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회
VIP 고객은 자신의 불편한 증상을 교양 있게 설명했고 영지네 회사 직원이 뿌린 방향제 때문에 미끄러진 거라 확신하며 종합 검진을 받겠다고 했다. 자신의 요청을 직접 처리하려면 피곤할 테니 영지 회사 측의 보험 회사 직원과 소통하겠다며 영지를 꽤 배려하는 투로 얘기했다.
장마 시즌이라 며칠 전부터 고객이 넘어진 당일까지 비가 내렸다. 방향제를 뿌린 것은 맞지만 팝업 스토어 앞을 오가던 고객이 들고 다닌 우산에서 떨어진 물 때문일 수도 있었다. 어느 하나 명확하게 단정 짓기 힘들었다. 영지는 고객에게 매장 앞에서 넘어진 일에 유감을 표시한 뒤, 필요한 진료는 모두 받으라 안내했다. 그리고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보고한 뒤 고객이 언급한 보험 가입 여부를 물었다. “그런 게 어디 있느냐"라며 회의 중이라고 말한 사장은 금방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몇 초 뒤 <건축물 관리 사건·사고별 모음> 제목의 블로그 링크와 “백화점 5:5”라는 짧은 카톡 메시지를 보내왔다.
처음부터 호의적이었던 백화점 담당자에게 도움을 청했다. 말 그대로 백화점 측의 Very Important Person(VIP) 고객이니 백화점 자체 보험으로 처리해 달라는 간곡한 영지의 요청이 받아들여졌다. 그렇게 팝업 스토어 행사 마지막 날 매장 앞에서 넘어진 고객과 백화점 담당자 사이를 번갈아 가며 이야기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영업시간이 끝나길 기다리며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통화목록에 영지가 늘 불길하다고 생각했던 저장되지 않은 번호가 수십 개 있었다. 하루가 한 달 같다는 생각이 드는 동시에 철수가 시작되었다.
매장 내 가구와 제품만 꺼내면 금방 끝날 것으로 생각했던 철수 작업은 벽면 포스터 제거라는 생각지도 못한 복병을 만났다. 고급스러움을 위해 부착한 포스터를 잡아떼면 백화점 벽면의 하얀 페인트가 벗겨졌다. 불과 몇 시간 전, 영지는 백화점 담당자의 도움을 청했던 자신이 떠올랐다. 더 이상의 문제는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래야 한다는 마음으로 노심초사 아이 달래듯 긁어내길 몇 시간쯤이었을까? 팝업 스토어 이전 상태만큼 깨끗한 벽면을 확인했을 땐, 이미 시간은 자정이 넘었고 버스와 지하철은 당연히 끊겨 있었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던 날 밤, 영지는 자신의 무감각한 팔을 주무르며 팝업스토어 결과가 적자라는 사실을 상기했다. 다음 날 사장을 만날 생각에 노곤했던 팔다리가 긴장감으로 떨렸다.
사장은 팝업 스토어 결과가 좋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며 간헐적으로 할당되던 다른 법인 일을 총괄하라고 지시했다. 영지는 이미 책임지고 있는 수십 가지의 일을 떠올리며 다른 법인 일을 총괄하는 건 불가하다고 생각했다. 사장에게 면담을 신청하고 자신이 현재 하는 일과 사장이 지시한 일을 병행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자신의 업무를 한눈에 보기 쉽게 그려서 빨간펜으로 ‘택배 송장 번호 입력하기’ 부분에 동그라미를 치며 영지는 말했다. 이 부분에 인력 충원이 필요하며 신규 직원의 적응 기간을 감안해 지금으로부터 3개월 후에나 다른 법인의 일을 맡을 수 있을 거라 답했다. 사장은 ‘하소연하지 말라'라며 ‘영지 연봉에 두 개 법인의 일을 총괄할 사람은 쌔고 쌨다’고 답했다. 덧붙여 라떼는 팝업 스토어 마지막 날 같은 사건이 벌어지면 영지처럼 상사에게 전화도 걸지 않고 알아서 해결했고 일을 시키면 싫은 티 내지 않고 그대로 했을 거라 말했다.
“백화점 건은 다행히도 잘 해결되었지만…”이라고 말끝에 혼잣말처럼 작게 얘기하던 사장의 반질반질한 이마가 영지의 시선을 끌었다. ‘방금 피부과를 다녀왔나 보군’이라고 생각하며 영지는 자신과 사장이 고작 한 살 차이라는 사실이 생뚱맞게 떠올랐다. 그리고 영지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에 있던 질문을 던졌다.
