굉장히 낮은 마음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왕따를 정식으로 당해본 적은 없지만 너무 단단해 보이는 공동체 안의 이방인이 느끼는 어색함과 쓸쓸함이 어쩌면 왕따의 감정의 결이 비슷하지 않을까 한참을 생각했었다. (여담이지만 그래서인지 지금까지도 나는 새 신자들의 어색함이나 한국 지하철에서 헤매고 있는 외국 가족들이 너무 짠하다. 나의 오지랖의 근원은 여기 있구나 새로이 깨닫고...)



나를 늘 설명해야 하는 일이 많았고 그러다 보니 자신을 자학하는 개그가 제일 잘 먹히는 것도 깨달았다. 그리고 유능함이 없는 인간이 공동체에 스르륵 녹아들 수 있는 방법 중에 하나가 웃기는 것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나는 나를 가지고 나를 웃기며 나는 전혀 위험하지 않은 인간이라는 것을 어필했던 것 같다. 그때 얻었던 별명이 박 구라였다. 자학하는데도 한계가 있어서 나중에 그냥 얼토당토 하지도 않은 뻥을 치고 다녔다. 얼처구니가 없어서 웃기는...


어쨌든 이방인 같은 편입생으로서 나는 남은 2년 동안 이미 견고해 보이는 그 도제 시스템 안으로 어떻게든 들어가고 싶었다. 민폐 끼치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던 다소 깍쟁이 성향이 다분했었던 나는 처음 보지만 이미 후배들에게 어떤 역할이라도 괜찮다고 촬영할 때 불러달라고 했다. 그리고 최대한 튀지 않으면서도 나의 노동력을 재빠르게 성실하게 투자했다..


한국 특성상 도제 시스템 안에서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은 같이 일하기 어려운 사람이 된다는 것을 몇 차례 몸소 경험했다. 그러니 결국 귀찮지만 별로 하기 싫어하는 일들 그리고 그리 큰 기술이 필요하지 않은 제작부 일들을 먼저 자청해야 했다. 이 시점에서 중요하게 터득한 것이 최대한 나이 먹은 자로서의 권위 따위는 개에게나 주는 게 사는데 엄청 편하다는 것이다..


때로는 붐 마이크를 들고, 때로는 KTX 광명역 앞 6차선 도로에서 차량 안내를 했다. 아무 집이나 초인종을 누르고 조명에 사용할 전기를 구걸했고 우드폼 하나만 깔고 겨울 냉바닥에 조명기에서 나오는 열기로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조명기 불빛은 꽤나 따뜻해서 밤샘 촬영 내내 얼굴을 들이대고 있다 얼굴이 빨갛게 타기도 했다. 탑차에 기자재와 함께 실려 이동하기도 하고 길가에 있는 가게에 무작정 들어가서 영화 소품으로 쓸 물건들을 빌리기도 했다..


평생을 거쳐야 할 수 있는 구걸과 애원, 그리고 백만 스물한번 정도의 외침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인생에 총량이라는 것이 있다면 나는 앞으로 죄송할 일은 없겠다 싶겠네 하며 스스로를 다독 거렸다


#에필로그 

살면서 뱉을 수 있는 모든 <죄송합니다> 류의 말을 그때 사용했다고 생각했으나, 나는 지난 주에도 그리고 이번주에도 사용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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