“사장님은 지금 제가 하는 일을 하면서 또 다른 법인의 일도 총괄해서 할 수 있으세요?” 당연하다고 답하는 사장에게 영지는 말했다.
“그럼, 직접 하시죠"
하루 뒤, 사장은 영지에게 1번에서 8번까지 나열된 장문의 카톡 메시지를 보냈다. 기회를 준 자신에게 고마워할 줄 모르는 영지에 대한 노여움이 첫째였다. 부사장 위치에서 매출을 더 올리기 위한 전략에 집중해야 하는데 영지는 자질구레한 운영에 치중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영지가 돈 벌 생각이 있는지 의심스럽다고 지적했다. 회사 직원은 부사장인 영지 달랑 하나라는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못한 점만 빼면 꽤 구조적이고 논리적인 지적이었다. 반박할 의욕도 생기지 않아 업무는 재밌었지만 사장의 업무 방식이 자신과 맞지 않아 더 이상 일할 수 없었다고 답했다. 자신에게 일할 기회를 줘서 감사하다고 덧붙여 문자를 보낸 뒤, 백화점 적자를 만회하기 위해 몇 시간 전까지 머리를 쥐어짜면서 세웠던 계획안을 컴퓨터 휴지통으로 보냈다.
며칠 뒤, 사장은 후임자를 찾았다며 퇴사 일자는 10일 뒤 통보했다. 후임자는 이전 직장에서 아직 퇴사하지 못한 마흔 후반 정도로 보이는 남성이었다. 후임자의 현 직장 퇴사일과 사장이 통보한 영지의 퇴사일이 동일했다. 그간 영지 혼자 진행했던 수십 가지 일을 단 10일 동안 후임자가 모두 습득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지만 영지는 고민해 줄 여력이 없었다. 영지는 후임자의 현 직장을 찾아가 점심시간과 퇴근 시간 이후에 인수인계해야 했고 퇴사 전까지 백화점에 팝업 스토어를 세팅하고 투자자에게 IR을 하고 동시에 회사의 복잡한 구조를 후임자에게 납득시키라 지시받았기 때문이었다. 인수인계를 받던 후임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이 많은 일을 어떻게 다 했냐는 질문에 영지는 자신의 처음을 떠올렸다.
뾰족한 전문 기술도 없고 하고 싶은 바도 명확하지 않다면 돈이라도 벌겠다는 생각이었다. 적성이나 기존 이력과 크게 상관없더라도 남들처럼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언젠가는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을 자유롭게 할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희망이 있었다. 반면 사장은 일관성이 있는 사람이었다. 과거 자신이 투자자나 다른 회장님들에게 보낸 카톡 메시지를 영지에게 주기적으로 보여주며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해결사의 태도가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비결이라 말했다. 이렇게 오래전부터 사장은 일과 돈에 대한 기준이 확실했다. “영지 연봉이면 할 사람이 많다"는 사장의 말은 진심이었다.
사장의 지시사항이 많아지고 힘들어질수록 영지의 속마음이 투명하게 드러났다. 회사에서 자아실현하지 말라고 세상 다 산 사람처럼 말하고 다녔던 영지는 사실 그 누구보다 덕업일치를 꿈꿨다. 돈 때문에 일하더라도, 돈 때문만은 일하기 싫었다. 세상에 진짜 쓸모 있는 제품을 만들어 고객과 협력사에 정직하게 거래하고 싶었다. 또한 그 일이 ‘먹고사니즘'을 해결할 수 있는 적정한 보상이 되길 원했다. 누가 시켜서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세운 기준을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노력하는 시간을 쌓아가고 싶었다. 그리고 계속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사장은 이런 영지에게 나이브하다며 돈 벌 생각이 없다고, 자신이 사람을 잘못 봤다고 평가했다. 영지는 부인하지 않았다.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애매모호한 태도로 일을 시작한 영지는 일과 돈에 대한 태도가 분명한 사장과 두 차례 일하며 그 어느 때보다 자신의 나이브함을 확신했다.
8개월 만에 부사장으로 승진하고 받은 화환에 영지는 물 한 번 주지 않았다. 처음 만개해서 배달 온 꽃이 떨어지고 줄기까지 시들기까지 한 달 하고도 반이 걸렸다. 마지막 꽃이 떨어졌을 즈음 영지는 퇴사했다. 영지의 열 번째 퇴사였다.
**본 콘텐츠는 창고살롱Ⓡ 레퍼런서 박지영님과 창고살롱이 공동 기획, 편집하여 유료 서비스 구독 콘텐츠 서비스로 게재된 글입니다.